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느낄 때 불안을 견딘다. 반대로 규칙이 자주 바뀌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으면 통제감이 약해진다. 사진은 서울 시내 공인중개사무소에 붙은 전월세 매물 안내문. /사진 뉴스1
사람은 자기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느낄 때 불안을 견딘다. 반대로 규칙이 자주 바뀌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으면 통제감이 약해진다. 사진은 서울 시내 공인중개사무소에 붙은 전월세 매물 안내문. /사진 뉴스1

여러 해 전 학생과 선생으로 인연을 맺은 20대 후반의 대학생 A는 지금은 괜찮은 회사의 직장인이 되었다. 경기도 외곽의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A는 서울에 집을 구할 여력이 없다. 대학 시절 받은 학자금 대출을 갚고 병든 부모 병원비를 대기도 바쁘다. 그는 서울로 출퇴근하며 하루의 상당 부분을 길에서 보낸다. 직장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현재 A의 위치와 미래의 A가 바라는 삶 사이의 거리와 같다. 그의 삶은 오늘날 2030 세대의 주거 심리를 가장 섬세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았던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삼남매의 그것을 빼닮았다. 청년에게 집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한국 사회에서 성인으로의 독립을 상징하는 가장 현실적인 증거가 바로 ‘내 집’이다. 부모의 집을 나와 자기 이름으로 임대차계약서를 쓰는 순간, 청년은 단순히 주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나도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다’ 라는 자기 효능감을 경험한다. 그래서 전셋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다. 성인이 되었다는 통과의례이며, 결혼과 가정을 준비할 수 있다는 사회적 승인이다. 월세도 독립의 방식이지만 심리적 느낌은 다르다. 월세는 매달 사라지는 돈으로 느껴지고, 전세보증금은 언젠가 되돌아올 돈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청년에게 월세는 단순한 주거비가 아니라 ‘내 자산이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이 되고, 전세는 목돈을 빌리더라도 ‘내 돈을 보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심리적 안정감과 실제 안전이 늘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전세 대출 확대는 많은 청년에게 주거 선택의 기회를 넓혀주었다. 하지만 금리와 유동성, 공급과 수요, 금융 환경 변화가 겹치면서 전세 시장의 위험도 커졌다. 이후 역전세와 전세 사기, 보증금 반환 문제 등을 경험한 청년에게 집은 어느 순간 안전의 공간이 아니라 불안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 특정 정권의 특정 정책을 단순한 원인으로 규정하여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이 주목하는 것은 사람이 그 과정을 어떻게 경험했는가다.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통제감 잃은 시대, 아파트라는 신분증

사람은 자기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느낄 때 불안을 견딘다. 반대로 규칙이 자주 바뀌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으면 통제감이 약해진다. 통제감을 잃은 사람은 미래를 설계하기보다 현재의 위험을 피하는 데 집중한다. 주거 문제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높은 집값 자체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감각이 더 무서운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왜 많은 청년은 그토록 아파트를 원할까.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안정이고, 성공이고, 계층 상승이며, 교육이고, 결혼이고, 미래다. ‘나는 어느 아파트에 산다.’ 이 한 문장이 때로는 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설명하는 명함처럼 작동한다. 물론 아파트가 상대적으로 더 편리하고 안전하며 생활 환경이 좋다. 그러나 아파트에는 그것 이상의 사회적 상징이 붙어 있다. 집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때때로 ‘나도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되는 것이다. 

소셜미디어(SNS)는 이 욕망을 더욱 증폭시킨다. 친구의 청약 당첨, 동기의 신혼집, 누군가의 새 아파트 거실 사진이 매일 스마트폰으로 들어온다. 전국의 또래가 비교 대상이 된다. 내가 어제보다 나아졌는지가 기준이 아니라, 내가 친구보다 뒤처졌는지가 기준이다. 그래서 빌라에서 원룸으로, 원룸에서 아파트로, 수도권에서 더 좋은 지역으로 목표가 이동한다. 집을 얻으면 욕망이 끝날까? 아니다. 새로운 비교가 시작된다. 욕망은 집보다 크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생존' 아닌 '존엄'

