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0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기업공개(IPO) 당일, 최태원(가운데) SK그룹 회장과 SK하이닉스 임원들이 나스닥 상장 개장식에 참석했다. /사진 로이터연합
7월 10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기업공개(IPO) 당일, 최태원(가운데) SK그룹 회장과 SK하이닉스 임원들이 나스닥 상장 개장식에 참석했다. /사진 로이터연합

7월 10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뉴욕 나스닥 마켓사이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와 나란히 ‘오프닝 벨’을 눌렀다. 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ADR)가 나스닥에 상장(티커·SKHY)되는 순간이었다. 조달 자금은 265억달러(약 37조원)로, 외국 기업 사상 최대이자, 스페이스X에 이어 미국 역대 두 번째 기업공개(IPO) 규모다. 

최 회장은 상장 직후 미국 CNBC 방송에 출연해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라며 15년 전 하이닉스 인수 당시엔 꿈같던 일이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흘 뒤 서울의 풍경은 정반대였다. 뉴욕발(發) 축포는 국내 증시에서 ‘검은 월요일’로 되돌아왔다. 같은 시기 개인적 성과와 시장 리스크가 정면으로 엇갈린 셈이다.

"AI 분야에 수백억달러 투자"

최 회장은 CNBC·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반도체 생산과 별개로 인공지능(AI) 분야에 수백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AI 데이터센터, AI 기술 스타트업, 파트너사와 합작 사업 등을 두루 검토한다는 구상이다. 메모리 반도체 고점론에 대해서는 “AI 시대에는 수요 구조 자체가 다르다”며 반박했고, 조건이 맞으면 미국 내 반도체 팹 건설도 가능하다고 했다. 특파원 간담회에서는 현재 AI 기술을 ‘4~5세 아이’에 비유하며 “범용 인공지능(AGI) 시대가 올 때까지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폭발적으로 지속될 수밖에 없다”라며 캘리포니아주에서 만난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 고객사마다 칩을 더 달라고 아우성이라는 일화를 전했다. 

7월 13일 공개된 미국 테크 전문 매체 ‘식스파이브(The Six Five)’와 인터뷰에서는 반도체 가격이 너무 높고 공급도 부족하다며, AI 비용을 낮출 기술적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스닥 ADR 상장의 의미에 대해선 △재무적 선택지 확보 △경영 구조(지배구조) 개선 △투자 기회 확대 등 세 가지로 요약했다. 미국 주주의 참여로 지배구조 체계를 재정비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진화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설명이다.

가장 우려되는 변수로는 ‘지정학적 리스크’와 ‘막대한 소요 자금’을 꼽았다. 갑작스러운 사건이 에너지 가격을 자극하면 AI가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짧은 기간이나마 성장 모멘텀을 잃을 수 있고, 충분한 자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금의 거대한 흐름 자체가 꺾일 수 있다는 진단이다. 

최 회장은 AGI 시대에 이를 때까지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며, 그러지 않으면 국가 안보까지 우려해야 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부친인 고 최종현 선대 회장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위기를 강점으로 바꾸기 위해 15년간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도전해 온 과정 자체를 즐겼다고 술회했다.

같은 날 미국 뉴욕 나스닥 시장에 상장한 SK하이닉스의 광고가 건물 외벽에 걸려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같은 날 미국 뉴욕 나스닥 시장에 상장한 SK하이닉스의 광고가 건물 외벽에 걸려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검은 월요일… 서킷브레이커까지 부른 반전

뉴욕에서 SK하이닉스 ADR은 공모가(149달러) 대비 13%가량 급등한 168달러로 첫날 거래를 마쳤다. 그러나 열기는 태평양을 건너오지 못했다. 한국 첫 거래일인 7월 13일 코스피는 8.95% 급락한 6806.93에 마감하며 7000선이 무너졌다. 매도 사이드카(일시 효력 정지)에 이어 올해 일곱 번째 서킷브레이커(일시 매매 정지)까지 발동됐고, SK하이닉스 본주는 15.37% 폭락한 184만5000원에 장을 마쳤다. 

