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마 아슬람 미국 UC 샌디에이고(UCSD) 의대 교수 연구진은 “신장이식을 받은 65세 남성 환자가 항생제 내성 대장균에 감염돼 위험에 처했지만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탑재한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를투여받고 회복됐다”고 8월 11일(이하 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임상 감염 질환’에 발표했다.
신장이식 후 내성균 감염된 환자 치료
세균을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는 1896년 영국의 세균학자 어니스트 핸킨이 인도에서 처음 발견했다. 1917년 프랑스 미생물학자인 펠릭스 데렐이 그리스어로 ‘박테리아를 먹는다’는 뜻에서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줄여서 ‘파지’라고 한다.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을 죽이는 능력 덕분에 1920~30년대 이질과 패혈증 등 다양한 세균성 질환을 치료하는 데 이용됐다. 1940년대 페니실린 항생제가 널리 쓰이면서 잊혔다가 최근 항생제 내성균이 기승을 부리면서 다시 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에 파지 시술을 받은 환자는 신장이식을 받고 슈퍼박테리아인 대장균에 감염됐다.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아 이식수술을 받은 후 7개월이 지나면서 방광벽과 전립선에 생긴 혹 덩어리가 피부 밖으로 돌출됐다. 아슬람 교수 연구진은 기존 치료법으로는 환자의 감염을 제거하지 못하자, 덴마크 바이오 기업인 스니퍼 바이옴(이하 스니퍼)이 개발한 파지 치료법을 시도했다.
박테리오파지는 숙주인 세균 안에서 증식하고 나중에 밖으로 나오면서 세포막을 터뜨려 죽인다. 먼저 바이러스는 세균에 달라붙어 구멍을 내고 자기 유전자 DNA를 안으로 집어넣는다. 두 번째는 증식 과정이다. 박테리오파지 DNA는 세균의 복제 효소를 이용해 유전자와 몸통 단백질을 복제한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개체로 불어난 박테리오파지가 밖으로 방출돼 다른 숙주를 찾아간다. 바이러스를 키워준 세균은 이 과정에서 세포막이 터져 죽는다.
아슬람 교수가 환자 치료에 쓴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는 항생제 내성 대장균만 골라 죽이도록 유전자를 손본 형태다. 연구진은 대장균 감염 환자에게 박테리오파지 치료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열린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혹의 부피는 0.74L에서 0.37L로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대장균만 골라 파괴하는 유전자 가위
스니퍼는 박테리오파지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추가한 치료제 SNIPR001을 개발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DNA를 자유자재로 잘라내는 효소 복합체다. 보통 공략 대상인 DNA를 찾아가 지퍼처럼 결합하는 가이드 RNA와 결합 부위를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인 캐스9로 구성된다.
스니퍼는 박테리오파지 안에 대장균의 DNA를 찾아가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탑재했다. 특히 기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에는 DNA를 잘라내는 캐스9 효소가 들어가지만, 파지 바이러스에 들어간 유전자 가위는 아예 대장균 DNA를 분해하는 캐스3 효소를 갖췄다. 대장균만 찾아 완전히 파괴하는 강력한 유도미사일을 만든 것과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세균이 자기를 공격하는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기억했다가 다시 만나면 바로 잘라내도록 만든 면역 체계에서 유래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슈퍼박테리아를 잡은 것은 적군의 신무기를 훔쳐다가 적진으로 날린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탑재한 박테리오파지가 항생제 내성균 감염을 치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논문 공동 저자인 스니퍼의 에릭 반 데르 헬름 박사는 “단 한 사례로 유전자 가위를 탑재한 박테리오파지가 항생제 내성균을 없앴다고 결론을 내리기엔 이르다”며 “박테리오파지와 그 전에 쓴 새로운 항생제 조합이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스니퍼는 앞으로 추가 임상 시험을 통해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탑재한 파지 바이러스의 효능을 확실하게 입증할 계획이다. 이미 이번처럼 환자가 경비를 대는 임상 시험 12건을 요청받았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같은 파지 바이러스로 대장균 감염에 취약한 암 환자에게 임상 2상 시험을 실시하고 있다.
AI로 바이러스 내성균 잡는 파지 설계
인공지능(AI)도 슈퍼박테리아를 잡는 박테리오파지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했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브라이언 히 교수 연구진은 챗GPT와 같은 방식으로 박테리오파지의 유전체(게놈)를 새로 설계했다고 8월 6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새로운 파지 바이러스는 기존 바이러스에 내성이 있는 대장균에도 감염됐다. 항생제뿐 아니라 파지 바이러스에도 내성이 있는 초슈퍼박테리아를 잡은 셈이다.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챗GPT와 같은 방식으로 DNA 염기 서열을 분석하고 생성하는 이보(Evo)라는 이름의 AI 모델을 개발했다. 연구진은 이보에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와 친척뻘 바이러스의 유전정보를 학습시켰다. AI는 이후 새로운 파지의 게놈 설계도 수천 개를 생성했다. AI 설계도대로 실험실에서 만든 박테리오파지 285종 중 대장균에 감염된 것은 16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의 게놈을 혼합하자 기존 박테리오파지에 내성이 있는 대장균에도 감염됐다. 연구진은 앞으로 AI가 다양한 세균 감염을 치료할 박테리오파지를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항생제 내성을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10대 공중보건 위기 중 하나로 규정했다. 2021년 항생제가 듣지 않는 내성균에 114만 명이 죽었으며, 사망의 간접적 원인까지 합치면 그 수가 470만 명에 달한다.
현 추세라면 2050년엔 1000만 명이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돼 사망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매년 서울 인구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항생제 내성균으로 사라진다는 말이다. 유전자 가위로 무장하고 AI가 설계한 착한 바이러스가 인류를 구할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