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라 골프클럽(Brora Golf Club·이하 브로라)은 소박했다. 너무 소박해서 처음에는 이곳이 왜 골퍼의 순례지가 됐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스코틀랜드 북부 하일랜드의 작은 마을과 목장 옆에 있는 오래된 링크스에 가까웠다.
브로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안내도 묘했다. 양 떼가 그린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울타리에 전기가 흐른다는 설명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브로라의 가장 독특한 특징인지도 몰랐다. 이 코스는 골프장이 자연을 밀어내고 들어선 곳이 아니라, 마을과 목장과 바다와 바람 사이에 골프장이 조용히 놓여 있는 곳이었다.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의 중심 도시 인버네스(Inverness)에서 북쪽을 향해 A9 해안 도로를 달리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정이다. 길은 점점 조용해지고, 북해의 풍경은 차창 가까이 다가온다.
하일랜드 골프의 성지로 불리는 로열 도녹(Royal Dornoch)에서 북쪽으로 30㎞ 남짓 더 차를 몰고 올라가면 브로라를 만난다. 스코틀랜드 골프의 오래된 모습과 자연스러운 링크스의 성격을 온전히 간직한 코스다.
도대체 어디로 쳐야 하는가
티박스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쳐야 하는가.
현대 골프장에 익숙한 눈으로 보면 브로라는 친절하지 않았다. 페어웨이는 또렷하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고, 랜딩 지점은 시야에서 자주 사라졌다. 벙커와 경사, 다음 샷의 방향을 한눈에 읽기 어려운 홀도 있었다.
바람은 계속 바뀌었고, 땅은 평평하지 않았다. 공은 좋은 샷처럼 보인 뒤에도 경사를 타고 예상 밖의 곳으로 흘러갔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몇 홀을 지나자, 그 불확실성이 이 코스의 중요한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로라는 골퍼에게 정답을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바람을 읽고, 땅의 굴곡을 받아들이고, 공을 하늘에 띄우는 것만이 아니라 지면에서 굴리는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치면 칠수록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소박해 보였지만, 라운드가 깊어질수록 링크스 골프의 본질이 드러나는 코스였다.
1923년의 설계 그대로
브로라의 역사는 18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코틀랜드 곳곳에 전통 링크스 코스가 자리 잡던 시기다.
브로라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습에 가까워진 것은 1923년이다. 디 오픈 챔피언십(The Open Championship)을 다섯 차례 제패한 위대한 골퍼이자 코스 설계가 제임스 브레이드(James Braid)가 브로라를 다시 설계했다.
브레이드는 해안의 굴곡과 자연 지형을 살려 코스를 정리했다. 모래언덕과 해안선, 출렁이는 페어웨이, 자연스러운 경사를 과도하게 깎아내기보다는 링크스가 지닌 원래의 성격을 살리는 쪽에 가까웠다.
놀라운 사실은 1923년 브레이드의 설계가 완성된 이후 이 코스의 레이아웃이 지금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적 순수성 덕분에 브로라는 오늘날 전 세계 ‘제임스브레이드협회(James Braid Society)’의 본부로서 그 철학과 유산을 기리는 고향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적인 중장비가 깎아낸 인공적인 코스에 지친 골퍼에게 브로라는 1920년대 스코틀랜드 골퍼가 마주했던 지형과 샷의 가치를 거의 그대로 경험하게 해주는 ‘살아 있는 타임머신’ 과도 같다.
위대한 챔피언이 남긴 평가
브로라의 진정한 가치는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챔피언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5승을 거두며 링크스 골프의 일인자로 불렸던 피터 톰슨(Peter Thomson)은 브로라를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링크스 코스 중 하나”라며 ‘전 세계 최애 코스’로 꼽았다.
마찬가지로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5번이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미국의 전설톰 왓슨(Tom Watson) 역시 브로라의 거친 매력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브로라에서 라운드를 마친 뒤 “브로라는 정말 훌륭한 링크스 코스다. 나는 이곳에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반드시 다시 플레이하고 싶고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 정말 훌륭하다”는 취지의 찬사를 남겼다. 세계 최고의 무대를 휩쓸었던 전설적인 챔피언조차 브로라 앞에서는 겸손해졌고, 동시에 그 자연스러운 도전을 진심으로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브로라의 18홀 레이아웃은 골퍼의 기량은 물론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을 시험한다.
이곳의 가장 눈에 띄는 지형적 특징은 전반 9홀의 구조에 있다. 전통적인 링크스 코스가 거대한 사구 사이에 파묻혀 바다의 시야가 가려지는 경우가 많은 반면, 브로라의 첫 9개 홀은 북해(North Sea) 해안선을 따라 바다와 가깝게 이어지면서도 시야를 가리는 모래언덕이 거의 없다.
덕분에 골퍼는 티박스에 서는 순간부터 광활한 바다의 파노라마 뷰를 마주하고 샷을 날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시야에는 대가가 따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북해의 바람을 막아줄 언덕이 많지 않기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골퍼는 대자연과 정면으로 맞서며 스코어카드를 지켜야 한다.
그린을 직접 공략하기보다 낮게 굴려 보내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페어웨이 한가운데를 보고 쳤는데도 공은 경사를 타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브로라는 링크스 골프가 왜 공중전만이 아니라 지상전인지 잘 보여준다.
클럽하우스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돌아오는 후반 9홀에서는 브레이드 설계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자연의 굴곡이 골퍼를 맞이한다. 인위적으로 평탄하게 다진 페어웨이는 거의 없으며, 파도치는 듯한 지면에서 공이 불규칙하게 튀어 오른다.
방문객은 브로라의 파3 홀에 대해 “각기 다른 방향과 다른 길이어서 완벽하고 훌륭한 세트”를 이룬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바람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는 환경에서 이 정교한 파3 홀은 매번 다른 클럽과 다른 탄도의 샷 메이킹을 요구하며 두뇌 플레이의 즐거움을 극대화한다.
진짜 골프라는 오래된 질문
브로라에 오기 전부터 기대한 장면이 있었다. 페어웨이 위를 걸어 다니는 양 떼였다.
스코틀랜드 링크스를 이야기할 때 양은 단순한 풍경 이상이다. 골프와 목축이 같은 땅에 공존해 온 오랜 시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브로라의 전기 울타리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는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라운드한 날, 양 떼는 코스 에 있지 않았다. 대신 골프장 건너편 목장에 모여 있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그 장면도 브로라의 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양이 반드시 페어웨이 한가운데 있어야만 브로라다운 것은 아니다. 코스 너머 목장에 양이 있고, 그 옆으로 바다가 있으며, 그 사이에서 골퍼가 바람을 맞으며 공을 치는 것. 그 전체가 브로라의 풍경이었다.
브로라는 목장을 흉내 낸 골프장이 아니다. 목장과 마을과 해안의 삶 속에 골프가 함께 놓여 있는 코스다.
북해의 짭조름한 바닷바람, 한 점의 가림막 없이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100년 전 브레이드가 빚어놓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굽이치는 페어웨이 위에서 문득 깨닫는다. 하일랜드 북쪽 끝자락에 숨겨진 브로라에서의 18홀은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짜 골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