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 아버지를 놓아준 석사(石奢)와 잘못된 판결로 사람을 죽인 이리(李離)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사는 공정과 형평이라는 법의 기본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기(史記)’의 ‘순리열전(循吏列傳)’에는 이 두 이야기 앞에 세 정치가의 행적이 실려 있다.
초(楚)의 재상 손숙오(孫叔敖)는 교화로 백성을 이끌어 위아래가 화합하고 풍속이 아름다워졌다. 부드러운 정사를 펼쳤지만, 범법자가 줄어들어 간사한 짓을 하는 관리가 없어지고 도적이 생기지 않았다. 가을과 겨울에는 백성이 산에서 나무를 베도록 권하고 봄과 여름에는 물로 농사를 짓도록 해 모두 편하고 즐겁게 생업에 종사했다. 장왕(莊王)이 작은 화폐를 크게 바꾸자, 시장이 혼란해지고 백성이 불편해 생업을 포기할 정도가 됐다. 손숙오가 왕에게 종전대로 복원하자고 건의해 과거대로 시행하니 시장이 사흘 만에 회복됐다. 또 왕이 수레를 높게 고치려 하자, 손숙오는 시행령을 자주 내리면 백성이 어려워한다면서 주택 대문의 문지방을 높이면 사람들이 스스로 수레를 높일 것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 하자 반년 만에 모든 수레가 높아졌다.
손숙오의 많은 행적 중에 사마천(司馬遷)이 굳이 이런 일화를 인용한 까닭은 이 대목 끝에 잘 설명돼 있다. “이는 시키지 않아도 백성이 그 교화를 따르는 사례로서 가까이 있는 사람은 보고 배우고, 멀리 있는 사람은 사방에서 듣고 본받는다.”
정(鄭)의 자산(子產)이 재상을 맡은 지 1년 만에 기강이 바로 서고 예절 바른 사회가 됐다. 2년이 되니 시장에서 매점매석하는 자가 없어지고, 3년이 지나자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걱정 없었으며 길에서 남의 물건을 줍지 않았다. 4년째는 밭에 농기구를 두고 와도 괜찮았다. 5년이 되자 평화로워져 병역이 없어졌고 모든 일이 강제하지 않아도 잘 처리됐다. 이렇게 다스린 자산이 죽자 목 놓아 우는 젊은이와 아이처럼 훌쩍이는 노인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자산이 우리를 떠나갔으니 백성은 장차 어찌해야 하나?”
노(魯)의 공의휴(公儀休)가 재상으로서 법을 받들고 모든 일을 이치에 따라 처리하자, 특별한 개혁 없이도 관리들이 바르게 일했다. 나라의 녹을 먹으면 백성과 이득을 다투지 않고 큰 것을 얻으면 작은 것을 취하지 않도록 했다. 누가 그에게 물고기를 주었으나 받지 않자, 물었다. “좋아하신다고 해서 특별히 드리는데 왜 받지 않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좋아해서 받지 않소. 재상의 녹봉으로 충분히 사 먹을 수 있는데, 지금 받았다가 파면되면 누가 다시 내게 물고기를 주겠소?” 그는 또 자기 집 밭의 채소를 모두 뽑고 베 잘 짜는 여인도 내쫓은 뒤 베틀을 태웠다. 농민과 제조업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청렴함과 함께 대중의 이익을 배려하는 공직자의 소명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사마천의 의도적인 편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성의 탄식과 원한이 없으려면 정치가 평온하고 법치는 순리대로 시행돼야”
‘사기’에는 한의 순리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으나, 한서(漢書)의 ‘순리전’은 한에도 많은 순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경제(景帝) 때의 촉군(蜀郡) 태수 문옹(文翁)은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중을 잘 교화했다. 서쪽 변방의 촉군은 풍속이 미개했으나 그가 크게 변모시켰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재능 있는 젊은 관리들을 뽑아 도성으로 유학 보낸 일이었다. 유학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관청의 예산을 절약하고 지역 특산물을 잘 활용했다. 선진의 문물제도와 율령을 배우고 온 관리들은 요직에 임용돼 지역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의 재임 동안 보낸 유학생 수가 동방의 다른 선진 지역보다 많았다. 또 지역의 중심인 성도(成都)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그 뒤 촉 지역의 문화가 급속히 발달한 것은 모두 문옹의 노력 덕분이었다. 무제(武帝) 때 지방 곳곳에 학교를 세우게 했는데, 이 사업은 문옹이 처음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혹리들이 횡행하던 무제 말기에는 황패(黃霸)가 관용과 온화함으로 돋보였다. 선제(宣帝) 즉위 초에 그는 고위 사법 관리로 임용돼 많은 사건을 공정하게 잘 처리했다. 지방 장관으로 내려간 뒤에는 관청 주위 곳곳에서 닭과 돼지를 기르게 해서 홀아비와 과부 등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 또한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예산을 절약해 재원을 증식했다. 지역의 동향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관리들을 용의주도하게 통솔해 안정된 사회가 됐다. 간악한 짓을 하던 자들은 다른 곳으로 달아나고 도적은 나날이 줄었다. 인구는 해마다 늘고 그의 치적은 당대 제일로 꼽혔다. 이 공로로 그는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어 승상에 발탁됐다. 그 뒤 조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저자 반고(班固)는 한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를 언급할 때마다 황패를 으뜸으로 친다(言治民吏, 以霸為首)”고 격찬했다.
