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주택정책이 규제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역대 진보 정권은 예외 없이 ‘집값을 잡겠다’는 구호 아래 수요 억제책을 쏟아냈고,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다. 노무현 정부가 그랬고 문재인 정부가 그랬다. 지금 정부는 그 실패의 문법을 반복하고 있다. 지방선거에서 서울 민심이 등을 돌리고 국정 지지율이 데드크로스를 지나 조기 레임덕까지 거론되는 배경에 규제 일변도의 부동산 정책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왜 실패는 반복되는가. 근본 원인은 하나다. 시장경제의 토대인 재산권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자산 증식 죄악시, 누적된 과잉 규제
첫째, 부동산을 통한 재산 증식 자체를 죄악으로 규정한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 조사에 따르면, 우리 가계 자산의 4분의 3가량이 부동산 등 실물 자산이다. 금융자산 비중이 70%에 이르는 미국과는 정반대다. 한국의 중산층에게 집은 곧 노후이자, 평생 저축의 결과물이다. 자기 자산이 불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남의 증식은 ‘불로소득’이고 내 증식은 ‘노후 대비’라는 이중 잣대는 위선일 뿐이다. 시장경제에서 국가의 기본 책무는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지, 축적된 재산을 세금의 이름으로 회수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우리 부동산 규제는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는 과잉 규제의 지층으로 쌓여 있다. 토지거래허가제는 본래 택지 확보가 어려운 대도시에서 알 박기와 지가 급등을 막아 주택 건설을 촉진하려던 공익적 제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토지가 아니라 아파트 한 채의 매매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돼 재산권 행사 자체를 봉쇄하고 있다.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른 비농민 농지 소유 단속도 마찬가지다. 헌법에 경자유전을 못 박고 이를 형벌로 강제하는 나라는 사실상 한국뿐이다. 농업이 기업화하고 토지 용도가 시장가치에 따라 결정될 때 생산성이 오르는데, 우리는 관료가 토지의 ‘최선의 용도’를 결정하고 소유자의 처분권을 박탈한다. 개발제한구역 역시 임야 소유주의 재산권을 온전한 보상 없이 반세기 넘게 제약해 왔다.
금융의 자유도 예외가 아니다. 주택 담보대출이 주택 구입만을 위한 대출인 것은 아니다. 차입자가 가장 유리한 조건의 자금을 찾고, 금융회사가 부도 위험이 적은 담보부 대출을 선호하는 것은 금융의 본질이다. 그런데 고가 주택 보유자의 담보대출을 사실상 금지하는 것은 소비자와 공급자 양쪽의 경제적 자유를 동시에 침해하는 자의적 규제의 극치다. 이미 한국의 LTV(주택담보대출비율)는 80~110%인 선진국보다 훨씬 낮았는데, 이를 40%까지 끌어내렸다.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의 DTI(총부채상환비율)가 500% 수준임을 감안하면 현금 없이는 거래하지 말라는 선언에 가깝다.
에르난도 데 소토는 ‘자본의 미스터리’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왜 개발도상국에서 작동하지 않는지를 물었다. 답은 그 나라 국민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재산권이 등기되지 않아 자산이 ‘죽은 자본’으로 남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재산권이 보호되는 사회에서 부동산은 담보가 되고, 담보는 금융이 되며, 금융은 투자와 일자리가 된다. 부유층의 담보대출 활용을 ‘불공정’으로 규정하는 인식은 금융의 본질과 재산권의 기능을 동시에 오해한 결과다.
주택 선택권과 거주 이전의 자유 그리고 '글로벌 표준'이라는 착시
셋째, 재개발 폄하와 비거주 1주택 중과세는 국민의 선택권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재개발은 가구 수를 늘리는 사업만이 아니라 주택의 품질을 시대에 맞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투자다. 우리 아파트에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00달러(약 42만원)이던 시절과 1700달러(약 240만원)이던 시절에 지어진 재고가 여전히 즐비하다. 3만달러(약 4240만원) 소득의 국민이 요구하는 주차 공간과 단열, 평면을 감당할 수 없는 주택이다. 소득이 오르면 주거의 기대 품질도 오른다는 것은 경제학의 상식이다.
비거주 1주택자에 대한 보유세 중과는 더 심각하다. 국민에게는 건강, 부모 돌봄, 자녀 교육, 직장 이동, 가족 구성의 변화 등 무수한 이유로 일시적 주거 수요가 발생한다. 보유한 집에 살지 않으면 세금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은 사정이 바뀔 때마다 집을 사고팔라는 요구와 같다. 취득세 등 거래 관련 세 부담이 세계 최고 수준인 나라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주택 선택권과 헌법상 거주 이전의 자유를 함께 옥죄는 결과가 된다. 1가구 1주택 원칙 역시 각자 집을 가진 남녀가 혼인하면 불이익을 주고, 돌봄이 필요한 가족을 위해 집을 따로 마련하면 처벌하는 반(反)가족 규제다.
넷째, 보유세 인상이 글로벌 표준이라는 주장은 절반의 진실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주민 발의 13호에 따라 과세표준을 취득 가격에 고정하고 연 2%를 넘겨 올리지 못하도록 한다. 가계가 세 부담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정부가 공시 가격 현실화율을 재량으로 조정해 시가 기준으로 과세한다. 법정 세율을 그대로 두고도 행정 재량만으로 세 부담을 배로 늘릴 수 있는 구조다. 게다가 강남 주민이 모두 고소득층인 것도 아니다. 청약이나미분양 물량을 통해 수십 년 전 입주해 그 자리에서 나이 들어온 사람이 많다.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이유로 보유세를 감당하지 못해 집을 팔고 원치 않는 곳으로 떠나라는 것은 조세가 아니라 축출이다.
"부동산 시장 안정이라는 공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이 성실한 국민의 재산권과 경제적 자유를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정부는 세금으로 집값을 잡겠다는 정치적 조급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당한 절차로 형성된 국민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다."
법의 지배인가, 법을 통한 지배인가
이 지점에서 문제는 경제를 넘어 법치로옮겨간다. 국민은 국가가 제시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장기 자산 계획을 세운다. 주택을 사고, 보유하고, 사정에 따라 임대를 놓은 선택은 모두 당대의 합법적 질서 아래 이뤄진 정당한 결정이었다. 과세 기준과 장기 보유 공제를 일거에 뒤엎는 것은 법을 믿고 따라온 국민의 정당한 기대를 배반하는 일이며, 헌법상 신뢰 보호의 원칙과 법적 안정성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일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참된 법치란 개인이 자기 미래를 스스로 계획할 수 있도록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국가가 세수나 정치적 표적을 위해 법의 형식을 빌려 특정 집단의 자산을 실질적으로 몰수한다면, 그것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을 통한 지배’다. 론 풀러가 말한 법의 내적 도덕성, 즉 공포(公布)와 안정성, 소급 금지, 이행 가능성이라는 기준에 비추어도 결함이 뚜렷하다.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지워 재산을 처분하도록 등을 떠미는 규범은 법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한다.
부동산 시장 안정이라는 공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이 성실한 국민의 재산권과 경제적 자유를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정교한 경과 규정도, 비례 원칙에 대한 고려도 없이 세제라는 칼자루를 휘두르는 것은 물리력을 쓰지 않았을 뿐 개인의 경제적 생존 기반을 흔드는 제도적 폭력이다. 시장은 이념을 강요받으면 반드시 반격한다.
국가가 국민의 신뢰를 잃는 순간 법의 권위도 함께 무너진다. 정부는 세금으로 집값을 잡겠다는 정치적 조급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당한 절차로 형성된 국민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