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브랜드의 플래그십(브랜드의 상징이 되는 기함)은 단순히 차체 크기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압도적인 존재감은 물론, 막강한 운동 성능, 어떤 노면에서도 흔들림 없는 안정감, 장시간 주행에도 피로가 쌓이지 않는 승차감, 탑승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고급 요소 등을 갖춰야 비로소 플래그십이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포드 산하 고급 브랜드인 링컨의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 네비게이터가 이 기준에 도전한다.
네비게이터는 1997년 출시된 링컨 최초의 SUV로, 출시 첫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등 미국 경쟁 브랜드의 초대형 SUV 시장 진출을 이끌었다. 2002년 2세대(후륜 독립식 서스펜션 최초 적용), 2006년 3세대(롱보디 버전 출시), 2017년 4세대(알루미늄 차체 적용) 완전 변경을 거쳤으며, 현재 모델은 2025년 미국 시장에 먼저 출시된 5세대다. 한국에는 지난 7월 공식 출시됐다.
길이 5340㎜, 너비 2070㎜, 휠베이스(앞뒤 바퀴 축간거리) 3110㎜에 무게 2.7t을 넘는 차체는 링컨이 강조하는 ‘궁극의 안식처’ 철학을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국내 판매는 최고급 옵션이 들어간 블랙 레이블 단일 트림이다. 가격은 1억6150만원. 링컨 네비게이터를 서울 송파구에서 경기도 양평군까지 약 100㎞ 주행했다.
압도적이나 부담스럽지 않은 차체
크기에서 오는 압도감은 이전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디자인은 한층 절제된 모습이다. 단순하게 큰 SUV가 아니라 플래그십다운 품격을 담았다는 인상이다. 전면부는 지면과 수직으로 떨어지는 시그니처 그릴과 이를 가로지르는 라이트 바(bar)로 완성됐다. 넓은 차체에 어울리는 그릴 비율이 웅장하면서도 과하게 화려하지 않게 표현됐다. 중앙 엠블럼에서 시작해 헤드램프로 순차 점등하는 ‘링컨 엠브레이스’ 웰컴 시퀀스도 인상적이다. 조명 연출로 탑승자를 맞이하는 모습이 좋다.
측면은 긴 보닛과 3110㎜에 달하는 휠베이스가 안정적인 비율을 만들어 낸다. 22인치 알루미늄 휠과 큼직한 차체가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정차 시에 안정감을 주는 건 덤이다. 5340㎜ 길이와 2070㎜ 너비의 차체는 그 자체로 존재감을 주지만, 측면의 인상을 결정짓는 캐릭터 라인(차체 측면 선)이 시각적으로 슬림한 느낌을 준다. 후면은 차체를 가로지르는 테일램프와 중앙의 3D 링컨 배지가 시선을 끈다.
이번 세대에 처음 적용된 ‘링컨 스플릿 게이트’는 실용성과 고급성을 동시에 노린다. 트렁크의 상하단이 각각 독립적으로 열리는 구조인데, 하단 게이트의 경우 최대 약 227㎏을 견뎌, 성인 남성 2명이 나란히 앉는 벤치로 활용될 수 있다. SUV의 다재다능함을 나타낸 부분이다.
넉넉하고 부드러운 성능
3.5L V6 가솔린 트윈터보 차저를 올려 최고 446마력, 최대 70.5㎏·m의 힘을 낸다. 숫자로만 보면 과격한 주행도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나, 실제 주행 성격은 그만큼 과하지 않다. 출발부터 차를 강하게 밀어붙이기보다 커다란 차체를 부드럽고 일정하게 밀어내는 감각에 가깝다는 게 맞을 것이다. 저속 구간에서도 스티어링(조향)이 가벼웠고, 차체 크기에 비해 회전 반경 역시 부담스럽지 않았다. 좁은 골목이나 교차로, 주차장에서는 차의 너비를 의식할 수밖에 없지만, 높은 시트 포지션과 넓은 시야, 360도 카메라 덕분에 차체 위치 파악이 쉬웠다.
도심 주행 구간에서는 요철과 맨홀, 다리 이음새 등에서 노면 충격이 거칠게 전달되지 않았다. 연속 가변 감쇠 제어 기능을 갖춘 어댑티브 서스펜션이 잔진동을 걸러낸 덕분이다. 고속도로에 올라 속도를 높이면 성격이 달라지는데, 느린 앞차를 추월하기 위해가속 페달을 밟으면 10단 자동변속기가 빠르게 기어 단수를 조절하면서 필요한 힘을 즉시 끌어냈다. 2.7t 이상의 거구지만, 가속이 아주 매끄러웠다. 물론 스포츠카처럼 운전자를 자극하지 않는다. 속도를 자연스럽게 끌어올리는 성향이다.
시승 당일은 비가 많이 내렸는데, 노면이 살짝 미끄러울 법했으나, 네비게이터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상시 사륜구동과 서스펜션이 노면 상황에 맞게 차체를 제어한 덕분이다. 정숙성도 상당했는데, 빗소리와 타이어가 물을 가르는 소리, 풍절음 등이 실내로 들이닥치지 않았다.
48인치 디스플레이의 존재감
실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대시보드를 꽉 채운 48인치 파노라믹 디스플레이다. 화면이 운전자 눈높이에 맞춰 배치돼 시선을 내리지 않아도 속도와 내비게이션, 주행 정보 확인이 쉬웠다. 다만 눈을 압도하는 디스플레이 크기에 비해 소프트웨어 완성도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내비게이션을 장착하지 않아 애플 카플레이나 구글 안드로이드 오토를 활용해야 하지만, 스마트폰 연결이 원활하지 않은 탓이다. 그래도 인포테인먼트(정보와 즐길거리의 합성어) 메뉴 반응 속도와 그래픽 마감은 최신 시스템답게 정교해 보였다.
1열 시트는 운전석 30방향, 조수석 28방향으로 전동 조절이 가능해 체형에 맞게 자세를 세밀하게 맞출 수 있었다. 통풍과 열선은 물론, 마사지 기능도 적용됐다. 2열도 전동 조절과 통풍·열선·마사지 기능이 들어갔다. 버튼 하나로 3열 이동이 가능하게 한 파워 피치 앤드 슬라이드 기능이 적용됐다. 3열은 성인이 앉아도 무릎과 머리 공간이 충분했다. 3열 등받이는 40 대 20 대 40 비율로 접을 수 있어 커다란 짐을 싣기에 유용하다.
‘링컨 리쥬브네이트’ 기능은 네비게이터의 백미다. 주차 상태에서 기능을 켜면 시트 마사지와 리클라이닝이 시작되고, 48인치 디스플레이에 자연 풍경 영상이 재생된다. 28개 스피커로 구성된 오디오 시스템과 디지털 향기, 실내조명이 작동해 실내 분위기를 편안하게 바꾸고, 완벽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준다.
내장재로는 볼스도르프 가죽 스티어링 휠과 오퓰런스 가죽 시트, 천연 우드 트림 등 플래그십에 어울리는 고급 소재가 듬뿍 사용됐다. 다만 도어 하단과 센터콘솔 일부 등 손이 자주 닿을 수 있는 부위에 원가 절감형 플라스틱 소재가 쓰였다. 1억6000만원대 가격표를 고려하면 약간 아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