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동북부 해안에 자리한 애버딘(Aberdeen)은 7~8세기부터 역사가 이어져 온 고도다. 18세기 이후 도시 곳곳에 화강암 건물이 들어서면서 ‘화강암의 도시’라는 별명도 얻었다.
북위 57도에 있지만, 여름은 선선하고 겨울도 위도에 비해 비교적 온화하다. 북해와 맞닿은 해안에는 오랜 세월 모래가 쌓였고, 바람은 쉬지 않고 불어왔다. 모래 토양과 해풍은 전통적인 링크스 코스가 만들어지기에 좋은 조건이다.
애버딘셔 해안에 있는 크루덴 베이 골프클럽(Cruden Bay Golf Club·이하 크루덴 베이)은 그런 자연이 빚어낸 대표적인 코스다. 애버딘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약 37㎞, 항구도시 피터헤드에서는 남쪽으로 13㎞ 떨어져 있다. 세인트앤드루스에서도 자동차로 2시간가량이면 닿는다.
크루덴 베이에 도착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구(모래언덕)였다. 보통 링크스에서 볼 수 있는 낮고 완만한 사구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일랜드 서부 해안의 링크스처럼 크고 풍만한 사구가 코스를 감싸고 있었다. 페어웨이는 그 사이를 굽이치며 들어갔다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골프장이라기보다 거대한 자연 놀이동산 같았다. 사구를 넘으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좁은 골짜기를 빠져나가면 북해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다음 홀에서 무엇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때로는 당황스럽고 엉뚱했지만,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크루덴 베이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스다. 그런데도 라운드를 마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여전히 과소평가된 코스가 아닐까.
1791년부터 이어진 골프의 흔적
크루덴 베이 지역에서 골프가 시작된 역사는 생각보다 깊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1791년부터 골프가 행해졌다고 전해진다. ‘크루덴 베이 골프클럽’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투표함(ballot box)이 초기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로 남아 있다.
오늘날 챔피언십 코스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1894년 스코틀랜드 북부철도회사(Great North of Scotland Rail-way)는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해안에 대규모 호텔과 골프장을 조성하기로 했다. 당시 영국의 철도 회사는 노선 주변에 호텔과 골프장을 세워 여행 수요를 늘리곤 했다.
설계에는 ‘골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올드 톰 모리스(Old Tom Morris)와 아치 심프슨(Archie Simpson)이 참여했다. 1897년 첫 9홀이 문을 열었고, 1899년에 18홀 코스가 완성됐다.
개장 기념으로 이틀간 열린 대회에서는 해리 바든(Harry Vardon)이 제임스 브레이드(James Braid), 벤 세이어스(Ben Sayers), 아치 심프슨 등 당대의 강자를 물리치고 우승했다. 해리 바든은 골프가 국제적인 프로 스포츠로 성장하던 시대를 대표한 선수다. 저지섬 출신인 그는 디오픈에서 여섯 차례 우승해 지금도 대회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00년에는 US오픈 정상에도 올랐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오버래핑 그립을 ‘바든 그립’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의 영향력 때문이다.
바든과 브레이드 같은 선수가 개장 대회에 출전했다는 사실은 당시 크루덴 베이에 얼마나 큰 기대가 모였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로 치면 새 골프장 개장 행사에 세계 정상급 메이저 챔피언이 한꺼번에 참가한 셈이다.
1926년에는 톰 심프슨(Tom Simpson)과 허버트 파울러(Herbert Fowler)가 재설계를 맡았다. 기존 코스의 흐름과 주요 홀은 살리면서 전장을 늘리고 전략성을 보완했다. 오늘날 크루덴 베이의 기본 골격은 이때 완성됐다.
