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데려가면서 트로이전쟁이 발발한다. 왕비를 되찾기 위해 진군한 그리스 연합군은 견고한 성벽에 가로막혀 10년 동안 트로이를 함락하지 못한다. 결국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거대한 목마를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공물로 위장하고 군대를 철수한 것처럼 꾸민다. 트로이군은 이를 신성한 봉헌물로 믿고 성안으로 들인다. 어둠이 내리자 목마 속 정예병이 빠져나와 성문을 열고,대기하던 연합군이 물 밀듯 쏟아져 들어온다. 10년간 쌓인 분노는 광기로 돌변하고, 도시는 하룻밤 사이 폐허가 된다.
오디세우스에게 남은 일은 부하를 이끌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하는 트로이에서 에게해를 지나 그리스 서쪽의 이타카까지는 순조롭다면 열흘 안팎에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분노와 인간의 나약함이 얽히며 그의 귀환은 다시 10년 후로 미뤄진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영화 ‘오디세이’에서 이 기나긴 여정과 종착지 이타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신화의 장막 뒤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현실의 물성과 시간 속에 되살린다.
이야기 속 이야기… 끊임없이 출렁이는 서사
오디세우스 일행의 항해는 장소와 사건이 뚜렷이 구별되는 여러 이야기로 구성된다. 작은 섬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군도 같은 구조다. 한 섬에서는 식량을 찾아 들어간 동굴에서 외눈박이 괴물과 마주쳐 가까스로 탈출하고, 또 다른 섬에서는 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거인족의 공격으로 많은 병사를 잃은 채 기함 한 척만 간신히 빠져나온다. 마녀 키르케는 부하를 돼지로 바꾸고, 망자의 해안에서는 묻히지 못한 병사의 원혼과 마주한다. 죽음으로 유혹하는 세이렌의 노래와 카리브디스의 소용돌이, 머리가 여섯 달린 바다 괴물 스킬라를 거치며 일행은 점차 줄어든다. 태양신의 섬에서 굶주린 병사가 신의 소를 잡아먹자 진노의 폭풍이 배를 부수고, 오디세우스만 홀로 남아 표류한다. 그는 자기에게 반한 여신 칼립소의 섬에서 7년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이타카로 돌아온다.
바다를 공통의 무대로 삼는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스펙터클을 펼치면서도 하나의 흔들리지 않는 목표로 수렴한다. 그것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고향’, 곧 이타카로의 귀환이다. 그러나 영화는 플롯의 선형적 배열을 비틀고, 귀환하는 자의 내적 변화와 그를 기다리는 장소의 외적 변화를 포개며 회귀의 서사를 끊임없이 출렁이게 한다.
영화는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섬에 머무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회상 속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이야기는 비선형적으로 전개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구전돼 온 이야기의 집성에 가깝듯, 오디세우스를 둘러싼 기억 역시 단일한 목소리로 제시되지 않는다. 아내 페넬로페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등 주변 인물의 진술이 더해지며, 영화는 서로 다른 관점과 시간을 끊임없이 뒤섞는다.
오디세우스는 화평의 상징으로 위장한 목마로 트로이군을 속이고, 시민을 학살했으며, 자기 역시 숭배하던 아테나의 신상마저 파괴했다. 승리를 위해 인간 사이의 신의와 신 앞의 금기를 저버렸다는 죄책감이 그를 옭아맨다. 20년 동안 변한 것은 그의 내면만이 아니다. 이타카 역시 부와 왕권을 노리는 구혼자의 횡포로 피폐해져 있다. 그들에게 복수한 오디세우스는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다시 서쪽으로 떠난다. 죽은 부하를 추모하고 스스로를 유배하기 위해서다. 이타카는 더 이상 귀환의 종착점이 아니다. 또 다른 여정의 출발점이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 회귀의 의미를 뒤집으며 닫힐 듯했던 서사를 다시 바다로 밀어낸다.
