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9일 장중 9385.59까지 올랐던 코스피는 7월 30일 5593.56까지 밀리며 최고점 대비 40% 넘게 하락했다. 미국 하이퍼스케일러(초대형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의 인공지능(AI) 투자 거품 우려가 반도체 피크 아웃 논란으로 이어지면서 강한 증시 조정이 이뤄졌다. 반면 7월 초 1550원대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한 달 새 120원 이상 떨어져 1430원대로 내려왔다. 코스피와 원·달러 환율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AI 투자 붐이 금융시장을 지배한 최근에는 이 동조화가 깨지고 있다.
AI 투자 붐은 ‘대외 금리 차에 따른 환율 결정 이론’을 케케묵은 이야기로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한미 금리 차 확대는 원화 약세 요인이었지만, 2024년 이후에는 정반대 흐름이 나타났다. 한때 2%포인트까지 확대됐던 금리 차가 최근 1%포인트대로 축소됐지만, 2024년 1300원대에서 거래됐던 원·달러 환율은 올해 상반기 1500원대 중반까지 올라갔다.
수익률 차이가 환율을 움직인다
AI 투자 붐은 환율의 결정 변수를 바꿔 놓았다. 금리 차보다 어디에서 더 높은 투자수익률이 기대되느냐가 환율을 움직였다. 글로벌 자금 이동이 ‘국가별 금리 차’라는 정태적 변수보다 투자수익률이라는 동태적 변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국내 개인투자자의 해외 주식 투자가 대표 사례다. 코스피 상승장이 본격화하기 전인 2024년 1월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 국내 개인투자자는 미국 주식을 283억달러(약 33조원) 순매수한 반면, 국내 주식은 19조8000억원 순매도했다. 이 기간 S&P500과 나스닥 지수는 40% 이상 상승한 반면 코스피 상승률은 4%에 그쳤다. 미국 증시의 압도적인 투자수익률이 국내 자금을 미국으로 끌어들이면서 달러 수요를 키웠고, 이는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을 높였다.
2025년 6월 2900대였던 코스피가 올해 6월 8400대로 약 세 배 폭등한 것은 미국의 AI 투자 붐 파생 효과로 볼 수 있다. 미국 하이퍼스케일러가 AI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에 나서면서 HBM 등의 수요가 급증했고,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본격화했다.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 폭등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사상 최대 수준으로 늘어났고, 이들 회사의 시가총액 급증이 코스피 상승을 주도했다. 미국 AI 투자붐이 미국 빅테크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반도체 기업의 실적과 기업 가치까지 밀어 올리며 국내 증시의 역사적인 랠리를 만든 것이다.
코스피 랠리가 환율을 밀어 올렸다
미국의 AI 투자 붐은 한국 증시에 대규모 자금 유입을 끌어냈지만, 역설적으로 정상 속도를 넘어선 코스피 랠리는 원·달러 환율 상승을 부추겼다. 코스피 2600선 부근부터 국내 주식을 사들인 외국인은 누적 수익률이 35%를 넘어서자, 매도로 돌아서는 경향을 보였다. 챗GPT를 활용한 분석 결과, 외국인의 투자 행태는 코스피 5500선을 기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투자수익률이 목표 수준을 넘어서자, 기관투자자의 기계적인 리밸런싱이 본격화한 것이다.
실제로 코스피가 7700, 8400까지 올라 연말 대비 수익률이 각각 88.4%, 107.9%에 달했던 지난 5~6월 외국인은 100조원가량 주식을 순매도했다. 통계적으로는 올해 1월부터 최근까지 외국인 주식 순매수액과 원·달러 환율 변동률의 상관계수가 -0.47로 나타났다. 외국인 순매도가 원·달러 환율 상승을 이끄는 뚜렷한 상관 관계가 확인됐다는 의미다. 시차를 반영한 분석에서도 외국인 매매가 환율 변화에 선행하는 관계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나타났다. 반면 한미 금리 차나 환율 변동이 외국인 매매를 좌우한다는 가설은 유의성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외국인의 차익 실현과 원화 달러 환전이 환율 상승 압력으로 이어졌음을 뒷받침한다. 결국 코스피의 과속 랠리가 외국인의 기계적 리밸런싱을 촉발했고, 그 결과 원화 약세를 유발한 것으로 해석된다.
증시 변동성 완화가 환율 안정 열쇠
지난 상반기 국내 주식을 약 150조원 정리한 외국인은 반도체주 조정으로 코스피가 6000대로 내려온 7월 14~24일 국내 주식을 4조원 이상 순매수했다. 코스피 급등 국면에서 차익을 실현한 뒤 주가 조정을 계기로 순매수 포지션을 다시 구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달러 환율도 1400원대로 내려왔다.
이 같은 분석은 환율 역시 자산 시장과 분리해 볼 수 없음을 시사한다. AI 시대에는 글로벌 달러 가치 등 대외 변수뿐 아니라 국내 증시 변동성에 따른 자본 이동도 환율을 움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5~6월 AI 투자 붐이 촉발한 코스피 급등과 외국인의 대규모 차익 실현은 이러한 새로운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 증시의 급락 만큼 과속 상승도 환율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는 시각이 필요하다. 글로벌 공급망을 따라 자본이 이동하는 AI 시대에는 국내 증시와 외환시장의 경계도 점차 흐려지고 있다. 주요국 대비 3~5배 커진 증시 변동성을 완화하는 것은 환율 안정 측면에서도 중요 과제가 됐다.
그런 측면에서 코스피 변동성을 완화할 수 있었던 국민연금의 리밸런싱을 연기하고, 오히려 삼전닉스 2배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같은 고위험 상품을 도입해 시장 변동성을 키운 정책은 환율 안정 목표와 엇박자를 냈다. 반면교사 삼아야 할 정책 실폐 사례다. AI 시대의 환율정책은 외환시장 관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증시의 수급 구조와 변동성까지 함께 관리하는 새로운 정책 프레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100엔당 891원대로 떨어진
원·엔 환율… 한일 환율 디커플링
그동안 대표적인 약세 통화로 함께 움직였던 원화와 엔화가 최근 엇갈린 흐름을 보이고 있다. 원· 달러 환율은 외국인의 국내 주식 순매수가 재개되면서 1440원대로 내려온 반면, 엔·달러 환율은 163엔 안팎으로 오르며 엔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7월 28일 원·엔 환율은 100엔당 891원대로 떨어져 1년 8개월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차이는 자본 흐름이다. 한국은 AI 투자 붐으로 급등했던 반도체주가 조정받자, 외국인이 다시 국내 주식을 사들이면서 원화 수요가 늘었다. 256억달러에 달하는 SK하이닉스 ADR(주식예탁증서) 발행 대금 유입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도 원화 강세를 뒷받침했다.
반면 일본 정부의 확장적 재정 정책이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행(BOJ)의 추가 금리 인상 속도가 더딜 것이라는 전망으로 일본은 엔 캐리 트레이드 압력이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AI 시대 한국은 자본시장 수급이 환율을 좌우하는 비중이 커진 반면, 일본은 여전히 통화정책과 금리 차가 엔화의 핵심 변수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