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마케팅(demarketing)이라는 개념이 있다. 기업이 특정 상품에 대한 고객의 구매를 의도적으로 줄여 오히려 적정한 수요를 형성하고 관리하는 마케팅 기법이다. 목적은 다양하다. 핵심 고객에게 서비스를 집중해 수익을 높이려는 목적도 있고 소비자·환경보호라는 사회적 책무를 앞세워 기업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목적도 있다. 공익 목적, 수급 조절, 규제 회피까지 더하면 그 쓰임새는 훨씬 넓다. 얼핏 고객을 밀어내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절제가 오히려 신뢰와 갈망을 키운다. 파리의 루이비통(Louis Vuitton) 본점은 이 역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행객이 제품을 구입하면 여권 번호를 전산에 등록해, 같은 사람이 1년 안에 다시 사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출을 스스로 제한하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은 살 수 없다는 제약이 사고 싶다는 열망을 부추기는 장치다. 덜 팔수록 브랜드는 더 갖고 싶은 대상이 된다.
브랜드의 겉과 속, 기표와 기의
브랜딩의 좁은 의미는 원래 이름을 짓고 슬로건을 만드는 버벌 브랜딩, 로고와 패키지를 그리는 비주얼 브랜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언어학의 개념을 빌리면, 이 요소는 브랜드의 ‘기표(記表)’다. 문자와 소리, 형태로 이뤄진 겉면이다. 반면 브랜드가 소비자의 머릿속에 남기는 이미지, 철학, 정체성은 ‘기의(記意)’다. 기표는 기의를 담는 그릇일 뿐, 기의 그 자체는 아니다. 문제는 오랫동안 마케터가 기표를 정교하게 다듬는 일에만 골몰해왔다는 점이다. 로고를 새로 그리고 컬러를 통일하고 서체를 다듬는 일이 곧 브랜딩이라 여겼다. 그런데 최근 브랜드는 정반대의 실험을 하고 있다. 기표를 지워도 기의가 살아남는지, 그 반대의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맥도널드는 최근 두 시장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확신을 실험했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대행사 레오 버넷(Leo Burnett)과 함께, 소시지·에그·치즈 아침 메뉴의 초근접 단면 사진만으로 광고판을 채웠다. 로고도, 제품명도, 카피 문구도 없다. 2026년 뉴질랜드에서는 이미지 대신 문자를 택했다. 대행사 맥켄(McCann)이 만든 ‘You Know Where’ 캠페인은 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Fries’ ‘Cheeseburger’ 같은 메뉴 이름만 적어 넣었다. 이미지로 보여주든 글자로 알려주든, 소비자는 로고 없이도 브랜드를 알아챘다. 방식은 달랐지만, 전제는 같았다. 이미 압도적으로 각인된 브랜드만이 이런 실험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흐름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나이키(Nike)가 있다. 1995년 나이키는 브랜드 네임 없이 스우시(Swoosh) 심벌만 남기는 결단을 내렸다. 최초의 본격적 디브랜딩 사례로 꼽힌다. 스타벅스(Starbucks)는 2011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컵과 매장 간판에서 이름을 걷어내고 초록빛 세이렌만 남겼다. 워너브라더스(Warner Bros.)는 2019년 ‘Warner Bros. Pictures’라는 글자 밴드를 걷어내고 방패 문장의 금빛 입체감도 덜어내 파란빛 평면 로고로 전환했다. 코카콜라(Coca-Cola)는 한발 더 나아가, 로고 자리에 자사 이름 대신 소비자 이름 150여 개를 새겨 넣은 캠페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브랜드 네임이라는 기표를 지운 그 자리에, 소비자 각자의 이름이라는 훨씬 개인적인 기표를 채워 넣은 셈이다. 아마존(Amazon)은 자체 브랜드 상품 라인 ‘아마존 베이직’에서 화려한 포장 대신 거의 무(無)브랜드에 가까운 단순한 디자인을 택해, 브랜드 네임보다 품질에 대한 신뢰가 앞서도록 설계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기표가 가벼워질수록 기의가 오히려 선명해진다는 확신이다.