나스닥 데뷔 흥행이 오히려 차익 실현의 빌미가 됐고, 2분기 실적이 전망치를 밑돌 것이라는 우려와 미국·이란 간 군사적 충돌 등 지정학적 불안이 겹치며 투매를 불렀다는 분석이다. 외국인·기관이 총 3조9000억원가량을 팔아치우는 동안 개인이 3조8000억원을 사들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최 회장이 언급했던 지정학적 리스크가 하루 만에국내 증시를 강타한 셈이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칼럼을 통해 “SK하이닉스는 정부, 글로벌 고객사, 한미 주주 등 상충하는 이해관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며, 그 결정이 글로벌 AI 투자 붐의 향방까지 가를 것”이라고 짚었다.

TV 인터뷰·다큐 강연, 광폭 행보

같은 시기 최 회장 개인 자산은 화려한 성적표를 받았다. 한국CXO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그의 주식 평가액은 3월 말 3조9101억원에서 6월 말 10조8259억원으로 176.9% 급증했다. 46개 그룹 총수 중 증가율 1위이자, 첫 ‘10조 클럽’ 입성이다. 

그룹 지주사 SK㈜ 주가가 이 기간 30만1000원에서 83만4000원으로 폭등한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 주식을 단 한 주도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반도체 랠리가 지주사 지분을 통해 개인 자산으로 고스란히 전이됐다. 같은 기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총수 44명의 주식 평가액이 평균 8.6% 감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최 회장의 거침없는 행보는 반도체 현장을 넘어 사회적 영역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그는 지난 5월 KBS ‘다큐 인사이트-인재 전쟁 2: 최태원의 대답’에 출연해 AI 시대엔 제너럴리스트가 중요해질 것이라며, 이를 위해 ‘생각 근육, 적응 근육, 공감 근육, 보디 스킬’, 네 가지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대 쏠림 현상에 대해서는 학교와 사회가 공대·과학기술 분야의 매력을 더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4월 국회 정책 세미나 강연에서는 “미국에만 기대 살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라며 한일 경제통합 등 파격적인 대안을 제안했다. 국내 대기업 총수가 지상파 다큐 강연자로 나서고 국회 단상에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Plus Point

과감한 개인플레이
대한상의 회장의 목소리는 위축됐나

5월 28일 KBS '다큐 인사이트-인재 전쟁 2: 최태원의 대답'에 출연한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사진 SK 수펙스추구협의회
5월 28일 KBS '다큐 인사이트-인재 전쟁 2: 최태원의 대답'에 출연한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사진 SK 수펙스추구협의회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거침없는 행보를 보는 시선이 고운 것만은 아니다. 최 회장이 수장(首長)으로 있는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는 지난 2월 해외 컨설팅사 통계를 인용해 ‘과도한 상속세로 한국을 떠나는 국내 자산가가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 자료를 냈다가 이재명 대통령으로부터 “가짜 뉴스”라고 질타받고 사과했다. 

당시 최 회장은 “쇄신은 위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며 임원진 전원 재신임을 예고했고, 박일준 당시 상근부회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하지만 후속 인선은 순탄치 않았다. 신임 상근부회장으로 내정됐던 유정열 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사장이 지난 6월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취업 심사에서 낙마하며, 상근부회장 자리는 5개월 가까이 공석이다. 

이런 와중에 국내 입법 지형은 기업에 더욱 팍팍하게 흘러갔다. 7월 14일 대한상의는 국회 본회의를 무더기로 통과한 기업 규제 강화 법안에 대해 “경제계의 호소에도 강행 처리된 데 깊은 유감을 표한다” 는 성명을 냈다. 노동·환경·상법 개정안 등 당장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규제가 여의도 문턱을 넘는 동안, 경제계 수장인 최 회장은 뉴욕 나스닥 상장 무대에 서 있었던 셈이다.

전통적 경제 단체장이 국내 규제를 막아서는 ‘방패’였다면, 최 회장의 행보는 거대 담론에 치우쳐 중소·내수기업의 체감 민심과는 괴리가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뉴욕에서 글로벌 성공을 증명해 낸 그가, 재계의 대변자로서 국내 기업을 위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이목이 쏠린다.

김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