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 창업자 구인회(具仁會) 회장은 1969년 12월 31일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LG라는 이름은 없었고 럭키와 금성이라는 사명을 쓰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구인회의 생애를 파고들면 그가 사업하는 사명은 사업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인(仁)의 정신에 두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병철 삼성 회장이나 정주영 현대 회장처럼 본인이 직접 남긴 자서전은 없지만, 다행히 1976년 수많은 인터뷰를 기반으로 집필된 비매품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럭키금성 출간)’에 그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필자는 예전부터 공자가 말한 군자의 세 가지 유형. 즉 인자(仁者), 지자(知者), 용자(勇者)는 각각 LG·삼성·현대의 기업 문화와 조응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최근 창업자에 대한 탐색을 통해 그 뿌리가 고스란히 창업자의 기업가 정신과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문관 교리의 손자로 태어나 한학 익혀
구인회는 1907년 8월 28일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옛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장손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구연호는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이곳으로 낙향해 전원생활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구인회도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다. 배우는 속도가 빨라 “구교리 장손이 어디 가랴!”라는 칭찬을 들으며 학업에 정진했다.
구연호는 외아들 구재서를 위해 직접 가훈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동양 고전에 바탕을 둔 것으로, 지금 보아도 ‘명심보감’ 못지않은 인생의 지침을 담고 있다. 몇 구절만 살펴보자.
“선비가 세상을 살아감은 도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킴이다.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어버이 섬김에는 효성껏 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한다. 덕 좋아함을 여색을 좋아하듯 하고 악을 보면 끓는 물을 보듯 하라.(중략) 형제간과 종족 사이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말라.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마침내 어긋나게 된다. (중략) 아득하게 어두운 세상을 만나면 자취를 거두고 빛을 숨겨라. 두려워해서 스스로 조심함이 깊은 못을 만난 듯 엷은 얼음을 밟듯 하라.”
물론 구인회도 이를 수없이 보고 들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정신까지 녹아들어 있다. 이후 구인회는 15세인 1921년 지수보통학교에 편입학할 때까지 10년 가까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유감스럽게도 직접 쓴 자서전이 아닌 때문인지 이 책에는 이병철이나 정주영의 자서전과 달리 자기가 좋아한 한학의 도서 목록은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권유로 단발을 단행하다
이 무렵 전통문화에서 벗어나 근대로 들어가는 첫걸음은 머리를 깎는 단발이었다. 대부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구인회는 달랐다. 오히려 아버지의 허락하에 초립을 벗어 던지고 머리를 깎았다.
지수보통학교에 들어간 구인회는 훗날 효성 창업자 조홍제(1906~84년), 이병철 회장의 친형 이병각과도 친하게 지냈다.
창업주는 한결같이 주도적으로 낡은 세계를 뛰어넘으려 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구인회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불어넣은 것은 처남 허인구였다. 당시 구인회 집안이 삼백석꾼이었다면 처가 허씨 집안은 훨씬 넉넉했다.
처가의 든든한 후원하에 구인회는 1924년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인촌 김성수가 운영하던 민족정신이 강한 학교였다. 이때 구인회는 “지금까지 구경도 못했던 동서고금의 유명 저서를 탐독했다”라고 한다. 지금의 세계 사상 전집이나 세계문학 전집은 이미 당시 일본에서 그 목록을 완성한 것이었기에 그런 책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과거 김종필 총리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도 “내 교양은 일제 시대 사상 전집과 문학 전집 덕분이지”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장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구인회의 서울 유학은 2년 만에 중단되었다.
다섯 동생 3남 1녀 아버지 구인회의 결단
고향으로 돌아온 구인회는 잠시 협동조합 일도 해보고 동아일보 지국도 운영해 보았지만, 그 안에 이미 불타오른 새 세계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불어나는 식구로 인해 삼백석 가산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1931년 25세 구인회는 장사를 하기로 결심한다. 물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반대는 불 보듯 뻔했다. 선비 집안에서 장사라니! 훗날 그는 담백하면서도 뛰어난 결단력으로 회사를 성장시켰다. 아버지가 반대하자 구인회는 곧장 할아버지를 찾아가 말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타관에 나가 장사라도 해서 아우들을 공부시키는 데 힘이 되고 싶습니다.”
