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7월 7일(이하 현지시각)부터 이틀간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정상회의가 열렸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32개 나토 회원국 대통령 및 총리가 참석했다. 한국은 비회원국이지만 이재명대통령이 인도·태평양 파트너국 정상 자격으로 참여했다. 과거에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하 에르도안)의 권위주의 통치와 친(親)러시아 행보를 이유로 서방 정상은 튀르키예와 개별 회담조차 꺼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토 정상은 물론이고 나토 사무총장,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등이 직접 튀르키예를 찾았다. 이는 튀르키예의 지위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2022년 발발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이어 2026년 이란 전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인구 8800만 명의 튀르키예가 중동 정세를 좌우할 핵심 열쇠로 떠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튀르키예는 러시아 군함이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① 튀르키예 해협(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해협)을 가로막고 있다. 이번 나토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하 트럼프)도 에르도안을 ‘위대한 친구’라고 부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튀르키예의 신형 전투기(KAAN) 사업에 7억달러(약 1조430억원) 규모의 엔진을 팔기로 했고, 끊었던 F-35 전투기 판매도 다시 고민해 보겠다고 밝혔다. 블룸버그는 7월 7일 “튀르키예가 ‘강한 군사력’과 ‘좋은 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최고 귀빈 대접을 받았다”라고 했다.
필자는 튀르키예를 향한 서방국의 딜레마를 짚어낸다. 서방국이 튀르키예의 독재를 이유로 배척할 경우 튀르키예는 러시아나 중국 편으로 도망쳐 버릴 것이고, 반대로 군사력 때문에 잘못을 다 봐주면 서방국이 그동안 외쳤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서방 지도자들이 이 두 가지 고민 사이에서 아주 똑똑하게 줄타기하며 균형을 잡아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튀르키예 앙카라 대통령궁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각국 정상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 나토
중국의 급부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으로 지정학적 경쟁은 세계경제의 향방을 좌우하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트럼프가 오랫동안 유지돼 온 미국의 정책 기조를 뒤집으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고, 각국 정부와 기업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전략적 환경을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최근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에서 막을 내린 나토 정상회의는 이러한 새로운 현실을 반영했다. 지정학적·안보적 필요가 다른 중요한 정책 목표를 압도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다른 목표를 뒤로 미뤄야 하는 이러한 딜레마는 정상회의 개최국인 튀르키예와 서방의 관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튀르키예는 오랫동안 그 중요성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나토 동맹국이자, 유럽과 중동을 잇는 핵심적인 경제 가교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나토 및 서방과 유대가 약화됐지만, 튀르키예 특유의 전략적 입지는 여전히 이 나라를 동맹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든다.
앤 크루거 - 미국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석좌교수, 전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부총재
튀르키예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불가리아, 조지아, 그리스, 이란, 이라크,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불가리아, 조지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함께 흑해 연안을 끼고 있다. 인구가 약 8800만 명에 이르고 나토에서 두 번째로 큰 군대를 보유한 튀르키예는 역내 주요 강국이다. 경제적으로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제조업·물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부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대부분 중립을 지켰던 튀르키예는 나토 가입을 계기로 확고히 서방 진영에 섰다. 이후 오늘날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준회원국이 되었고, 마침내 정식 가입도 신청했다. 하지만 협상은 수년간 지지부진했고 2017년 이후 사실상 중단됐다. 지연의 상당 부분은 에르도안 치하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EU가 가입 절차를 진전시키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탓이다. 권위주의 성향이 갈수록 강해진 에르도안의 통치는 미국과 관계에도 긴장을 불러왔다. 다만 트럼프는 전임자들에 비해 이를 훨씬 덜 문제 삼는 듯하다. 2019년 트럼프 1기 정부는 튀르키예가 러시아산 ② S-400 방공 체계를 도입하자 미국산 F-35 전투기 판매를 막았다. 튀르키예가 두 체계를 모두 보유하면 러시아가 F-35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고 미국 당국자들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 2기 정부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튀르키예의 신형 전투기 사업에 7억달러가 넘는 규모의 엔진을 판매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F-35 판매 문제도 재검토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S-400 도입은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면서 서방과 서방의 주요 경쟁국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튀르키예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미국 및 EU와 관계가 갈수록 경색되는 가운데서도 에르도안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하 푸틴)과 관계를 공들여 유지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에는 드론을 공급했다. 최근에는 이란 전쟁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트럼프에 따르면, 튀르키예는 이스라엘에 맞서 참전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에르도안 집권기의 경제 성과는 분명 부침이 컸다. 지난 20여 년간 성장세 자체는 대체로 견조했다. 대규모 인프라 개선과 방위산업 및 기타 제조업 부문의 급속한 팽창이 성장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호황과 불황이 반복됐고,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거시 경제 불안도 되풀이됐다. 대대적인 안정화 프로그램이 시행되면서 물가 상승률은 2022년 85%로 정점을 찍은 뒤 크게 낮아졌지만, 튀르키예 경제는 여전히 환율 변동성과 수출 부진을 비롯한 고질적인 문제에 짓눌려 있다.