주읍(朱邑)은 젊어서부터 청렴하고 공평한 관리로서 가혹하지 않아 그에게 매를 맞거나 모욕당한 사람이 없었다. 특히 독거노인 등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잘 대해 관리와 백성이 모두 좋아했다. 태수로 승진한 뒤 업적이 훌륭해 조정의 재정 장관인 대사농(大司農)에 올랐다. 그는 순박하고 후덕해 지인들을 친절히 대했으나 공정한 성품 탓으로 사익에 관계되는 교류는 하지 않았다. 선제가 이를 높이 사고 조정 대신들도 그를 존경했다. 높은 직위에 있었으나 근검절약이 생활화되어 녹봉과 조정의 하사품은 모두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때문에 변변한 재산이 없었다. 그가 죽자 선제가 조서를 내려 그를 ‘맑은 인품의 군자(淑人君子)’라고 칭송했다.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의 가신이었던 공수(龔遂)는 소제(昭帝)가 죽은 뒤 황제로 옹립된 창읍왕을 따라 도성에 갔다. 그러나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던 유하가 도성에서도 황음무도한 나날을 보내자, 27일 만에 쫓겨났다. 이에 연루돼 200여 명이 처형됐으나 공수는 유하에게 자주 간언했던 사실이 참작돼 목숨을 건졌다. 선제가 즉위하고 몇 년이 지났을 때 발해(渤海) 지역에 기근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선제가 이를 다스릴 적임자를 묻자, 승상과 어사가 공수를 추천했다. 70세가 넘어서 발해 태수가 된 공수는 부임하자, 바로 예하 관청 곳곳에 공문을 보내 도적 토벌을 중지시켰다.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괭이와 호미 등 농기구를 든 자는 모두 양민이니 그 과거를 묻지 말라. 무기를 든 자만이 도적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지역은 점점 안정돼 주민이 걱정 없이 생업에 종사하고, 도적들도 모두 농기구를 들었다. 공수는 창고를 열어 기근에 허덕이는 빈민을 구제하고 좋은 관리를 뽑아 지역의 안정에 힘쓰도록 했다. 또 사치와 허례허식에 비용을 낭비하는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검약한 생활에 앞장섰다. 이와 함께 농업과 양잠을 권장해 집집이 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며 닭과 돼지를 기르도록 했다. 또 도검류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이를 팔아 소나 송아지를 사라고 독려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지역경제가 발전하고 송사는 줄었다.
소신신(召信臣)은 근면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주민이 부유해지도록 여러 사업을 추진해 쉴 새 없이 곳곳의 논밭을 돌아다니며 농경을 장려했다. 관개의 확장을 위해 지역의 물줄기를 관찰해 요소요소에 수로와 갑문을 건설했다. 덕분에 생산량은 해마다 증가하고 농경지는 몇 배로 늘어나 모든 주민이 그 이익을 얻었다. 물을 균등하게 공급하기 위해 규정을 만들어 분쟁을 예방했다. 또 관혼상제에서 사치를 금지하고 생활의 검약을 계몽했으며, 평소 빈둥대던 젊은이들이 농사에 힘쓰도록 지도했다. 그 덕에 몇 년이 못 돼 호구가 두 배로 늘어나고 도적이 없어졌으며 소송도 사라졌다. 지역민들이 그를 존경해 ‘소부(召父)’로 불렀다. 이 치적을 인정받아 그는 전한 말기의 원제(元帝) 때 소부(少府)에 임명됐다. 황실 재산 및 생활 전반의 업무를 관리 감독하는 고위직이었다. 부임하자 그는 불요불급한 비용과 인원을 대폭 줄였다. 악공과 광대를 감원하고 각종 기물도 절반으로 축소했다. 겨울에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호화로운 온실은 제철에 나지 않은 음식물이 인체에 해롭다고 황제를 설득해 폐쇄했다. 이렇게 그는 막대한 국가 예산을 절약했다.
반고는 ‘순리전’의 서문에서 문옹 같은 관리는 스스로 근신해 남에게 모범을 보였으며, 청렴함과 공평함으로 임해 엄하게 하지 않아도 대중이 잘 따랐다고 평했다. 또 무제 때 혹리가 많았던 반면 선제 때 순리가 많은 까닭은 선제의 정치 이념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선제는 언제나 일반 백성이 제가 있는 곳에서 탄식과 원한이 없으려면 정치가 평온하고 법치는 순리대로 시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덕분에 선제 때 유독 훌륭한 관리가 많아 중흥을 이루었다는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