예술에 맞춰 유동하는 공연장
영화는 군도처럼 펼쳐진 이야기에 맞춰 카메라 위치와 구도를 달리하며 관객을 상황 속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은 깎아지른 절벽 위의 인물을 내려다보다가도, 어느새 수평선 가까이 내려와 그를 비껴 바라보고, 이내 긴장의 한복판에서 사건을 지켜보는 목격자가 된다. 좌석과 스크린은 고정되어 있지만, 카메라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관객과 이야기 사이의 거리를 조율한다.
연극, 무용, 음악처럼 관객 앞에서 실제로 펼쳐지는 공연에서는 이 관계를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까. 공연마다 요구하는 무대의 형식과 관객의 위치가 다르다면, 그 관계를 담는 공간 역시 유동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202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부지에 완공된 페렐만 공연예술센터(이하 공연예술센터)는 이러한 질문을 건축으로 풀어낸다. 예술을 고정된 공연장에 끼워 맞추는 대신, 예술의 형식에 맞춰 공간 자체를 변화시키며 관객과 무대의 관계를 스스로 정한다.
조슈아 라무스가 이끄는 REX가 설계한 공연예술센터에는 499석, 250석, 99석 규모의 공연장 세 곳이 같은 층에 L 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공연장이 맞닿는 면에는 위아래로 열고 닫히는 대형 방음벽이 설치되어 공간을 자유롭게 분리하거나 결합할 수 있다. 연습실까지 포함하면 총 열한 가지 공간 구성이 가능하다.
각 공연장의 바닥은 선박 산업에서 차용한 스테인리스강 실린더를 통해 출렁인다. 이에 따라 객석 배치뿐 아니라 바닥 높낮이와 기울기까지 바꿀 수 있다. 전통적인 일방향 배치부터 무대를 반쯤 둘러싸는 말발굽형, 사방을 에워싸는 원형까지 공연 성격에 따라 자유롭게 구성된다. 여기에 내외부 복도를 개폐해 관객과 공연자의 동선까지 조정하면 총 260가지 공연장의 배치가 만들어진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관객의 시선을 이동시키듯, 건축이 공간과 동선을 재구성하며 공연의 서사에 직접 개입한다.
내외부의 서사를 조직하는 박스
공연예술센터의 외관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내부 공간과 대비되는 단순한 박스 형태다. 반투명한 대리석과 유리를 결합한 외피는 낮에는 부드러운 자연광을 내부로 끌어들이고, 밤에는 내부의 빛을 도시로 내보낸다.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지는 대리석 무늬는 고정된 수면의 물결처럼 박스의 신비로움을 한층 강조한다.
그 안에서 서로 다른 공연과 공간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과정은 오디세우스의 긴 여정과 닮았다. 개장 첫해에는 17가지 공연장 형식이 사용되었고, 이듬해에는 25가지 이상의 배치가 등장했다. 무대와 객석이 새롭게 조합될 때마다 하나의 사건을 품은 섬이 생겨나고, 이 섬은 공연예술센터라는 하나의 군도를 이룬다. 공간이 다시 세 공연장의 형식으로 돌아오더라도 그곳은 처음과 같은 장소가 아니다. 지나간 기억과 다가올 변화가 겹치며, 박스의 서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박스가 자리한 곳 역시 도시의 번영과 비극이 교차하는 장소다. 공연예술센터는 약 6만5000㎡ 규모의 세계무역센터 부지 재건 계획에서 마지막으로 완성된 건축물로, 붕괴한 건물 자리에 두 개의 물의 정원을 조성한 9·11 메모리얼과 마주한다. 절제된 외관은 장소에 새겨진 상실의 기억에 조응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부는 도시의 다음 서사를 생산한다. 이타카가 오디세우스에게 그러했듯, 재건의 종착점에 놓인 이 박스 역시 하나의 완결이 아니라 또 다른 여정의 출발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