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포스터. /사진 드림웍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포스터. /사진 드림웍스

2000년대 중반, 온라인 거래의 표준은 이베이(eBay)였다. 1995년 문을 연 이 회사는 개인 간 거래를 인터넷으로 옮겨 와 ‘누구나 사고팔 수 있는 디지털 장터’를 만들었다. 낯선 사람과 거래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신뢰였다. 이베이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서로를 평가하는 피드백 시스템으로 이 불안을 낮췄다. 경매 방식은 쇼핑에 게임 같은 긴장감을 더했고, 거래 수수료는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옥션과 G마켓을 차례로 인수하며 온라인 거래의 강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이 쇼핑의 속도를 바꿨다. 소비자는 며칠씩 입찰 결과를 기다리는 대신, 클릭 한 번에 결제하고 다음 날 물건을 받는 경험을 선택했다. 쿠팡, 아마존, 알리바바는 물류와 결제를 통합해 ‘즉시성’을 새로운 표준으로 만들었다. 이베이는 변화를 의식했지만, 견고한 수수료 수익 구조와 ‘경매 플랫폼’이라는 자기 정체성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2021년 G마켓과 옥션을 운영하던 한국 사업 지분을 이마트에 매각했다. 한때 완벽해 보이던 비즈니스 모델이 멈추자, 성장의 방향도 흐려졌다. 좋은 비즈니스 모델만으로 지속 성장이 어렵다면 기업에는 무엇이 더 필요한가.

신재훈 - 이화여대 경영대 겸임교수, 서울대 경영학 학·석사, 미국 시카고대 MBA, 서강대 경영학 박사, 현 리버스톤 자산운용 사장, '비욘드 시네마' '비욘드 스트래티지' 저자
신재훈 - 이화여대 경영대 겸임교수, 서울대 경영학 학·석사, 미국 시카고대 MBA, 서강대 경영학 박사, 현 리버스톤 자산운용 사장, '비욘드 시네마' '비욘드 스트래티지' 저자

제복을 입는 순간, 세상은 그를 믿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 2002)’은 실존 인물 프랭크 애버그네일 주니어의 도주와 변신을 따라간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프랭크를, 톰 행크스가 그를 추적하는 FBI 요원 칼 핸러티를 연기했다. 1960년대 미국, 부모의 이혼 소송 한복판에서 열아홉 살 소년은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선다. 그날 이후 그는 교사, 조종사, 의사, 변호사로 변신하며 위조수표로 거액을 가로챈다.

첫 변신은 교실에서 시작된다. 전학 첫날, 또래보다 성숙한 외모를 이용해 며칠 동안 교사 행세를 한 프랭크는 곧 더 큰 무대를 노린다. 팬암 항공사 본사를 찾아가 정보를 모으고, 제복 제작 업체에 연락해 제복과 신분증을 손에 넣는다. 제복을 입고 조종사로 위장한 그는 은행을 돌며 위조수표를 현금으로 바꾼다. 조지아주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는 의사로 변신한다. 환자가 실려 오자 의학 지식이 없던 프랭크는 옆에 있던 인턴에게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다. 인턴이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대답은 곧 지시가 된다. LA의 한 호텔 방에 칼 핸러티가 들이닥쳤을 때도 같은 능력을 발휘한다. 프랭크는 자신을 비밀경호국 요원 배리 앨런이라고 소개하며, 오히려 칼에게 신분 확인을 요구한다. 이어 용의자가 계단으로 달아났다며 유유히 엘리베이터를 탄다. 칼이 배리 앨런이 만화 속 인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프랭크는 이미 호텔을 벗어난 뒤였다. 

프랭크는 직업을 바꿀 때마다 먼저 그 안의 질서를 살폈다. 누가 지시하고 누가 따르는지, 어떤 말투가 권위로 통하는지, 어떤 절차를 밟으면 의심을 피할 수 있는지 빠르게 알아냈다. 낯선 환경에서도 상황을 읽고, 필요한 말을 익힌 뒤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힘이 그의 진짜 재능이었다.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능력

프라할라드(C.K. Prahalad)와 하멜(Gary Hamel)은 1990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서 기업의 지속 성장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핵심 역량을 제시했다. 핵심 역량은 특정 제품의 성공이나 하나의 수익 구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고객이 실제로 체감하는 가치를 만들고, 경쟁자가 모방하기 어려우며, 여러 사업에 걸쳐 반복해 활용할 수 있는 조직의 축적된 능력이다. 