구인회가 사업에 뛰어든 동기는 제가(齊家)에 있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두 가지를 물었다.
“네 나이 지금 몇 살이더냐?”
“그래, 장사를 하겠다면 무슨 장사를 할 생각인가?”
이후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불러 오히려 설득했고 아버지는 여러 날이 지난 뒤에 두고두고 구인회의 마음에 남게 될 말을 남기며 허락했다.
“2000원이다. 내 형편으로 더는 못 주니 가서 네 생각대로 잘해 보거라. 세상을 얕보지 말고 남하고 화목하게 지내고 신용을 얻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나는 너를 믿는다.”
구인회의 인화(人和) 정신은 일차적으로 이 같은 가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인 구인회의 발상의 전환
그는 멀리 가지 않았다. 고향에서 가장 가까운 도회지인 진주로 나가 동생 구철회와 함께 포목상 구인회상점을 열었다. LG그룹의 탄생이다. 그 후 구인회의 사업이 성장할 때마다 여러 동생이 역할 분담을 하며 자기 일처럼 헌신했다.
약간의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지만, 포목 사업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1936년 7월 병자년 대홍수는 사업가 구인회에게 큰 위기를 몰고 왔다. 남강 둑이 무너지면서 구인회상점이 물에 잠겨버렸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인가 싶었다.”
그러나 대홍수도 구인회가 그동안 쌓아 놓은 고객의 신뢰와 거래처와 신용 그리고 장사 경험은 앗아가지 못했다. 게다가 구인회는 앞으로 사업가 경력에서 보여주듯이 미래를 사업적으로 읽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발상의 전환을 통한 미래 만들기다.
문득 ‘장마 진 해는 풍년이 든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기미(幾微)를 읽는 데 뛰어났던 구인회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풍년이 들면 농가의 소득이 늘기 마련이고 소득이 늘면 농민은 아들딸 혼인시키는 데 바쁠 것이다. 그러니 금년 가을에는 비단이다 광목이다 있는 대로 나가고 경기가 좋을 것은 틀림없다.”
그간 신용을 바탕으로 포목을 구색별로 갖춰 구입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했다. 신용은 미래의 시간을 끌어다 쓸 수 있는 능력임을 구인회도 여기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을이 되자 예상은 적중했다. 포목전의 피륙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오히려 1936년 겨울이 되자 구인회는 진주 상공 업계의 유지로 떠올랐다. 전화위복, 이는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기미를 알아차리는 구인회의 지기(知幾)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원래 지기는 ‘주역’에 나오는 공자 말이다. 할아버지에게 이 말과 그 뜻을 제대로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과 급제 출신의 할아버지는 이를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서당 공부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강조했을 것이다.
1937년 늦은 봄에 새로운 사업도 찾아볼 겸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산을 찾았다. 그런데 부두에 일본군의 말이 수없이 집결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또한 구인회는 무심코 지나치지 않았다. 지기 능력이 발동한 것이다.
“전쟁이 터지려나?” “전쟁이 터지면 세상살이는 어떻게 변할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조선 사람 걱정에 생각이 미쳤다.
“전쟁이 터지면 우리 조선 사람만 죽을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옷감만이라도 전쟁 물자로 통제되기 전에 비축해 두면 우리 조선 사람에게는 다소나마 도움이 되겠지.”
이런 결론에 이른 구인회는 은행 융자를 최대한 활용해 광목 1000짝, 한 짝이 20필이니 2만 필을 비축했다.
실제로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구인회 상점에 비축해 놓은 광목은 순간 바닥이 났다. 연말에 결산을 해보니 무려 8만원이라는 흑자를 기록했다.
이제 그의 눈은 무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국은 전쟁으로 인해 점점 암흑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다른 창업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그때 구인회는 가훈 중에서 다음 구절을 음미했을 것이다.
“아득하게 어두운 세상을 만나면 자취를 거두고 빛을 숨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