“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 아심 무니르 파키스탄군 육군참모총장과 대화에 기반해 이란에 대한 폭격과 공격을 2주간 유예하는 데 동의한다.”
4월 8일(이하 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이란과 휴전 유예 소식을 전했다. 이날 아침만 해도 “오늘 밤 문명 하나가 사라질 수 있다”며 압박 수위를 높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파키스탄의 중재를 수용한 것이다.
파키스탄은 군부 독재국가다. 2025년 11월 개헌을 통해 군부 권한을 초법적 수준으로 강화했다. 형식상 총리가 행정부 수반을 맡는 민주국가이지만, 실권은 군부가 쥐고 있다. 그런데 그런 파키스탄이 4월 이후 미국과 이란 간 중재국을 자처하며 종전 양해각서(MOU) 체결까지 핵심 역할을 해 왔다.
파키스탄은 1970년대 말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과 1998년 핵실험, 민선 정부를 축출한 1999년 군사 쿠데타, 2000년대까지 계속된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 등으로 미국으로부터 문제 국가 취급을 받아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시절인 2018년 1월 1일 SNS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위해 파키스탄에 수년간 수백억달러를 지원했지만, 파키스탄은 테러리스트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다며 “파키스탄은 거짓과 기만밖에 없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과거 국가 간 분쟁의 조정 역할은 유엔(UN·국제연합)이나 스위스·스웨덴·노르웨이 등 분쟁과 거리가 먼 서구 민주 진영 국가가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파키스탄이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의 중재국가가 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네 가지로 정리했다.
美·이란 양쪽 모두와 두터운 친분
중재국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분쟁 당사국 중 어느 한쪽하고만 친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파키스탄은 이란 전쟁의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파키스탄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밖에 있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 중 하나이지만, 영토 내에 미군 기지는 없다. 역내 전통적인 중재국이었던 카타르 등 걸프 국가와 다른 점이다. 파키스탄은 또 이란과 약 900㎞에 달하는 국경을 맞댄 이웃 국가이기도 하다. 이란과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의 국교도 이슬람교인데, 인구 약 20%에 달하는 2500만 명은 이란이 종주국 역할을 하는 시아파 무슬림이다. 이슬람교도 중 80% 이상을 차지하는 주류 수니파의 종주국은 사우디아라비아다. 이란은 200여 개가 넘는 이슬람 종파 중 유일하게 수니파에 대적할 수 있는 시아파(20% 미만)의 맹주다. 이란과 복잡하면서도 긴밀한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미·이란의 연결 통로 역할을 자청해 왔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으로 미·이란 외교 관계가 끊긴 상황에서 주미 파키스탄 대사관이 워싱턴 D.C. 내 ‘이란 이익대표부’를 지금까지 운영해 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경제·외교적 이해관계
파키스탄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선 것은 절박한 자국 사정 때문이기도 하다.
파키스탄은 원유 수요 7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이 가운데 99%가 중동산이다. 또한 중동에서 일하는 파키스탄인 500만 명이 본국으로 보내는 송금액이 파키스탄 전체 수출 규모와 맞먹는다. 이란,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주의 레코딕 광산은 세계 최대의 미개발 금·구리 매장지이기도 하다. 2029년 광산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37년 동안 740억달러(약 111조5846억원)의 수익을 거둘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런데 캐나다 광산 회사 배릭 마이닝은 이란 전쟁 등 ‘중동 안보 악화’를 이유로 개발 연기를 선언했다. 전쟁이 길어질 경우 이 지역에서 파키스탄의 통제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발루치스탄주는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거점이기도 하다. 발루치스탄주의 과다르항에 중국은 눈독을 들이고 있다. 수심이 깊어 파키스탄에서 유일하게 대형 선박 접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만일의 사태로 믈라카해협이 봉쇄되면 과다르항을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중국이 파키스탄의 최대 투자국을 자처하며 우호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파키스탄으로서는 도로와 철도, 항만, 발전소에 대규모 투자가 시급한데, 발루치스탄 무장 투쟁이 격화한다면 중국의 파키스탄 투자에도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한층 더 밀착해, 앙숙인 인도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란 전쟁 확대는 파키스탄 내 시아파 무슬림을 자극할 수 있다. 실제로 3월 1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시아파 시위대가 미국 영사관을 습격, 1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힘 빠진 유엔과 달라진 미국
유엔이 국제분쟁에서 마지막으로 중재 역할을 한 건 2022년 7월 22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곡물 협정이었다. 당시 유엔은 튀르키예와 함께 우크라이나산 곡물을, 흑해를 통해 수출할 수 있도록 협정을 이끌었다. 2022년 2월 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흑해 항구를 봉쇄해 곡물 수출 대국인 우크라이나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발생한 세계 식량 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하지만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 러시아가 주요 분쟁에서 유엔을 우회해 독자적으로 협상을 추진하면서 유엔의 존재감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유엔 스스로도 평화 유지 관련 인력을 감축하는 등 과거와 달리 중재 역할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은 여전히 중재 역할에 적극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8개월 만에 여덟 개의 전쟁을 끝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접근법은 전임자들과 결이 많이 다르다. 민주주의 가치에는 큰 관심이 없고, 중재의 대가로 자원을 요구하는 등 오히려 과거 권위주의 국가와 비슷한 점이 많다. 미국의 변화로 파키스탄이 중재국 역할을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총리·육군참모총장의 쌍끌이 역할
미·이란의 ‘2주 휴전’을 처음 공개 제안한 건 샤리프 총리였다. 샤리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이란 문명 삭제’ 군사작전 개시를 앞둔 4월 8일 X(옛 트위터)에 “모든 교전 당사자가 2주 동안 전면적인 휴전을 준수할 것을 촉구한다”는 게시글을 올렸고, 트럼프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그(샤리프)를 아주 잘 안다.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파키스탄의 실권자 무니르 참모총장은 트럼프 가문과 연계된 스테이블코인을 국경 간 결제에 도입하기로 한 ‘크립토 딜’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샀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무니르 참모총장을 ‘가장 좋아하는 야전 원수’ ‘대단한 전사’라고 수차례 치켜세웠다. 지난해 6월엔 백악관을 방문한 무니르 참모총장이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무니르 참모총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친분을 바탕으로 미국 측이 제안한 15개 항목의 휴전안을 이란 측에 전달하는 등 극비리에 물밑 협상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세 차례나 파키스탄 총리를 지낸 형 나와즈 샤리프가 군부와 충돌을 빚을 때마다 군 최고사령부를 찾아 갈등을 봉합하는 중재 역할을 해온 셰바즈 샤리프 총리의 경력은 무니르 참모총장과 친밀한 관계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난항 중인 美·이란 협상
미국과 이란은 종전 MOU 이행을 위해 6월 21일부터 스위스 뷔르겐슈토크 리조트에서 파키스탄과 카타르의 중재로 18시간에 걸쳐 ‘무박 2일’ 1차 협상을 진행했다. 양국은 이를 통해 향후 60일 내 최종 합의를 목표로 하는 로드맵과 호르무즈해협·레바논 관련 분쟁 체계 마련에 합의했다. 레바논 문제를 놓고 이란이 ‘호르무즈해협 재봉쇄’를 선언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적 행동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협상은 한때 파행 위기까지 갔다. 그럼에도 협상 시한인 8월 16일까지 회담을 계속하겠다는 기본 틀엔 최소한의 합의를 이룬 모양새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1차 협상이 끝난 후 취재진에게 “이란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을 자국으로 다시 초청하는 데 동의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란 측은 이를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