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마린' 포스터. /사진 20세기 폭스
영화 '더 마린' 포스터. /사진 20세기 폭스
2020년 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여행 산업이 큰 충격을 받았다. 공항은 텅 비었고, 국경마저 봉쇄됐다. 그 충격의 한가운데 에어비앤비가 있었다. 예약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호스트의 수입이 줄어들었고, 회사가 믿어 온 성장 공식이 더는 통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호텔 산업을 뒤흔드는 혁신 기업으로 꼽히던 에어비앤비였지만, 팬데믹 앞에서는 플랫폼의 규모도, 브랜드의 인지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브라이언 체스키 최고경영자(CEO)는 직원에게 창업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고 털어놓았고, 대규모 인력 감축이 진행됐다. 세계여행의 상징 같던 회사가 여행이 사라진 자리에서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시장이 성장하고 수요가 살아 있을 때는 어느 정도 환경에 묻어갈 수 있다. 그러나 성장이 멈추고, 익숙한 전략이 더 이상 먹히지 않으면 기업은 전혀 다른 물음에 직면한다. 과연 지속적인 성과는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존 보니토 감독의 영화 ‘더 마린(The Marine, 2006)’은 이 물음을 한 남자의 거친 추격전으로 풀어낸다.
신재훈 - 이화여대 경영대 겸임교수, 서울대 경영학 학·석사, 미국 시카고대 MBA, 서강대 경영학 박사, 현 리버스톤 자산운용 사장, '비욘드 시네마' '비욘드 스트래티지' 저자
신재훈 - 이화여대 경영대 겸임교수, 서울대 경영학 학·석사, 미국 시카고대 MBA, 서강대 경영학 박사, 현 리버스톤 자산운용 사장, '비욘드 시네마' '비욘드 스트래티지' 저자

멈출 수 없는 추격

전직 해병대원 존 트라이톤(존 시나 분)은 이라크 작전 중 상부의 대기 명령을 어기고 알카에다 무장 세력의 은신처를 급습한다. 교전 끝에 인질을 구출하지만,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그는 해병대를 떠나게 된다. 그에게 군복을 벗은 뒤의 삶은 낯설고 불편하기만 하다. 민간 회사에 경비원으로 취직하지만, 하루 만에 해고된다. 전장에서 그를 살렸던 군인의 감각은 민간인의 일상에서는 오히려 불편한 경계심으로 드러난다. 인질을 구한 영웅의 단호함은 사라지고 눈빛엔 머물 곳을 찾지 못한 긴장만이 남아 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아내 케이트는 여행을 제안한다. 숲길을 달리며 오랜만에 웃음을 되찾은 것도 잠시, 기름을 넣으러 들른 주유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보석 강도 롬(로버트 패트릭 분) 일당이 들이닥쳐 난동을 부리고, 케이트를 인질로 끌고 간다. 아내의 납치를 목격한 트라이톤은 경찰의 구조를 기다리는 대신 곧바로 그들을 뒤쫓는다. 도로 위 총격전과 폭발, 호수와 늪지대를 지나 부두의 불타는 창고에 이르기까지, 그는 추격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이 움직이는 이유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L.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M. Ryan)은 인간의 행동이 오래 지속되려면 외부 보상이나 처벌 대신 스스로 의미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트라이톤이 끝까지 달린 까닭도 외적인 보상이 아닌 내재적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를 움직인 것은 명령이 아니라 아내를 구하려는 남편의 절실함이었다. 

캐나다 전자상거래 플랫폼 기업 쇼피파이는 내재적 동기가 지속적 성장의 중요한 조건임을 보여준다. 창업자 토비 뤼트케(Tobi L tke)는 스노보드 온라인 상점을 열려다 기존 전자상거래 도구의 불편함을 직접 겪었고, 결국 스스로 상점 운영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이후 결제, 재고 관리, 배송, 마케팅 기능을 더해 간 과정도 이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작은 상인이 자기 이름으로 장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품의 방향을 이끌어 온 것이다. 2024년 쇼피파이의 총거래액은 2923억달러(약 441조원), 매출은 88억8000만달러(약 13조4000억원)에 이른다.

넘어진 뒤에도 무너지지 않는 조직

트라이톤은 끊임없이 맞고, 넘어지고, 물에 빠지고, 폭발에 휘말린다. 하지만 그는 쓰러질 때마다 상황을 다시 읽고, 몸을 일으켜 다음 길을 찾는다. 이처럼 위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일이 아니라, 그 뒤에 다시 일어서는 힘이다.

