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독일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 /사진 크리에이티브커먼스
살다 보면 평온한 하루가 아주 작은 소리 하나로 완전히 다른 시간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전화벨 하나, 문득 도착한 문자 하나, 누군가의 표정 변화 하나가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방의 공기를 순식간에 바꾸어놓는다.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기도 전인데, 몸은 먼저 알아차린다.
음악도 때로 그렇게 시작한다. 차분히 사연을 설명하거나 감정을 준비시키지 않고, 이미 무언가가 들이닥친 뒤의 마음에서 곧바로 출발하는 음악이 있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1810~56)의 피아노 작품 ‘크라이슬레리아나’ 첫 곡이 내게는 그렇다. 악보 첫머리에 슈만은 짧은 독일어 지시어 하나를 적어두었다.
‘Äußerst bewegt.’
필자는 종종 연주회 프로그램 노트에서 이 말을 한국어로 ‘매우 빠르게’, 혹은 ‘매우격렬하게’로 번역한 것을 보아왔다. 실제 이 곡은 빠르고, 불안하며, 격렬하다. 그러니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번역을 볼 때마다 어딘가 중요한 것이 빠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원래 이 말은 단순히 속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온하던 세계가 어떤 사건으로 순식간에 바뀌고, 그 충격으로 마음이 움직여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크라이슬레리아나’란 제목부터 독일 낭만주의 문학과 깊이 연결돼 있다. 곡 제목은 독일 소설가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의 글에 등장하는 기이한 음악가 요하네스 크라이슬러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크라이슬러는 소설에서 사회의 평온한 질서 안에 잘 머물지 못하고, 음악적 열광과 불안, 상상과 고독 사이를 오가는 인물이다. 슈만은 “이 인물에게서 낭만적 예술가의 전형을 봤고, 동시에 나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또 자기 작품이 “내 성격과 내가 추구하려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슈만은 훗날 아내가 된 클라라 비크와 사랑이 깊어지던 시기에 이 작품을 썼다. 그는 클라라에게 “이 곡에서 당신과 당신에 관한 내 생각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크라이슬레리아나’는 사랑과 불안, 환상과 자기 분열이 뒤섞인 내면극에 가깝다. 그래서 곡 첫머리에 적힌 ußerst be-wegt는 약 35분에 이르는 이 작품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과 같다.
'매우 격렬하게'라는 표현으론 부족
어느 날 연구실에서 한 학생이 이 곡을 연주한 일이 있었다. 빠른 음형은 선명했고, 에너지도 충분했다. 연주가 끝난 뒤 학생과 함께 악보 첫머리에 적힌 ußerst bewegt를 다시 보았다. 그 옆에는 어디선가 찾아 적었을 법한 ‘매우 빠르게’라는 한글 번역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뜻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 번역만으로는 슈만이 적어둔 말의 온도가 너무 쉽게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학생에게 ‘더 빠르게’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가장 바깥의 한계까지 밀려나는 격렬한 동요를 생각해 보자고 했다.
소리를 줄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열정을 덜어내라는 뜻도 아니었다. 오히려 격렬함은 그대로 두되, 그것이 너무 쉽게 흩어지지 않도록 마음 안쪽의 압력으로 더 강하게 응축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나 자신도 그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레슨이 끝난 뒤에도 ußerst be- wegt라는 말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집에 돌아와 한참 동안 그 장면을 곱씹고 있을 때 문득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네 살 무렵의 일이다. 나는 평소처럼 거실 한쪽에서 놀고 있었다. 집 안은 조용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후였다. 그러다 전화벨이 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평범한 소리였지만, 그 전화 한 통 이후 집 안 공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전화를 받으신 어머니가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하셨고, 곧 아버지가 급히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부모님은 우리 형제를 친척에게 맡긴 뒤 서둘러 어디론가 떠나셨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외할머니의 부고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사실 네 살짜리 아이가 그 상황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다만 필자가 기억하는 것은 사건의 구체적인 순서나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의 느낌이다. 평온하던 일상이 전화 한 통으로 갑자기 찢기듯 바뀌어버린 상황, 조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던 거실이 한순간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사건의 장소가 되어버렸을 때 느꼈던 감각 말이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이 놀라지 않게 애써 울음을 삼켰지만, 이미 감정은 집 안 전체를 뒤덮었다.