영화 속 프랭크가 여러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낯선 세계의 규칙을 빠르게 파악하고 익히는 학습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비즈니스 모델은 기업이 현재 어떤 구조로 돈을 버는지, 즉 고객에게 무엇을 제공하고, 어떤 비용 구조와 수익 흐름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비즈니스 모델은 환경이 변하면 그에 맞춰 바꿔야 한다. 이때 핵심 역량은 새로운 환경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바탕이 된다. 그런 점에서 프랭크의 학습 능력이 핵심 역량이라면 그가 신분을 바꿀 때마다 갈아입었던 제복은 비즈니스 모델에 가깝다. 제복은 환경이 바뀌면 갈아입어야 하지만, 학습 능력은 새 제복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는 힘이다. 

핵심 역량은 시장의 변화에 맞춰 다시 배치하고, 새 기술과 결합하고, 조직에서 반복해 써야 한다. 성공한 모델에 오래 머물면 강점은 어느 순간 관성이 된다. 그래서 성과가 좋을 때일수록 경영진은 ‘고객이 우리에게서 반복적으로 얻는 가치는 무엇이고, 그 가치를 만드는 우리의 능력은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 

(위) 비행기 조종사로 변신한 프랭크. (아래) 프랭크를 추적하는 FBI 요원 칼 핸러티. /사진 드림웍스
(위) 비행기 조종사로 변신한 프랭크. (아래) 프랭크를 추적하는 FBI 요원 칼 핸러티. /사진 드림웍스

핵심 역량으로 두 번째 수익원을 만든 기업

디즈니의 핵심 역량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지식재산(IP)으로 키워 여러 사업에 확장하는 능력이다. 미키마우스에서 출발한 디즈니는 픽사, 마블, 루카스필름을 인수하며 거대한 이야기의 창고를 만들었다. 이야기 속 캐릭터와 세계관은 극장, 테마파크, 상품, 방송, 스트리밍으로 확장되며 디즈니의 콘텐츠 경쟁력을 떠받쳤다. 그 결과 2025 회계연도 말 디즈니플러스와 훌루의 합산 구독 수는 1억9600만 건에 이르렀고, 소비자에게 콘텐츠를 직접 제공하는 스트리밍 사업은 매출 246억달러(약 37조원), 영업이익 13억2700만달러(약 2조원)를 기록했다. 세일즈포스의 핵심 역량은 고객 데이터를 연결하는 플랫폼 능력이다. 1999년 클라우드 기반 고객관계관리(CRM)로 출발한 이 회사는 고객 정보를 영업과 마케팅, 서비스, 전자상거래, 협업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데이터 흐름으로 묶었다. 2021년 슬랙(Slack)을 277억달러(약 41조5300억원)에 인수한 이유도 고객 관리와 내부 협업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였다. 세일즈포스는 2025 회계연도에 매출 379억달러(약 57조원), 영업이익 72억달러(약 11조원)를 기록했다.

두 기업은 서로 다른 산업군에 속해 있지만, 움직이는 방식은 닮았다. 자기 능력을 분명히 정의하고 환경이 바뀔 때 그 능력을 새로운 수익 구조와 결합했다. 디즈니는 이야기를 구독과 체험으로 옮겼고, 세일즈포스는 고객 데이터를 협업 플랫폼으로 넓혔다. 

이베이가 다시 해야 했던 질문

영화의 마지막, 프랑스 인쇄 공장의 어두운 지하방에서 위조수표를 찍어내던 프랭크는 경찰에 붙잡힌다. 그러나 FBI는 그에게 위조수표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보는 능력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위조 방지 업무에참여시킨다. 같은 능력이 맥락을 바꾸자, 전혀 다른 가치로 쓰인다. 제도를 속이던 기술이 제도를 지키는 역량으로 바뀐 것이다.

이베이의 경매 모델은 온라인 거래를 대중화한 혁신이었다. 그러나 모바일 쇼핑 시대의 고객은 즉시 구매와 빠른 배송, 간편한 반품을 원했다. 이베이가 다시 해야 했던 질문은 경매 모델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아니라, 온라인 거래의 신뢰를 만들고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했던 능력을 모바일 시대 구매 경험 전반으로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였다. 이베이는 고객의 새 니즈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기에 경쟁자에게 밀려났다.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시간이 지나며 낡는다. 시장은 빠르게 변하고, 고객은 익숙한 경험을 금세 당연하게 여긴다. 지속 성장을 원하는 기업은 성공한 모델을 기념물처럼 붙들어서는 안 된다. 성과를 가능하게 한 능력을 찾아내고, 달라진 고객의 기대와 기술 환경에 맞게 다시 엮어야 한다. 비즈니스 모델이 한때 고객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면, 핵심 역량은 고객의 선택이 달라진 뒤에도 회사가 새로 해낼 수 있는 일을 말해준다. 새로운 성장의 문은 익숙한 비즈니스 모델 바깥에 있지만, 그 문을 여는 열쇠는 조직 안 오래 쌓아 온 핵심 역량에 있다. 

신재훈 이화여대 경영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