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스 스피치' 포스터. /사진 TMDB
영화 '킹스 스피치' 포스터. /사진 TMDB

1990년대 초 IBM은 해체론이 나올 만큼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기존 성공 방식이 흔들렸다. 1993년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루 거스너(Lou Gerstner)는 제품과 사업별로 나뉘어 있던 IBM을 고객에게 통합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로 만들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고객의 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의 해법으로 정렬한 것이다.

변화는 회생으로 이어졌다. 서비스와 소프트웨어 쪽으로 사업의 무게중심을 옮기며 성과가 나기 시작했고, 2011년에는 매출과 이익, 주당순이익(EPS)에서 기록적인 실적을 거뒀다. 하지만 2012년부터 2017년 3분기까지 전년 동기 대비 매출 감소가 22분기 연속 이어졌다. 그 시점에 지속 성장을 위해 IBM에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신재훈 - 이화여대 경영대 겸임교수, 서울대 경영학 학·석사, 미국 시카고대 MBA, 서강대 경영학 박사, 현 리버스톤 자산운용 사장, '비욘드 시네마' '비욘드 스트래티지' 저자
신재훈 - 이화여대 경영대 겸임교수, 서울대 경영학 학·석사, 미국 시카고대 MBA, 서강대 경영학 박사, 현 리버스톤 자산운용 사장, '비욘드 시네마' '비욘드 스트래티지' 저자

말할 수 없는 왕자, 말해야 하는 왕

톰 후퍼 감독의 영화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 2010)’는 말더듬이였던 알버트가 왕위에 오른 후 국민 앞에서 자기 목소리로 연설하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영화 초반, 공개 연설에 나선 알버트는 마이크 앞에서 말문이 막힌다. 여러 차례의 실패 끝에 아내 엘리자베스가 찾아낸 사람은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였다. 그는 왕실의 격식에 얽매임 없이 알버트를 가족의 애칭인 ‘버티’라 부르며 자기 치료실로 직접 오게 한다. 호흡과 발음 교정에 그치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게 하는 로그의 방식은 치료가 절실한 알버트조차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느 날 로그는 알버트에게 헤드폰을 씌워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게 한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몇 문장을 읽던 알버트는 화를 내며 치료를 그만둔다. 그러나 궁으로 돌아와 로그가 건넨 음반을 듣고 깜짝 놀란다. 녹음된 자기 목소리가 더듬거림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희망 속에 로그와 훈련을 이어가던 1936년, 형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포기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차남인 알버트가 왕위에 올라 조지 6세가 된다. 이제 그의 목소리는 왕의 역할을 수행하는 수단이 되었기에 개인의 과제로만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말할 수 있는가’에서 ‘나는 국민에게 말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된 것이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조지 6세는 라디오를 통해 이를 국민에게 알리고자 마이크 앞에 선다. 그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 로그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그러나 또렷한 발음으로 연설문을 낭독한다. 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인 조지 6세의 목소리는 마침내 온 나라 국민에게 닿는다.

현실을 다시 읽고, 자기 몫으로 움직이다

알버트는 반복된 실패로 ‘나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로그와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고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경영학자 칼 웨익(Karl E. Weick)은 불완전한 현실에서 단서를 찾아, 벌어지는 일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을 센스메이킹이라 불렀다. 센스메이킹은 익숙한 설명으로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단서를 붙잡고 현실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이다. 알버트에게는 음반 속 목소리가 그런 단서였다.

그러나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만으로 변화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왕위에 오른 조지 6세에게는 국민에게 말해야 하는 왕의 역할이 생겼다. 왕관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졌지만 그로 인해 부여된 책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또 다른 숙제였다. 존 피어스(Jon L. Pierce) 등이 정립한 심리적 주인의식은 특정 일이나 대상을 ‘내 것’이라고 느끼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왕위에 오른 것과 왕의 일을 자기 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조지 6세는 즉위 후, 피하고 싶었던 말하기를 왕으로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면서 심리적 주인의식을 갖췄다.