2024년 4월, 첨단 반도체 생산의 핵심 거점인 대만에 강진이 닥치자, 세계 반도체 공급망이 크게 출렁였다. 그 한가운데 TSMC가 있었다. 지진 직후 회사는 안전 절차에 따라 사람을 먼저 대피시킨 뒤, 장비 상태를 빠르게 확인하고 생산 라인을 차례로 되살렸다. 일부 장비는 파손됐지만 핵심 설비의 손상은 심하지 않았고, 주요 생산 시설은 짧은 시간 안에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TSMC가 버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지진이 잦은대만의 특성을 반영해 공장 설비와 비상 대응 절차, 장비 보호 체계를 꾸준히 다듬어 온 덕분이었다. 이처럼 위기에 강한 회사는 사고가 나기 전부터 복원력을 준비한다.

1 인질 구출 작전 수행 중인 트라이톤. 2 폭발을 뚫고 추격을 계속하는 트라이톤. 3 마침내 아내를 구하다. /사진 20세기 폭스
1 인질 구출 작전 수행 중인 트라이톤. 2 폭발을 뚫고 추격을 계속하는 트라이톤. 3 마침내 아내를 구하다. /사진 20세기 폭스

끝까지 해내는 집념

지속적인 성과는 동기와 복원력에 더해 끝까지 해내는 집념이 있어야 가능하다. 집념은 무조건 버티는 고집과 다르다. 고집은 목표와 방법을 모두 고수하려 하지만, 집념은 목표를 유지하되 달성하는 방법은 유연하게 바꾼다. 트라이톤은 아내를 구한다는 목표를 한순간도 놓지 않았지만, 방법은 매번 새로 찾았다. 맞닥뜨린 상황에 맞게 차를 몰고, 늪을 건너고, 배를 빼앗고, 창고로 뛰어들었다. 그의 집념은 단순한 근성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대처하며 끝까지 움직이는 힘이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개발은 이런 집념을 잘 보여준다. 반도체 회로를 더 작고 정밀하게 새기려면, 기존 노광 기술을 넘어서는 더 짧은 파장의 빛이 필요했다. 극자외선은 다루기 까다로워 많은 이가 상용화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ASML은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 자이스의 초정밀 거울, 미국 사이머의 광원 기술, 인텔과 삼성, TSMC 같은 고객사의 협력을 한데 묶어 문제를 하나씩 풀었다. 실패할 때마다 설계를 바꾸고, 광원을 다듬고, 장비 전체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일을 반복했다. 오랜 시간 끝에 ASML은 2013년 첫 EUV 생산 장비를 출하했고, 이후 EUV 노광 장비의 사실상 유일한 공급자가 됐다. 오늘날 7㎚(나노•1나노는 10억분 1m) 이하 첨단 반도체 공정에서 이 회사의 장비는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설비가 됐고, 2024년 ASML 매출은 283억유로(약 49조5000억원), 순이익은 76억유로(약 13조3000억원)에 이른다.

멈춘 여행이 다시 시작될 때

팬데믹 앞에서 에어비앤비는 자사가 여행자에게 무엇을 제공해 왔는지 다시 물었다. 사람들은 단지 잠잘 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호텔 대신 낯선 이의 집을 고른 이들은 그 도시의 일상에 잠시 들어가는 경험을 원했다. 에어비앤비가 다시 출발해야 할 자리도 그 경험에 있었다.

회사는 불필요한 사업을 덜어 내고 조직을 추슬렀다. 근거리 여행과 장기 체류, 원격 근무가 바꿔 놓은 이동 방식에 맞춰 서비스를 손질했다. 여행의 모양이 달라지자, 플랫폼도 다시 다듬었다. 호스트와 게스트 사이의 신뢰, 가격 표시의 혼란, 예약 과정의 불편, 장기 체류에 필요한 기능까지 하나씩 손보았다. 여행이 멈춘 동안 에어비앤비는 사업을 시작한 동기를 되짚고, 다시 일어설 힘을 다졌으며, 계속 이어 갈 일에 집중했다. 그 결과, 여행 수요가 되살아난 2024년 에어비앤비의 예약 숙박·체험 건수는 4억9100만 건을 넘었고, 매출은 110억달러(약 16조6000억원)를 웃돌았다. 

트라이톤은 소화기에 맞아 쓰러지고, 폭발에 나동그라지고, 늪과 물길에 발이 묶였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구하려는 분명한 동기, 해병대에서 단련된 강인한 체력과 빠른 판단력,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집념이 있었기에 다시 일어섰고 마침내 아내를 구해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공동의 목표를 향한 구성원의 명확한 동기, 위기를 견디고 다시 일어서는 복원력, 책임감에서 우러난 열정과 집념이 있을 때 성과는 지속 가능하다. 

신재훈 이화여대 경영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