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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대는 투표용지 한 장 가지고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선거철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접한 이가 던지는 이 냉소 섞인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불평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해답을 찾다 보면 그 이면에 인간 심리와 공동체 존립의 핵심을 관통하는 묵직한 화두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단순히 종이 한 장의 손실이나 특정 후보의 낙선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얇은 투표용지가 상징하는 내면의 본질, 즉 ‘나는 이 공동체에서 동등한 주권을 가진 존엄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대한 사회적 응답이 흔들릴 때 분노한다. 이 작은 종이는 나의 존엄성이 국가라는 거대한 질서에서 안전하게 보장받고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유일한 물리적 징표이기 때문이다.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제도적 권리를 넘어 '존엄과 인정'과 맞닿아

정치학적 정의에 따르면, 참정권(suf-frage)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아우르는 제도적 권리다. 그러나 심층심리학의 렌즈로 바라본 참정권은 인간의 근원적인 ‘인정(recognition) 욕구’와 단단히 맞닿아 있다. 인간은 타인과 사회로부터 마땅한 격을 갖춘 주체로 대접받고자 하는 강렬한 심리적 동기를 타고난다. 이 본능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절차적 공정성’은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이 절차적 공정성에 대한 감각은 오늘날 한국 사회, 특히 치열한 생존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청년 세대에게 단순한 규범적 가치를 넘어 생존 조건 그 자체로 작동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입시, 취업, 승진 등 삶의 변곡점마다 소수점 둘째 자리의 미세한 점수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극단적 경쟁 환경을 상시로 겪어왔다. 

그들에게 규칙의 투명성은 삶의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따라서 선거 절차나 투표 제도의 작은 결함, 혹은 부당한 규칙의 변개는 단순한 행정적 실수가 아니다. 내가 치열하게 버텨 온 삶의 규칙 자체가 통째로 부정당할 수 있다는 실존적 위협이자, 나의 미래가 불투명한 장막 뒤에서 임의로 훼손될 수 있다는 불안의 직접적인 도화선인 것이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나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 등의 누적 데이터도 이를 뒷받침한다.

'규칙은 공정한가, 정보는 진실한가'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Carl Jung)에 의하면, 인류의 무의식 저변에는 시공간을 초월해 유전돼 온 마음의 행동 패턴인 ‘원형(ar-chetype)’이 흐르고 있다. 고대 신화에서는 이 원형이 외부 세계로 투사된 상징적 지도다. 이러한 거울을 통해 민주주의의 의사 결정 과정을 조망하면, 투표는 외적인 정치 참여를 넘어 우리 마음속 깊은 심연에서 펼쳐지는 장엄한 ‘상징적 올림포스 회의’와 다름없음을 깨닫게 된다. 먼저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규칙을 수호하는 신, 제우스의 원형이 깨어난다. 융의 관점에서 제우스는 구조와 한계를 확립하는 ‘질서의 원형’이다. 제우스 원형은 ‘규칙은 타협 없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감시한다. 이 엄격한 에너지는 선거 관리의 공정성이 1㎜라도 흔들릴 때 즉각 요동친다. 

실제로 1890년대 영국에서 비밀투표법이 안착하기 전, 혹은 우리나라의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대중이 보여준 폭발적인 분노는 단지 정권 교체를 향한 열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게임의 규칙 자체가 타락했을 때 우리 무의식 속 제우스 원형이 느끼는 질서 붕괴의 공포이자, 법치와 상식이라는 세계의 기둥이 무너져 내리는 혼돈에 대한 본능적 저항이었다. 이어 정보와 소통의 매개자인 헤르메스가 개입한다. 그는 신의 전령이자 경계를 넘나드는 무의식의 인도자로서 묻는다. “우리는 왜곡되지 않은 진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주체적 판단을 내리고 있는가?” 인간은 독립적인 사유의 주체인 동시에, 타인의 선택을 이정표 삼아 움직이는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는 ‘사회적 증거(so-cial proof)’ 효과처럼 여론조사 지표와 언론의 프레임에서 나의 위치를 가늠한다.