최근 문체부 장관을 지낸 바 있는 여당의 황 모 의원이 폐기되는 버스를 리모델링해 대학가 청년의 단기 주거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이른바 ‘버스하우스’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가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폐버스를 활용해 저렴한 임시 주거를 제공하자는 취지였지만 반발은 거셌다. 그는 게시물을 삭제하고 개인적인 아이디어였다고 해명 후 사과했다. 아이디어의 경제성이나 실현 가능성 유무는 별도의 문제다. 문제는 황 의원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정치인이 청년의 심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버스에서 해답을 찾는 황 의원은 도대체 왜 2030이 저토록 분노하는지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다. 본질은 ‘버스’에 있지 않다. 청년이 느낀 것은 주거의 부족을 넘어 존엄의 부족이기 때문이다. 청년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잠잘 곳이 아니다. 친구도 초대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즉 청년이 원하는 것은 ‘생존할 공간’이 아니라 ‘살아갈 공간’이다. 

정책 제안자의 의도는 자원 재활용과 신속한 임시 주거 공급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책은 의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수용자의 마음속에서 어떤 의미로 번역되는가도 중요하다. ‘집을 구하기 어렵다면 버스에서라도 살아라’ 청년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순간, 정책 아이디어는 주거 대책을 넘어 세대적 모욕감의 상징이 된다. 그들은 이렇게 묻게 된다. ‘우리는 언제부터 ‘사는 곳’이 아니라 ‘버티는 곳’을 요구받게 되었을까?’

공간 넘어 미래에 대한 신뢰 공급해야

융 심리학에서 집은 자아(self)의 중요한 상징이다. 꿈속의 집은 종종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집이 무너지면 내가 흔들리고, 새로운 집을 얻으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 에이브러햄 매슬로 역시 안전 욕구가 충족되어야 인간은 사랑과 성취, 자아실현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집이 불안하면 미래도 불안해진다.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고민하고, 장기 계획을 포기하는 현상을 단순히 경제적 계산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내일도 이곳에서 살 수 있다’는 감각이 있어야 사람은 ‘10년 뒤의 나’를 상상할 수 있다. 결국 좋은 주거 정책은 집만 공급하는 정책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신뢰를 공급하는 정책이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 비싼 아파트도, 무제한의 대출도, 임시방편적인 잠자리도 아니다. 예측 가능한 규칙과 안정적인 주거 사다리 그리고 노력하면 자기 삶을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다시 ‘나의 해방일지’로 돌아가 보자. 남매가 진정 원했던 것은 강남의 고급 아파트가아니었다. 출퇴근에 빼앗기는 시간을 되찾아, 저녁이 있는 삶을 원했던 것이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결국 집값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러므로 청년 주거 정책의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몇 평을 제공할 것인가?’ ‘얼마나 싸게 공급할 것인가?’ 같은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 공간에서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얼마나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가?’ 집은 벽돌과 철근으로 지어진다. 그러나 보금자리는 신뢰로 완성된다. 신뢰가 있으면 작은 방 하나도 희망의 출발점이 되지만, 신뢰가 무너지면 가장 비싼 아파트도 불안의 성이 된다. 언젠가 청년이 아파트 시세보다 저녁노을을 먼저 바라보고, 대출 한도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을 먼저 이야기하며, 계약서 도장보다 아이의 웃음소리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날이 오면 ‘나의 해방일지’ 는 더 이상 오늘의 현실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한 시대의 추억이 될 것이다. 

청년에게 희망의 사다리를 놓아주기는커녕, 있는 사다리마저 걷어차 버리는 내로남불 정치인. 자기는 강남에 있는 수십억원대 아파트에 살면서 청년에게는 폐기된 버스를 고쳐 살라는 정치권의 무능과 파렴치함에 절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버스 한 대가 아니야! 자기 인생을 싣고 어디로 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삶이라고!” 우리 사회가 청년에게 해주어야 할 가장 큰 주거 정책은 집 한 채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말은 이런 말 아닐까? “네가 이곳에서 살아도 괜찮다. 내일을 꿈꾸어도 괜찮다.” 

김진국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