필자는 그게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상실인지 알지 못했다. 죽음이라는 말의 의미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 순간을 되짚어 보면 몸이 먼저 알았던 것 같다. 어떤 감정은 너무 갑작스럽게, 너무 크게 밀려와 사람과 공간을 일상의 안쪽에서 바깥 끝으로 몰아낸다는 것을 말이다.
비로소 학생에게 설명하고 싶었던 말이 조금 선명해졌다. ußerst bewegt라는 말은 감정을 격렬하고 빠르게 표현하라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평온했던 세계가 어떤 사건으로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바뀌고, 충격이 이성보다 먼저 몸과 마음을 덮쳐오는 상태에 가깝다.
따라서 단순히 매우 빠르게라고만 쓰면, 우리는 슈만이 적어놓은 말의 가장 핵심적인 결을 놓치게 된다. 먼저 이 단어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독일어 ‘außer’라는 말의 뿌리로 들어가 봐야 한다. 오늘날 독일어에선 ‘Außerdem’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는 상점에서 주문을 받은 점원이 다시 고객에게 “그밖에 또?” 혹은 “그 외에 더?”라고 물어보는 말이다.
이 말의 뿌리인 ‘außer’는 ‘밖에’ ‘제외하고’ ‘그 외에’라는 의미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맥락의 내부가 아니라, 그 바깥으로 밀려난 예외의 자리라는 의미로, 이 단어에는 그런 공간적 의미가 남아 있다. 독일어 표준 사전 두덴은 ußerst가 außer에서 파생된 표현이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 독일어에서 ‘최고도로’ ‘더없이’ ‘매우’라는 뜻의 부사로 쓰인다.
außer가 가진 ‘바깥’의 의미는 ußer라는 형태에서 ‘바깥의’ ‘외적인’이라는 뜻으로 이어지고, 여기에 최상급 어미 -st가 붙어 ußerst는 ‘가장 바깥쪽의’라는 의미 구조를 가진다. 물리적으로 어떤 사물의 가장 바깥 껍질이나 표면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이 사람의 감정에 쓰이면, 한층 추상적인 의미를 얻는다. 평범하고 안전한 일상의 궤도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을 때, 감정은 바깥으로 밀려난다. 더 이상 안쪽에 머물 수 없는 마지막 경계, 곧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가장 바깥의 한계선에 닿는 것이다.
여기에 ‘bewegt’가 붙는다. 이 말은 ‘움직이다’라는 뜻의 독일어 동사 ‘bewegen’에서 온 말이다. bewegt는 과거분사에서 온 말로, 이미 움직인 상태, 이미 동요된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 말은 감정을 바깥으로 밀어붙이라는 지시가 아니라, 어떤 감정에 의해 마음이 먼저 움직여 버린 상태에서 출발하라는 뜻에 가깝다.
그러니 ußerst bewegt는 단순히 빠르게 움직이라는 지시가 아니다. 내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먼저 나를 덮쳐와 나를 움직인 상태, 바로 그 수동적이면서도 강렬한 내면의 동요가 이 말에 들어 있다.
이 지점에서 독일 낭만주의의 오래된 미학적 어휘가 떠오른다. ‘Innerlichkeit’, 즉 내면성이다. 헤겔은 ‘미학 강의’에서 낭만 예술의 본질을 외적 형상보다 내면의 주관성 문제로 설명했다. 고전 예술이 외적 형식과 정신의 균형을 꿈꿨다면, 낭만 예술은 점점 더 외적 형상으로는 담을 수 없는 마음의 내부로 향한다.
이 말은 음악이 연주되는 순간에 이해되기보다 어쩌면 음악이 지나간 뒤 비로소 도착하는 강렬함을 뜻하는 말인지 모른다. 번개가 칠 때 빛이 먼저 지나가고 소리가 늦게 들려오 듯,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이성이 뒤늦게 도착할 때 우리는 비로소 ußerst be-wegt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