이 확신은 아무 브랜드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의 머릿속에 이미 뚜렷한이미지가 자리 잡은 브랜드만이 빈칸을 남겨도 안전하다. 반대로 이제 막 시장에 진입한 브랜드가 같은 시도를 하면 결과는 다르다. 유명하지 않은 브랜드가 로고를 지우면, 그 자리에는 여백이 아니라 무관심이 남을 뿐이다.
가벼워진 기표
디브랜딩이 가속화된 데는 기술적 배경도 있다. 서체의 변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세리프(Serif)는 획 끝에 삐침이 있는 서체로, 한글로는 명조체 계열에 가깝다. 펜으로 필기할 때 나타나는 흔적을 그대로 옮긴 스타일이라, 작은 크기에서도 글자 구분이 쉬워 인쇄물이나 텍스트가 많은 지면에서 가독성이 높다. 산세리프(Sans-serif)는 삐침 없이 획 굵기가 일정한 서체로, 한글의 고딕체 계열이다. 문자 스타일 자체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디자인적으로 정립돼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다. 산세리프는 간판이나 화면 같은 디스플레이 환경에서 강세를 보인다. 해상도의 제약으로 세리프의 섬세한 삐침이 잘 표현되지 않았던 탓이다. 모바일과 웹이 소비의 중심이 되면서, 브랜드는 자연히 산세리프로, 더 가볍고 단순한 워드마크로 옮겨갔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화면, 그보다 더 작은 애플리케이션 아이콘에서 살아남으려면 로고는 스스로 몸집을 줄여야 했다. 입생로랑(Saint Laurent)과 발렌시아가(Balenciaga) 같은 럭셔리 브랜드가 세리프 로고를 산세리프로 바꾼 것도, 자동차 브랜드 푸조(Peugeot)가 2021년 정교하던 사자의 몸통을 지우고 머리만 남긴 간결한 형태로 바꾼 것도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기표가 작은 화면 위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가벼워져야 했다.
흥미로운 반례도 있다. 버버리(Burberry)는 2018년 같은 길을 택했지만, 2023년 다시 세리프 로고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운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세계 최대 맥주 기업안호이저부시 인베브(Anheuser-Busch InBev)는 미국의 소규모 수제 맥주 업체를 잇달아 인수하면서도 인수한 브랜드 라벨에 자사 이름을 절대 넣지 않았다. 개성 있는 수제 맥주를 찾는 소비자에게 대중 맥주 기업의 계열사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 맥주양조협회로부터 ‘가짜 수제 맥주’라는 비판을 받았다. 영국의 카페 체인 해리스+훌(Harris+Hoole) 역시 커피 장인이 운영한다는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지만, 실은 대형 유통 업체 테스코 소유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소비자의 배신감을 샀다. 이 둘은 기표를 지운 것이 아니라 숨긴 것이다. 절제는 이미 충분히 알려진 브랜드가 ‘더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에서 나오지만, 은폐는 노출됐을 때 불리하다는 두려움에서 나온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브랜드가 지닌 진정성이다. 기표를 지울 자격은 기의가 충분히 쌓인 브랜드에만 주어진다. 소비자가 빈칸을 채워줄 만큼 브랜드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지워진 자리에는 여백이 아니라 의혹이 남는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좁혀진다. 이 브랜드는 무엇을 지워도 남는가. 기표는 브랜드가 세상과 마주하는 표면이고 기의는 그 표면 아래 오랫동안 쌓여온 시간이다. 루이비통이 판매를 절제해 갈망을 지폈다면, 나이키와 스타벅스는 이름을 절제해 기억을 시험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뿌리는 같다. 덜 할수록 브랜드는 강해진다는 오래된 역설이다. 무엇을 지울 수 있느냐가, 그 브랜드가 얼마나 완성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