전쟁이 키운 몸값, 가치와 실리 사이 고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란 전쟁은 튀르키예 경제에 호재인 동시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중동의 다른 지역을 피해 들어온 사업 활동이 늘고 군사 장비 수출이 증가하면서 혜택을 보기도 했지만, 세계 에너지 시장의 교란과 원자재 가격 변동성 확대 탓에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번 나토 정상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수년 동안 EU와 다른 서방 동맹국은 에르도안의 민주주의 제도 훼손과 푸틴과 긴밀한 관계, 의문스러운 경제정책 때문에 튀르키예를 경계해 왔다. 그러나 튀르키예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자 많은 나토 동맹국이 안보·국방 협력에 더 큰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이번 정상회의는 그러한 변화를 한층 선명하게 드러냈다. 트럼프는 에르도안에게 찬사를 쏟아냈고, 유럽 동맹국은 에르도안의 국내 통치 행태에 대한 공개 비판을 대체로 자제했다.
이러한 변화는 불안정성이 커지는 역내에서 튀르키예의 전략적 중요성과 핵심적인 경제적 역할을 서방이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서방 민주주의 국가가 직면한 딜레마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대서양 양안의 안보에 가장 중요한 일부 국가는 민주주의 규범에서 가장 멀리 이탈하는 국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U와 나토 지도자가 절감하고 있듯, 이처럼 상충하는 요구를 조화시키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그 균형점을 찾는 것은 서방의 신뢰성을 지킬 뿐만 아니라, 튀르키예가 전략적 동맹이자 경제적 파트너로서의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게 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Tip
※ 튀르키예 해협=보스포루스해협+다르다넬스해협 /자료=구글맵
①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며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해상 관문. 길이 약 90㎞로 에게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다르다넬스해협과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해협으로 구성된다. 흑해 연안국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이 외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부동항 출구다. 1936년 몽트뢰협약(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대국 해군 간 충돌을 막고 튀르키예의 해협에 대한 주권을 회복시키는 목적)에 따라 두 해협에 대한 통제권은 튀르키예가 쥐고 있어 군함 통과를 제한하거나 허용할 수 있는 막강한 지정학적 권한이 있다. 튀르키예 해협은 단순한 바닷길을 넘어 세계 물류와 군사적 주도권을 좌우하는 핵심 요충지이자, 튀르키예의 외교적 몸값을 올리는 결정적 무기다.
② 러시아가 1990년대 말 개발을 시작해 2007년에 실전 배치한 최첨단 대공미사일 방어 체계. 최대 400㎞ 거리의 전투기와 미사일을 격추하는 성능을 갖췄다. 튀르키예는 2017년 9월 러시아와 구매 계약을 맺고 2019년 7월 장비를 인도받았다. 나토 회원국이 러시아산 핵심 무기를 도입하자, 미국은 스텔스 전투기 F-35의 기밀 유출을 우려해 2019년 7월 튀르키예를 F-35 개발 사업에서 퇴출시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