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광복절이 다가오면 떠오르는 나라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이다. 2021년 8월 미군의 급작스러운 철수와 탈레반의 수도 카불 진입은 20년 동안 이어진 긴 전쟁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9·11 테러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었고 미국에는 아무런 성과 없는 패배와 상실만 남았다. 개인에게도 실패와 아픈 기억은 다시 떠올리기 싫은 것처럼 미국과 서방 국가는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관계를 단절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의 복귀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모든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중세로 회귀할 것으로 여겨졌다. 1990년대 탈레반 집권 시기를 떠올려보면 충분히 가능한 전망이었다. 하지만 20년간 이어진 전쟁은 탈레반 전사의 마음과 생각도 바꿔놓았다.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과 장비를 다뤄보면서 현대 문명의 편리함과 유용성을 인식했고, 카타르·아랍에미리트(UAE) 등에서 미국과 협상을 이어가면서 국제적 감각을 익혔다. 이런 변화된 탈레반은 의외로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아프가니스탄은 현재 평화를 누리고 있다. 과거 아프가니스탄은 어디로 이동하기 매우 어려운 곳이었다. 부실한 도로망은 각 세력이 만든 수많은 검문소로 막혀 있었고 안전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학생은 인근 학교에 걸어서 등교하기를 두려워했고, 수시로 벌어지는 폭탄 테러는 사람들이 시장에 모이는 것을 꺼리게 했다. 각종 무장 세력은 농민, 상인을 가리지 않고 갈취를 일삼아 왔다. 탈레반에 의해 평정된 아프가니스탄은 이제 검문소 걱정 없이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학생은 걸어서 학교에 가고, 농민은 시장에서 물건을 거래하고 있다. 일상적인 갈취도 이제 대부분의 곳에서 사라졌다.
정상적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직과 예산이 필요하다. 탈레반 집권 직후에는 아프가니스탄 정부 관계자에 대한 대규모 숙청과 보복이 예상됐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탈레반은 대부분의 기존 관료와 국가 운영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했다. 미국과 서방국가의 지원으로 구축된 국경 보안 및 세금 징수와 관련한 전산망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아프가니스탄은 2020년과 비교해서 60% 이상 증가한 매년 40억달러(약 5조6540억원)의 세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세계은행 등은 추정하고 있다.
탈레반의 변화는 국가 운영 방향에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 탈레반 집권 시절 아프가니스탄은 모든 현대 문명을 금지하고 파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의 탈레반은 도로 및 태양광발전소 건설 등 기본적인 인프라를 확보하기 위한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느린 속도지만 도로가 확충되고 있으며 최근 17개에 이르는 대규모 태양광발전소 허가를 내주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최대 1조달러(약 1414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자원과 관련한 탐사 및 채굴 허가를 발급하면서 해외 기업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억압 속에 피어난 미묘한 변화
물론 탈레반의 주요 원칙은 국민에게 강요되고 있다. 모든 음악은 금지되었으며, 이슬람 율법에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한 무자비한 현장 구타도 여전하다. 여성의 중학교 진학은 금지되었고 한때 금지되었던 조혼이 다시 합법화되는 등 여성 인권은 급속히 후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도 변화는 나타난다. 여성 교육에 대해 탈레반 대원도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 마드라사라고 불리는 이슬람 종교학교가 여성에게 중등교육을 시행하는 경우가 조금씩 늘고 있다. 월 15달러(약 2만1200원)의 수업료를 받고 주 6일, 하루 4시간씩 영어, 과학, 수학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사교육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오히려 과거에 비해 수업의 질은 향상되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물론 빈곤한 아프가니스탄 대다수 국민에게 월 15달러는 매우 큰 금액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소득에 따라 수업료를 차등 적용하는 등 교육에 대한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인식은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최근 탈레반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은 인터넷을 통한 관광 비자 발급을 시작한 점이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계정을 만들고 기본적인 정보를 입력하고 수수료를 결제하면 비자가 발급된다. 물론 처리 과정에서 1주일 이상의 대기는 필수적이지만 과거 UAE에 있는 대사관 또는 영사관을 찾아 인터뷰하고 비자를 받아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이러한 변화는 관광객 유치를 위
한 노력의 일환이다. 실제 비자 발급 사이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의 자연, 문화유산 등을 내세우면서 세련된 방식으로 홍보하고 있다. 과거 아프가니스탄 유일의 국적 항공사였던 캄 에어도 여전히 운영되면서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취항지를 확대해 가고 있다. 2025년 상반기에만 7000명 이상 관광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는데 이러한 추세가 계속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는 지도자는 하이바툴라 아쿤자다다. 1967년생인 그는 2016년부터 최고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아쿤자다는 자기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은둔형 지도자다. 현재 공개되어 있는 그의 사진은 1990년대 후반 촬영한 것으로 최근 그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가끔 이뤄지는 대중 연설에서도 등을 돌리고 연설하면서 자기 모습을 감추고 있다. 또한 카불이 아닌 칸다하르에서 통치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파슈툰족의 거점인 칸다하르에서 원격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강경 보수로 분류되는 그의 노선에 반대하는 온건개혁파가 한때 대립했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현재 아쿤자다의 통치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해외 원조 축소 등 난관 봉착한 경제
평화가 돌아온 아프가니스탄의 가장 큰 고민은 경제다. 구매력 기준(PPP)으로 아프가니스탄의 1인당 국민소득은 2300달러(약 325만원)에 불과하다. 2000년대 중반 수준으로 후퇴한 것이며, 세계적으로도 내전을 겪고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이나 니제르와 유사한 수준이다. 국민소득 감소는 해외 원조 감소에 따른 영향이다. 한때 40억달러(약 5조6540억)에 이르던 해외 원조는 탈레반 재집권 이후 급격히 축소되어 2025년에는 12억달러(약 1조6960억원) 수준까지 감소했으며 올해는 더욱 줄고 있다.
여기에 더해 가뭄이 지속되면서 식량 부족 현상이 심화해 어린이를 중심으로 약 400만 명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최근 파키스탄과 이란에 거주하던 600만 명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강제로 추방되어 귀국함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은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할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중심부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지정학적 위치는 러시아,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 많은 국가로 하여금 탈레반 정권과 협력하도록 하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EU)도 아프가니스탄 난민 복귀를 명분으로 탈레반 정권과 회담을 시작하는 등 서방 국가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입장을 전환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입장에서도 막대한 지하자원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특히 이란은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우회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협력 강화에 노력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자유롭지는 않지만, 평화로운 상황을 이어가면서 정상 국가로의 모습을 보여줄지 아니면 다시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폭력과 고립주의로 일관하는 과거로 회귀할 것인지 많은 국가가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