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섬 와인 세미나(Island Wine Summit)’에 참석차 테네리페를 다녀왔다. 테네리페는 모로코 서쪽에 있는 대서양의 카나리아제도(이하 카나리아)에 속한 섬이다. 난생처음 밟아 본 그곳은 꿈에 그리던 휴양지 그 자체였다. 연중 온화한 아열대 기후, 야자수가 늘어선 해변, 그 뒤로 우뚝 솟은 테이데 화산. 짧은 일정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휴양지에서 와인 세미나가 열렸을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카나리아제도는 와인 역사가 500년이 넘는 유럽에서도 가장 독특한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카나리아에 유럽인이 발을 들인 것은 1402년 탐험가 장 드 베텐쿠르가 란사로테섬을 정복하면서부터다. 이후 스페인이 나머지 섬을 차례로 굴복시켰고, 1496년 테네리페 점령을 끝으로 카나리아는 완전히 스페인 영토가 됐다. 정복 직후 이곳의 주력 산업은 사탕수수였다. 당시는 설탕이 고가의 사치품이었고 섬이 신대륙과 유럽을 잇는 길목에 있으니 그야말로 고수익 작물이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카리브해의 섬들이 대규모로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하자 카나리아는 조연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설탕이 떠난 자리에서 태어난 와인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와인이었다. 설탕 사업을 좇아 유럽 각지에서 온 이주민이 각자의 고향에서 가져온 포도나무가 기반이 됐다. 초창기 와인은 달콤한 스위트 와인이었다. 말바시아 아로마티카(Malvas a Arom tica)로 만든 이 와인은 알코올 도수와 당도가 높아 긴 항해를 너끈히 견뎠다. 인기가 상당했는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도 ‘카나리 와인’이라는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이 번영도 길지 않았다.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며 영국과 관계가 악화되자, 와인 수출이 큰 타격을 입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1706년에는 화산이 분화해 테네리페 최대 항구였던 가라치코를 덮쳤다. 가장 큰 시장을 잃고 항구마저 무너진 셈이다. 그런데 신이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쪽 창을 열어 주신다고 했던가?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됐다. 가라치코를 대신해 산타크루스 데 테네리페가 새로운 항구로 떠올랐고, 오랜 부침 끝에 카나리아 와인도 스위트 와인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스타일로 외연을 넓혀 갔다.
카나리아 와인은 요즘 전 세계 와인 애호가 사이에서 뜨거운 관심사다. 은은한 허브향, 화산 토양 특유의 훈연 향, 날카로운 미네랄리티가 그 어떤 곳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품질을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화산섬이라 가파른 곳이 많아 비탈을 계단식 밭으로 다듬어야 겨우 포도를 심을 수 있다. 트랙터는 언감생심, 대부분의 일을 사람의 손으로 해내야 한다.
기후도 섬마다 제각각이다. 심지어 같은 섬에서도 위치마다 날씨가 달라 포도 재배 방식도 밭마다 다르다. 바람이 세고 건조하며 서늘한 곳에서는 포도나뭇가지를 길게 늘어뜨려 땅에 가깝게 기른다. 강풍을 피하고 땅의 습기와 지열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한편 고대 로마인도 비가 귀한 땅으로 여겼던 란사로테섬에서는 밤새 맺힌 이슬을 모을 수 있도록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포도를 심는다. 가장자리 한편에는 낮은 돌담을 쌓아 포도나무를 바람으로부터 막아낸다.
불리한 조건이 만든 중독성 있는 맛
그렇다고 불리한 조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뜻밖에도 고립은 축복이었다. 전 세계 포도밭을 휩쓴 필록세라 해충을 피했기 때문이다. 망망대해라는 지리적 장벽과 진흙이 거의 없는 화산 토양이라는 점이 두 겹의 방패가 되어 준 것이다.
그 결과 수령이 100년 넘는 포도나무가 섬 곳곳에 살아남아 풍미의 깊이가 남다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바람이 많고 건조한 날씨는 유기농 재배에 유리하다. 문제는 하나. 건강한 포도로 만든 우수한 와인이지만 노동력이 곱절로 드니 가격이 만만치 않다.
카나리아에는 무려 80종이 넘는 포도가 자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리스탄 블랑코(List n Blanco)와 리스탄 네그로(List n Negro)다. 리스탄 블랑코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셰리(Sherry) 와인을 만드는 팔로미노(Palomino)와 같은 품종이다. 본토에서는 개성이 강하지 않고 중성적이라는 평을 듣지만, 카나리아에서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말린 오렌지, 구아버, 레몬 향이 감미롭고 훈연 향이 은은하며 매끈한 질감과 높은 산도가 와인에 경쾌함을 부여한다. 여운에서 길게 이어지는 배 향과 짭짤한 미네랄리티는 풍미에 감칠맛을 더한다.
리스탄 네그로로 만든 레드 와인은 크랜베리, 산딸기, 체리, 자두 등 베리 향이 싱그럽고, 훈연, 재스민, 허브 향이 화사함을 보탠다. 보디감은 가볍지만 매끈한 타닌이 와인의 골격을 형성한다. 한 모금 머금으면 신선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레드든 화이트든 이 와인에는 공통점이 있다. 진한 과일 향을 앞세우는 여타 와인과 달리 해풍을 맞고 자란 포도의 짭조름함과 화산 토양의 스모키함이 낮은 목소리로 묘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것. 잔을 기울일 때마다 드넓은 대서양의 아름다운 화산섬이 입안에서 펼쳐진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 와인 애호가가 카나리아에 빠지는 이유다.
아쉽게도 카나리아 와인은 아직 국내에 수입되는 물량이 많지 않다. 생산량이 워낙 적은 데다 대부분 스페인 등 유럽에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나리아나 스페인을 여행한다면 반드시 마셔 보기를 권한다. 파에야, 생선 요리, 하몽, 치즈 등에 곁들이면 진가가 더욱 살아나기 때문이다. 강렬하지는 않아도 은근히 중독성 있는 맛. 세미나가 끝나고 로컬 와이너리에서 맛본 한 잔이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