새벽 2시, 펍에서 살아남은 골프장
크루덴 베이 역사에는 영화 같은 장면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코스는 군에 징발됐다. 전쟁이 끝난 뒤 군대가 철수했지만, 골프장과 호텔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피터헤드의 분홍빛 화강암으로 지었던 호화로운 크루덴 베이 호텔은 복구되지 못하고 1952년 철거됐다. 골프장도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지역 주식 중개인 퀸틴 머레이(Quintin Murray)였다. 1950년 머레이는 철거 업체 대리인과 ‘킬마녹 암스’라는 펍에서 오전 2시까지 협상을 벌인 끝에 2750파운드에 코스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세계적인 링크스 하나가 오전 2시, 스코틀랜드의 작은 펍에서 살아남은 셈이다.
드라큘라가 바라보는 링크스
코스를 걷다 보면 북쪽 해안 절벽 위에 폐허가 된 슬레인스 성(Slains Castle)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가 소설 ‘드라큘라’를 구상하는 데 영감받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바다 위 절벽에 남은 성의 실루엣은 크루덴 베이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린다.
안개가 내려앉고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코스 표정은 더욱 기묘해진다. 공이 예상과 전혀 다른 쪽으로 밀려갈 때면 드라큘라의 심술이라고 농담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골퍼를 괴롭히는 것은 북해의 바람이다. 바람은 사구에 막혔다가 골짜기를 따라 휘돌고, 열린 해안에서는 갑자기 힘을 키운다. 티잉 구역에서 느낀 방향과 공중에서 작용하는 방향이 다를 때도 있다.
크루덴 베이에서는 거리보다 판단이 중요하다. 높이 띄울 것인가, 낮게 굴릴 것인가. 사구를 넘길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바람에 맞설 것인가, 이용할 것인가. 샷을 할 때마다 선택해야 한다.
유명하지만 여전히 과소평가된 코스
크루덴 베이 챔피언십 코스는 파70이다. 티잉 구역에 따라 전장은 달라지지만, 현대의 챔피언십 코스처럼 압도적으로 길지는 않다. 그렇다고 쉬운 코스는 아니다. 비거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티샷을 어느 각도로 보내느냐에 따라 다음 샷의 난도가 달라지고, 보이지 않는 지형과 바람까지 계산해야 한다.
현대 골프는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거리 측정기로 수치를 확인하고 코스 안내 책자에서 낙하지점을 살핀다. 크루덴 베이는 그 불확실성을 다시 골프 안으로 끌어들인다. 피트 다이(Pete Dye)와 톰 도크(Tom Doak) 같은 세계적인 설계가가 이 코스를 좋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러 골프 전문 매체는 크루덴 베이를 세계 100대 코스로 꾸준히 선정해 왔고,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가장 재미있는 코스 가운데 하나로 평가했다.
세계적인 명문 코스는 대개 장엄함과 역사성, 전략적 완성도로 평가받는다. 크루덴 베이에는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웃음이다.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공을 날리고, 사구 너머에서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난다.잘 치면 신나고, 잘못 쳐도 이상하게 웃음이 난다. 이런 코스가 얼마나 될까.
27홀과 언덕 위 클럽하우스
크루덴 베이에는 챔피언십 코스 외에 9홀 세인트 올라프(St. Olaf) 코스도 있다. 파32, 약 2463야드 규모로 라운드 전후 가볍게 즐길 수 있다.
라운드를 마친 뒤 언덕 위 클럽하우스로 올라가면 코스와 북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넓은 창밖으로 조금 전 걸었던 사구와 페어웨이가 펼쳐진다. 코스에서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사구가 위에서 보면 부드러운 파도처럼 이어져 있다. 라운드 중에는 길을 잃은 듯했지만, 클럽하우스에 앉아 내려다보면 그 혼란까지 하나의 거대한 설계처럼 보인다.
스코틀랜드 에일 한 잔을 앞에 놓고 바다를 바라보면 크루덴 베이가 왜 오랫동안 기억되는지 알게 된다.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코스와 씨름했던 순간, 공이 사라졌던 장면, 뜻밖의 바운드에 웃었던 기억이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거대한 사구 사이를 걷다 보면 골프가 스포츠 이전에 놀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공 하나를 들고 자연을 돌아다니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되돌려주는 곳이다. 가장 순수하고 자유로운 형태의 스코틀랜드 링크스를 만나고 싶다면, 크루덴 베이는 훌륭한 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