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국방 장관 존 힐리가 사임했다.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영국 정부가 배정한 국방 예산이 너무 부족해서다. 힐리 장관은 키어 스타머 총리에게 보낸 사직서에서 그는 “총리는 할 수 없었고, 재무부는 하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평화의 시대가 지나가고 전쟁의 위협이 커지는 시기에 국가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데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는 비난이다. 부족한 예산은 군의 준비 태세를 떨어뜨리고, 작전에 투입된 장병의 위험을 키우고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힐리 장관은 스타머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는데 그런 그가 총리와 재무부를 직격하고 사퇴했다. 힐리 장관 사임 후 약 열흘이 지난 6월 22일 스타머 총리도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경기 불황과 더딘 개혁 속도로 지지율이 급락한 상황에서 지난 5월 치러진 지방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 것이다.
이런 예외적인 상황은 영국군이 처한 곤경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국방 장관 사임을 가져온 핵심 이슈는 국방투자계획(DIP)이다. 매년 편성되는 예산이 아니라 수년에 걸친 전반적인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 영국 국방부는 커지는 위협과 기술 발전 등을 고려하여 향후 4년간 280억파운드(약 56조원)의 추가 예산이 있어야만 영국이 국제사회에 약속한 국방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예산권을 쥔 재무부의 답은 120억파운드(약 24조원)였다. 여러 조정 절차를 거쳐 최종 액수는 135억파운드(약 27조원)가 됐다. 애초 목표로 했던 금액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다. 영국군으로서는 120억파운드면 삭감, 180억파운드면 연기와 지연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180억파운드 이하의 금액으로는 2030년까지 목표했던 전력 구축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힐리가 사임했다.
평화배당금이 남긴 영국의 딜레마
영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과 마찬가지로 2035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 예산으로 확보한다는 계획을 제시해 왔다. 연금 및 인프라 등을 제외한 핵심 국방 부문에는 3.5%를 사용한다는 것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군사비 증액 압박을 받아온 나토 동맹국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135억파운드라면 2030년 예상 GDP의 2.68%에 불과한 규모가 된다.
국방 장관으로서는 이 금액으로는 최소한의 역할도 하기 힘들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규모와 더불어 DIP의 내용 자체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었다. 미래 전장을 대비한 계획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변화와 혁신의 내용이 있어야 하지만 DIP는 기존 무기 확보에 국한되었던 것이다. 미래 기술이 아닌 어제의 군대에 돈을 묶어두겠다는 계획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군과 재무 당국의 갈등은 모든 국가에 있지만, 영국에서의 갈등은 오래됐다.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영국은 냉전 당시 미국과 더불어 유사시를 대비한 핵우산 및 전략핵잠수함을 통한 해상 패트롤을 주기적으로 진행하면서 자유 진영의 안보를 책임진 국가였다.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에는 비할 수 없는 규모로 축소됐지만, 그래도 강력한 해군력과 충분한 실전 경험을 갖춘 육군은 미국을 지원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영국군의 전력 규모는 급속하게 축소되었다. 군비를 줄여 복지와 민생에 돌린다는 평화배당금은 모든 서유럽 국가의 공통 정책이었다. 그 결과 영국 육군 정규 병력은 11만 명에서 7만 명 규모로 축소됐다. 나폴레옹 때보다도 작은 규모가 됐다. 해·공군을 합해도 18만 명 수준이다.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계획된 병력을 모집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1990년 걸프전에 참전할 때만 해도 기갑여단을 파병할 수 있던 영국군이지만, 지금은 기갑 대대도 파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장비·탄약은 노후화되었고 비축분도 부족하다. 국가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소규모 부대를 세계 곳곳에 파견하면서 군은 상시적 과부하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정작 훈련은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2026년 영국군의 현실이다.
중후장대 무기에 발 묶인 영국 국방 예산
예산이 부족하지만, 쓸 곳은 많은 곳이 영국군이다. 6만5000t급의 항공모함 2척을 건조하는 데 엄청난 예산을 썼지만, 이곳에 탑재할 F-35B 전투기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항모를 호위할 방공 구축함 및 대잠 구축함은 퇴역을 앞두고 있지만, 대체함 확보는 요원하다. 수중 발사 탄도미사일을 탑재하고 해저를 순찰하는 4척의 뱅가드급은 잦은 고장으로 인해 교체가 필요하다. 문제는 돈이었다. 방위비를 늘리고, 첨단 무기를 도입하고, 급여를 인상하겠다는 다짐은 어디서 재원을 확보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무기력해졌다. 핵심 국방비를 GDP의 2.68%까지 늘리겠다는 것이 영국의 한계였던 것이다. 장기간 저성장을 겪고 있는 영국으로서는 다른 분야의 예산 삭감분을 국방비 증액으로 돌리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영국군 앞에 놓인 또 다른 이슈는 과거지향적이라는 비판이다. 영국 국방 예산의 상당수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 F-35B 추가 도입, 원자력잠수함 교체 같은 중후장대형 무기 체계에 집중되어 있다. 수십 년에 걸쳐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보여주는 교훈은 다르다. 시시각각 진화하는 드론에서 볼 수 있듯이 값싸고 유연하며 즉각 활용할 수 있는 무기가 미래 전장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점은분명하다. 기존 무기 확보에 소요되는 비용의 10%만 가지고도 미래 군대를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이 대두되고 있지만, 정작 영국군은 전통적인 무기 체계 존속과 조달 시스템 유지에 머물러 있다. 절대적 예산 부족과 더불어 오늘의 군대와 내일의 전장 사이에 예산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도 영국군 앞에 놓인 숙제다.
영국군의 경고는 한국군의 거울
영국군의 곤경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GDP 대비 높은 국방비를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인구 절벽에 따른 병력 부족에 따라 기존 전력 유지도 벅찬 상태다. 오래전에 계획한 대형 첨단 무기 도입을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혁신적인 저비용 무인 무기 시스템 구축에 주력할 것인지, 망설이고 있다. 모두가 드론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드론전을 치르기 위한 전체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지는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개별 무기 성능이 전장을 지배한다는 과거 개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2026년 사임한 힐리 영국 국방 장관이 던진 ‘마주한 위협만큼의 비용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지’라는 물음은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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