소외감과 상처가 분노로 폭발하는 심리적 임계점

여론조사는 차가운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그러나 질문의 설계나 표집의 편향을 통해 특정 현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거대한 사기가 된다. 선거 국면에서 판을 흔드는 가짜 뉴스의 범람이나 통계 왜곡, 조직적인 여론 조작 행위는 시민 개개인이 갖춘 고유한 주체적 판단력을 심각하게 유린하고 침해하는 범죄와 같다. 따라서 그런 일을 도모하거나 실행하려는 자는 단호하고 엄중하게 처단해야 한다.

다만 모든 시민이 선거라는 정치적 이벤트를 마주하며 동일한 온도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도달한 심리적 궤적에 따라 반응의 결은 완전히 달라진다. 삶의 궤적 속에서 반복적인 좌절, 사회적 배제, 혹은 기회의 박탈을 조용히 견뎌온 이의 무의식에는 어두운 지하 세계의 지배자인 하데스의 원형이 깊게 내려앉아 있다.

하데스는 단순한 죽음의 신이 아니라 억압된 상처, 그림자 그리고 소외된 자아의 응축이다. 그는 심연의 어둠 속에서 아주 낮고 무겁게 읊조린다. “이번에도 나는 투명인간인가? 이 거대한 축제에서 나의 존재는 또다시 지워지는 것인가?” 이 소리 없는 울림은 현재 벌어지는 미세한 불공정의 조짐을 기폭제 삼아, 과거 삶 전체에서 누적된 배제의 기억과 결핍된 인정 욕구를 일제히 일깨운다.

그리고 이 슬픔과 결핍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지체 없이 분노와 투쟁의 화신인 아레스(Ares)가 전면에 등장한다. 아레스는 심장이 터질 듯한 맹렬한 에너지로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향해 칼을 뽑아 든다. 그의 분노는 파괴적 충동으로 흐를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굳어버린 구태를 깨부수고 세상을 맑게 씻어내며 자기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생명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분노 넘어, 세상을 치유하는 성숙한 힘으로

우리를 분열시키는 이 모든 내면의 갈등과 원형의 소용돌이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마침내 마음의 중심이자 통합의 사령탑인 자기(self)가 장엄하게 깨어난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 빛과 그림자를 모두 아우르며 인격의 전체성을 실현하는 궁극의 중심점이다. 자기는 제우스의 질서 감각, 헤르메스의 비판적 이성, 하데스의 슬픈 상처 그리고 아레스의 뜨거운 분노를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이 모든 상반된 목소리를 품위 있게 조율하며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그대의 정당한 분노와 상처를 상대 진영을 궤멸시키기 위한 파괴적 맹목성으로 소모할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영속성과 서로의 실존을 보듬어 안는 통합적 성찰의 이정표로 삼을 것인가?”

이 질문에 온몸으로 응답하는 행위가 바로 성숙한 시민 의식의 위대한 출발점이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법전과 투표소라는 외적 제도가 기계적으로 유지해 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을 적으로 돌려세우고 싶은 분열적 본능을 통제하고, 내면의 역동적인 목소리를 조화롭게 통합해 낼 수 있는 ‘성숙한 개인의 마음’이 켜켜이 쌓여 비로소 가능해지는 기적이다.

투표용지 한 장은 가볍게 흩날리는 펄프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 공동체가 거대한 역사의 무게를 담아 개인에게 건네는 가장 숭고한 약속이다. ‘당신은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존엄하고 동등한 동반자입니다’라는 엄숙한 상호 인정의 선언이기도 하다.

우리가 투표소의 장막 뒤에서 붉은 도장을 꾹 눌러 찍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 우리의 무의식은 온 우주와 연결된다.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대서사시는 어쩌면 선거마다 우리 마음속 깊은 올림포스의 회의장에서 격렬하게 토론하고, 갈등하고, 끝내 서로를 품어 안는 내면의 성찰이 빚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인류의 예술품이 아닐까 싶다. 

김진국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