녹음된 목소리는 ‘나는 말할 수 없는 사람’ 이라는 알버트의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왕이 된 후에는 달라진 역할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고, 국민에게 말해야 하는 일을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이처럼 지속적인 성과를 위해서는 센스메이킹과 주인의식 모두가 필요하다. 센스메이킹으로 현실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해도 주인의식에 기반해 행동에 옮기지 못하거나, 반대로 주인의식으로 움직여도 센스메이킹을 통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성과 창출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1 공개 연설에서 말문이 막힌 알버트. /사진 와인스틴 컴퍼니 2 로그의 치료실에서 녹음하는 알버트. /사진 스피킹 필름 프로덕션  3 1939년 전쟁 방송에 나선 조지 6세. /사진 스피킹 필름 프로덕션
1 공개 연설에서 말문이 막힌 알버트. /사진 와인스틴 컴퍼니
2 로그의 치료실에서 녹음하는 알버트. /사진 스피킹 필름 프로덕션
3 1939년 전쟁 방송에 나선 조지 6세. /사진 스피킹 필름 프로덕션

정답을 고치며 계속 움직이는 기업들

넷플릭스는 DVD 우편 대여로 성장한 뒤 인터넷과 동영상 이용 환경의 변화를 읽고 2007년 스트리밍을 시작했다. 2011년에는 DVD 우편 대여 사업을 ‘퀵스터(Qwikster)’ 라는 별도 브랜드로 분리하려 했지만 고객 반발이 커지자, 처음 내린 결정을 고집하지 않고 계획을 철회했다. 이후 스트리밍을 계속 확대했고 오리지널 콘텐츠에 무게를 실었다. 2013년 공개된 ‘하우스 오브 카드’는 또 다른 전략적 전환이었다. 이처럼 넷플릭스는 서로 다른 시점마다 환경과 선택의 결과를 읽으며 답을 고쳐왔다.

조직 운영과 관련하여 넷플릭스가 강조하는 ‘통제가 아닌 맥락(Context, not Con-trol)’은 실제로 일을 맡은 사람이 판단하게 하는 방식이다. 상사는 모든 답을 정하기보다 구성원이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충분한 맥락을 공유한다. 중요한 결정은 판단을 맡을 사람을 정하고 여러 의견을 듣되 최종 선택은 그 사람이 하게 한다. 결과가 나오면 무엇이 맞았고 무엇이 틀렸는지도 돌아본다.

넷플릭스의 사업 역사와 조직 원칙은 한 지점에서 만난다. 달라진 상황을 읽어 답을 고치고, 판단을 맡은 사람이 직접 선택하며, 그 결과를 다시 다음 판단의 밑거름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도요타에서는 이상이 발생하면 작업자가 정지 신호를 보낼 수 있다. 라인 전체를 세울 권한이 현장에 있는 것이다. 라인 정지는 원인을 확인하고 같은 문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고친 뒤 작업을 이어가기 위한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이상을 문제의 신호로 읽는 센스메이킹과 그 문제를 자기 일로 받아들여 해결하는 주인의식이 결합되며 지속적인 개선이 이루어진다. 넷플릭스와 도요타는 규모도 속도도 다르지만 두 회사 모두 이미 가진 답으로 상황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새로운 신호를 읽고 누군가 판단해 움직이며, 그 결과를 다음 선택에 활용한다.

성공 공식을 지키는 것보다 어려운 일

1990년대 거스너가 추진한 통합 솔루션 전략은 IBM의 사업과 조직을 바꾸는 기준이 됐고 이후의 성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때 성공한 전략이 다음 변화에도 계속 적합한 것은 아니다. IBM이 지속적인 성과를 내려면 달라진 현실을 다시 해석하고, 그 속에서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여 실행해야 했다.

첫 공개 연설과 1939년 전쟁 방송에서 알버트는 같은 물건을 마주했다. 마이크다. 첫 연설에서는 말이 막혔다. 이후 그는 녹음을 통해 예상과 다른 자기 목소리를 들었고,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훈련을 이어갔다. 왕이 된 후에는 말하기의 달라진 의미까지 받아들였다. 그 결과 다시 마주한 마이크를 통해 국민에게 자기 목소리를 전할 수 있었다. 마이크는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자기 목소리를 새롭게 듣고, 그 앞에서 해야 할 말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