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영 광운대 산업심리학 교수 - 미국 뉴욕주립대 산업조직심리 박사, 현 삼성전자 자문 교수, 전 산업및조직심리학회 회장
한태영 광운대 산업심리학 교수 - 미국 뉴욕주립대 산업조직심리 박사, 현 삼성전자 자문 교수, 전 산업및조직심리학회 회장

미국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흑인 지역 중심가에 붉은 벽돌의 나지막한 기념관이 있다. 주인공인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인근 침례교회에서 활동했다. 그는 워싱턴 D.C. 한복판으로 올라와 꿈에 대한 연설로 차별의 역사를 바꿨다. 애초에 킹 목사가 준비한 연설은 성난 군중이 냉정을 찾도록 호소하는 합리적인 메시지였다. 연설 도중 그를 좋아하는 가스펠 가수가 ‘꿈 이야기를 해줘요, 마틴!’이라고 외치자,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로 즉흥적으로 바꿨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꿈은 당연히 비유다. 지난밤에 꾼 꿈이 아니다. 내일 꾸고 싶은 꿈이다. 막연한 바람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미래에 보게 될 실상, 비전이다. 그래서 믿음 없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리더의 비전은 구성원이 믿는 지점에서 보이게 된다. 

비전 메시지는 구성원에게 ‘유능함’과 ‘따뜻함(청중과의 공감 능력)’의 차원에서 전달된다. 이 두 속성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기본 축이다. 유능한 리더가 따뜻하기도 하면 좋겠지만, 스티브 잡스처럼 차가운 경우가 더 많다. 킹 목사의 연설은 리더의 ‘따뜻함’이라는 축이 실제 역사적 순간에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따뜻함이란 특정 집단에 제한되지 않고 퍼지기 때문이다. 

그런 리더의 비전을 인공지능(AI)이 대신하면 어떨까. 독일의 한 심리학 연구를 보면, 서열 2위인 AI를 통해 비전을 전달하면 구성원은 그 리더를 더 유능하다고 인식한다.  

AI가 만든 비전도 동기 부여가 된다는 거다. 심지어 그 비전을 AI가 만든 것이라 믿을 때 효과가 더 강했다. 하지만 AI의 비전은 리더의 따뜻함에 대한 인식을 낮추고, 진정성을 통한 동기부여의 힘을 줄였다. 이 부정적 효과는 ‘원래 사람이 만든 비전인데 전달만 AI에 아웃소싱했다’고 구성원이 믿을 때 특히 심했다. 즉, 본인 말을 본인 입으로 하지 않았다는 인상이 배신감처럼 작용했다. 

1964년 12월 4일(현지시각) 뉴욕에서 열린 기자회견
에서 마틴 루서 킹 박사가 그해 여름 미시시피주에
서 살해된 민권 운동가 세 명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AP연합
1964년 12월 4일(현지시각) 뉴욕에서 열린 기자회견 에서 마틴 루서 킹 박사가 그해 여름 미시시피주에 서 살해된 민권 운동가 세 명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AP연합

킹 목사의 연설을 AI가 만들고 전달했다면 어땠을까. 유능해 보였을지는 몰라도 그 순간 청중을 움직인 ‘진짜 이 사람의 진심’이라는 힘은 없었을 게다. 킹 목사의 연설이 사람을 움직인 힘은 대본에 없던 즉흥성, 흑인으로서 차별을 몸소 겪은 공감대, 청중의 외침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교감, 목소리의 떨림 같은 것이었다. 이런 요소는 정의상 각본으로 만들기 어렵다. 사전에 생성된 AI의 표현으로는 재현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그렇다면 AI가 아닌 인간 이인자는 리더의 비전을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모세가 자기는 말이 어눌하다며 리더가 되기를 거부할 때, 신(神)은 모세의 형인 아론을 그의 ‘입’으로 세워 대신 백성과 파라오에게 말하게 한다. 모세의 메시지(비전)를 아론이 전달한다는 구도가 비슷하다. 그러나 AI 참모와 달리, 아론은 모세가 없을 때는 구성원에게 반응하는 또 하나의 인격체였다. 이인자이자, 동시에 리더로 인식되는 사회적 위치였기 때문에 그는 ‘유능함’과 ‘따뜻함’을 함께 갖출 수 있었다. 리더-팔로어 관계망의 매개 노드(brokering node)로서, 선(線)을 넘을 수 있는 존재였던 셈이다.  

이 선은 좋은 팔로어가 실패하는 지점이되기도 한다. 매개자는 한순간 양쪽 모두에게 주변인으로 배척될 수 있다. 이인자의 따뜻함은 이 운명에 도전하는 용기에 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고 자리를 비웠을 때 백성은 금송아지를 숭배했다. 아론은 백성에게 “안 된다”고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미움받을 용기는 이런 때 필요하다. 현실에서는 한패(牌)일 때 그게 어렵다. 조직에 다양성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한태영 광운대 산업심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