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집 '눈'은 처음 보면 눈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눈이 녹은 뒤 비로소 드러나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사진 김진영
사진집 '눈'은 처음 보면 눈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눈이 녹은 뒤 비로소 드러나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사진 김진영

눈은 많은 것을 감춘다. 새하얀 눈은 땅 위의 지저분한 흔적을 덮고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거칠었던 풍경은 고요해지고, 복잡했던 현실은 잠시 단순해진다. 눈이 내린 세상은 모든 것이 평화로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눈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잠시 덮어둘 뿐이다. 시간이 지나 눈이 녹으면, 그 아래 있던 풍경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인도 사진작가 소흐랍 후라(Sohrab Hura)의 ‘눈(Snow)’ 역시 처음 보면 눈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책으로 보인다. 인도 카슈미르의 겨울을 배경으로 눈밭을 뛰노는 아이들, 거리를 오가는 주민들, 들개와 새 등 겨울을 견디는 동물들이 고요하면서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다. 많은 눈이 내려 겨울을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를 짐작하게 하는 장면도 있지만, 그마저도 차분하고 아름답게 담아냈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정치도, 역사도, 분쟁도 느껴지지 않는다.

김진영 -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김진영 -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하지만 이 책은 눈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만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눈이 녹은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풍경과 현실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작가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약 5년에 걸쳐 카슈미르를 수십 차례 방문하며 이 지역을 기록했다. 책은 이 지역 사람이 겨울을 부르는 세 개의 이름, 칠라이 칼란(혹독한 추위), 칠라이 후르드(작은 추위), 칠라이 바체(아기 추위)의 흐름을 따라 작품을 구성했다. 겨울이 깊어지고 다시 봄으로 향하는 시간에 풍경은 조금씩 변한다. 눈은 서서히 녹고, 그 아래 감춰져 있던 현실 역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으로 찍은 카슈미르의 삶

카슈미르는 오랫동안 인도인에게 ‘눈을 보러 가는 천국 같은 관광지’로 소비됐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한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947년 영국령 인도의 해체 이후 이 지역의 소유권을 놓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는 카슈미르 대부분을, 파키스탄과 중국은 일부 지역을 통치하면서 세 국가가 모두 카슈미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 이곳의 사람은 자기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요구하며 군사적 긴장 상태 속에 살아가고 있다.

작가 역시 처음에는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됐다. “이곳의 아름다움이 나를 속였다.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름다움과 폭력, 평화와 긴장이 하나의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극단적인 모순이 작가가 이 작업을 시작한 출발점이다.

인도의 사진작가 소흐랍 후라(Sohrab Hura)의
사진집 '눈(Snow)' 표지. /사진 김진영
인도의 사진작가 소흐랍 후라(Sohrab Hura)의 사진집 '눈(Snow)' 표지. /사진 김진영

작가는 현실을 설명하거나 고발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익숙하게 접해 온 카슈미르의 이미지는 주로 검문소, 철조망, 군인, 시위, 충돌 같은 장면이다. 그러나 ‘눈’에는 그런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말이 눈밭을 걷고,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순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군인의 모습은 책 후반부에 아주 드물게 등장하며, 폭력은 직접적으로 재현되지 않고 암시적으로만 표현된다.

사진은 계절 변화를 따라가며, 눈이 가득한 풍경에서 점차 눈이 녹아내리는 풍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눈 아래 감춰져 있던 현실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독자는 처음에 눈을 통해 많은 것이 감춰진 카슈미르 모습을 보다가 눈이 녹아내리면서 점차 환상이 벗겨진 분쟁 지역의 모습을 보게 된다.

눈이 내린 카슈미르의 자연과 공동체를담은 사진은 처음에는 그저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곧 갈등과 폭력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총탄 자국이 남은 벽, 길가에 버려진 토마토 더미, 눈 위에 흐르는 붉은 피, 한쪽 눈을 연상시키는 동물의 눈, 부서진 낡은 차 같은 갈등을 암시하는 듯한 장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겨울이 세 번의 국면을 거쳐 찾아오고 떠나는 시간을 통해 카슈미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눈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눈이 덮어놓은 풍경에 속는다. 하지만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현실을 외면하려 했던 내 마음도 함께 녹아내리고, 이방인인 나는 비로소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사랑으로 카슈미르 사진을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정한 정치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한 장면을 우선해서 찾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자기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 책은 반복되는 계절을 살아가며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의 삶을 가장 중심에 두고 보여준다. 분쟁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카슈미르를 다룬 많은 사진이 그 분쟁에 초점을 맞춰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만으로는 이곳 사람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눈은 언젠가 반드시 녹는다. 사진집 ‘눈’은 그 눈이 녹아내리는 시간을 바라보게 하는 사진집이다. 책장을 넘길수록 눈이 녹아가는 계절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아래 감춰져 있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나는 과정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눈은 현실을 잠시 덮을 수는 있지만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 

아름다운 풍경 아래 감춰져 있는 카슈미르의 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눈이 덮어버린 풍경이 아니라, 그 아래 끝내 사라지지 않았던 사람의 삶이다.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