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식 포도밭 너머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에트나 정상이 보인다. /사진 김상미
계단식 포도밭 너머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에트나 정상이 보인다. /사진 김상미

긴 부츠 모양의 이탈리아반도 앞에는 발끝으로 툭 차기 좋게 놓인 섬이 하나 있다.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 시칠리아다. 우리에겐 영화 ‘대부’와 ‘시네마 천국’의 배경으로 익숙하지만, 이곳이 수천 년의 와인 역사를 품은 땅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시칠리아의 와인 역사는 약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8세기쯤, 지중해를 주름잡던 그리스인이 이 땅에 처음 포도나무를 심으며 와인 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이후 시칠리아 와인은 로마제국의 황제와 귀족에게 널리 사랑받았고, 시칠리아는 와인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과거의 영광은 빛을 잃어 갔다. 19세기 후반 유럽 전역을 휩쓴 필록세라가 포도밭을 황폐화시켰고, 20세기 중반에는 생산량 확대에 치중한 탓에 ‘값싼 와인의 대량 산지’라는 꼬리표를 달기도 했다. 변화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뜻있는 생산자가 토착 품종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현대적인 양조 기술을 도입하면서 양보다 질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지금의 시칠리아는 과거의 영광을 뛰어넘어 위대한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5월, 올해 출시되는 새 빈티지를 선보이는 ‘시칠리아 앙 프리머(Sicilia En Primeur) 2026’ 에 참가하기 위해 시칠리아를 찾았다. 현지에서 만난 와인은 품질로만 감동을 준 것이 아니었다. 시칠리아가 하나의 섬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의 여러 산지가 공존하는 작은 대륙임을 깨닫게 했다.

김상미 -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 와인 칼럼니스트

화산에서 탄생한 지중해의 귀족

우리는 시칠리아를 상상할 때 강렬한 햇볕과 야자수를 떠올린다. 하지만 섬의 동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곳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인 에트나(Etna·해발 약 3300m)가 있다. 지금도 수시로 분화가 일어나는 이곳 기슭에는 시칠리아 최고의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수세기 동안 흘러내린 용암이 굳고 풍화되어 형성된 척박한 화산 토양,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밤마다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바람이 만드는 큰 일교차는 에트나 와인에 독보적인 정체성을 부여한다.

이곳의 주인공은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calese)다. 색이 연해 얼핏 보면 가벼운 와인 같지만, 막상 마셔 보면 예상 밖의 매력을 보여준다. 신선한 야생 베리, 화사한 제비꽃, 훈연, 마른 허브, 향신료 등이 어우러진 아로마는 피노 누아의 섬세함을 닮았고, 촘촘하고 매끈한 타닌은 네비올로의 단단한 구조감을 연상시킨다. 왜 네렐로 마스칼레제를 ‘지중해의 귀족’이라고 극찬하는지 단번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와인의 개성을 오롯이 즐기고 싶다면 육회나 등심구이처럼 양념이 진하지 않은 고기 요리를 선택해 보자. 국내에 수입되는 와인 중에는 피에트라돌체(Pietradolce)의 람판테(Rampante)와 토르나토레(Tornatore)의 칼데라라(Calderara)가 추천할 만하다.

에트나는 ‘시칠리아 화이트 와인의 자존심’, 카리칸테(Carricante)가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해발고도 7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자라는 이 품종은 에트나 정상의 만년설처럼 선명한 산미가 와인에 상쾌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레몬, 라임, 청사과 등 싱싱한 과일 향에 화산 토양의 은은한 훈연 향이 개성을 더하고, 병 숙성을 오래 거치면 등유와 꿀 향 등 복합미가 발달한다. 흰살 생선, 조개찜, 전복구이 등 담백한 해산물에 곁들이기 좋은 스타일이다. 추천 와인으로는 돈나푸가타(Donnafugata)의 술 불카노와 베난티(Benanti)의 에트나 비앙코를 꼽을 수 있다.

1 해산물과 와인을 함께 판매하는 팔레르모의 시장. /사진 김상미 
2 돈나푸가타의 '술불카노(Sul Vulcano)'. /사진 나라셀라 
3 등심 스테이크에 곁들인 네렐로 마스칼레제. /사진 김상미
1 해산물과 와인을 함께 판매하는 팔레르모의 시장. /사진 김상미
2 돈나푸가타의 '술불카노(Sul Vulcano)'. /사진 나라셀라
3 등심 스테이크에 곁들인 네렐로 마스칼레제. /사진 김상미

태양의 레드, 바다의 화이트

에트나를 내려와 섬의 남쪽으로 향하면 전형적인 시칠리아의 날씨를 만나게 된다. 아프리카 대륙과 가까운 이곳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시로코(Sirocco) 바람의 영향을 받아 무척 덥고 건조하다. 이런 혹독한 환경을 이겨낸 포도가 바로 네로 다볼라(Nero d’Avola)다. ‘시칠리아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품종은 섬 전역에서 자라지만 남부에서 생산된 것이 묵직하고 농밀한 풍미를 가장 잘 드러낸다. 블랙베리와 검은 자두 등 과일 향이 달콤하고 타닌의 질감이 부드러워 국내 와인 애호가 사이에서 최근 존재감을 키워 가고 있다. 3만~5만원대의 가격으로 얼마든지 고품질의 와인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양념갈비나 불고기와 즐기기 좋으며, 대표적인 와인으로는 지솔라(Zisola)의 도피오제타(Doppiozeta)와 플라네타(Pla-neta)의 플룸바고(Plumbago)가 있다.

서부 해안에서는 또 다른 스타일의 화이트 와인이 생산된다. 이곳은 태양 볕이 뜨겁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한낮의 열기를 식혀준다. 싱그러운 과일 향, 산뜻한 산미, 바닷바람에 실려 온 짭조름한 여운을 품은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이곳의 대표 품종은 카타라토(Catarratto)와 그릴로(Grillo)다. 카타라토는 아로마가 상큼하고 보디감이 가벼우며 산미가 날카로워 스타일이 경쾌하다. 그릴로는 과일 향이 달콤하고 꽃향기가 화사해서 와인이 풍성하고 부드럽게 다가온다. 카타라토가 샐러드나 생선회와 잘 어울린다면, 그릴로는 해산물 파스타나 치킨과 잘 맞는다. 추천 와인으로는 페우도 몬토니(Feu-do Montoni)의 카타라토 마소(Masso)와 쿠수마노(Cusumano)의 그릴로 샤마리스(Shamaris)가 있다.

화산에서 태어난 네렐로 마스칼레제와 카리칸테, 찬란한 태양을 품은 네로 다볼라, 바닷바람을 머금은 카타라토와 그릴로. 이 섬을 대표하는 품종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시칠리아는 지중해 한가운데 펼쳐진 거대한 와인 지도다. 그 지도는 지금도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