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질도를 충신으로 인정했지만, 권력 구도의 모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질도를 희생시켰다. /사진 바이두
경제는 질도를 충신으로 인정했지만, 권력 구도의 모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질도를 희생시켰다. /사진 바이두
홍광훈 문화평론가 -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홍광훈 문화평론가 -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기원전 800년 전후 서주(西周) 말기에 중산보(仲山甫)는 윤길보(尹吉甫) 등과 함께 선왕(宣王)을 보필해 중흥을 이끌었다.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에는 그 인품과 공적을 칭송한 ‘증민(蒸民)’ 편이 보인다. 끝부분에는 동시대의 대신 신백(申伯)을 찬양한 ‘숭고(崧高)’ 편과 마찬가지로 “길보가 노래를 지어(吉甫作誦)”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써 윤길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시인으로 인정돼, ‘시조(詩祖)’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작품에서 윤길보는 “부드러우면 먹고 딱딱하면 뱉는다(柔則茹之, 剛則吐之)”는 속어를 인용해 “중산보는 부드러워도 먹지 않고 딱딱해도 뱉지 않는다(維仲山甫, 柔亦不茹, 剛亦不吐)”라고 그 강직하고 공정한 인품을 높이 샀다. 이어서 “불모긍과, 불외강어(不侮矜寡, 不畏彊禦)”라고 하여 환과고독(鰥寡孤獨)의 약자도 업신여기지 않고 고관대작의 강자도 두려워하지 않은 그 행실을 기렸다. 

당(唐) 중기에 재상을 지낸 권덕여(權德輿·759~818)는 덕치와 법치의 조화로운 병용을 주장하면서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탐관오리는 강력히 응징했다. 그의 성품과 정치철학은 ‘혹리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혹리전의(酷吏傳議)’란 글에 잘 드러나 있다.

글의 서두에서 권덕여는 딱딱해도 뱉지 않고 부드러워도 먹지 않은 중산보를 ‘강건함과 유순함을 함께 갖춘 완벽한 덕의 소유자(體備健順, 是爲全德)’로 평가했다. 그러나 관리들이 다 그와 같을 수 없으므로 “자신을 바르게 하고, 타고난 성격대로 한 방향을 견지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한다면, 모두 훌륭한 다스림의 길이 된다(直己循性, 能秉一方, 事擧於中, 皆理道也)”고 주장했다. 

따라서 “부드러움의 바른 방도를 얻은 자는 순리가 되고, 굳셈의 옳은 이치를 잃은 자는 혹리가 된다(得柔之道者爲循吏, 失剛之理者爲酷吏)”는 논리다. 부드러운 자는 자칫 나약하게 되어 불필요한 인정을 베풀고 우유부단해질 수 있으며, 굳센 자가 사리사욕으로 정의를 망각하면 도리에 어긋나게 가혹 일변도로 나아갈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권덕여는 질도(郅都)를 예로 들어 그가 비록 가혹한 관리로 지목돼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혹리’로 실렸지만, 굳셈의 옳은 이치를 얻은 관리였으므로 혹리로 매도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질도는 경제(景帝) 때 중랑장(中郎將)으로서 직간을 서슴지 않았으며, 조정 대신을 면전에서 꾸짖기도 했다. 

어느 날, 경제가 상림원(上林苑)에 행차했다. 동행한 가희(賈姬)가 측간에 간 뒤 멧돼지 한 마리가 나타나 측간으로 달렸다. 경제가 호위하던 질도에게 멧돼지를 처치하라고 눈짓했으나 질도가 움직이지 않았다. 경제가 직접 칼을 쥐고 구하려 하자 질도가 엎드려 말했다. “궁녀를 잃으면 더 들이면 됩니다. 천하에 가희만 한 여인이 없겠습니까? 폐하께서 경솔히 움직이시면 종묘와 태후는 어찌합니까?” 이 말에 경제가 칼을 거두었고, 멧돼지도 달아났다. 두태후(竇太后)가 소식을 듣고 질도에게 황금 백 근을 내렸다. 

제남(濟南)에서 300여 가구나 되는 한씨(瞯氏) 집안이 맹위를 떨치며 발호할 때 관할 장관도 이를 제어하지 못하자, 경제가 질도를 태수로 보냈다. 질도는 도착하자 바로 그 우두머리 몇 명을 붙잡아 처형했다. 이에 잔당은 모두 오금이 저려 숨을 죽였다. 한 해가 지나니 길에서 남의 물건 줍는 일조차 없어졌다. 주변 지역 장관들은 그를 상관처럼 두려워했다. 

질도는 용감하고 기력이 강했으며 공평하고 청렴했다. 사사로운 서신은 사절하고 뇌물도 받지 않았으며 청탁은 일절 듣지 않았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이미 부모를 버려두고 벼슬한 몸이니 직책을 받들어 관리로서 본분을 다하다 죽을 것이다. 처자는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가 사법 고관인 중위(中尉)가 되자 법을 집행함에 고관과 귀족을 피하지 않고 엄혹하게 대했다.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가 승상으로서 거만하게 굴었지만, 그는 아첨하지 않았다. 이에 열후(列侯)와 종실 사람 모두가 그를 바로 보지 못하고 곁눈질하며 ‘창응(蒼鷹·푸른 매)’이라고 불렀다. 

임강왕(臨江王) 유영(劉榮)이 중죄를 지어 중위부로 불려 와 조사를 받았다. 경제의 장자로 태자 신분이었다가 폐위된 인물이다. 그가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겠다며 ‘도필(刀筆·죽간에 쓴 오자를 깎아내는 칼과 붓)’을 요구했으나 질도는 담당 관리에게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두태후의 조카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이 사람을 시켜 몰래 도필을 갖다주었다. 임강왕은 편지를 쓴 뒤 그 칼로 자살했다. 이에 두태후가 크게 노해 질도에게 죄를 씌워 파면시켰다. 

경제는 사신을 보내 질도를 국경의 안문(鴈門) 태수로 임명하고, 두태후의 눈을 의식해 궁궐로 오지 말고 바로 부임하도록 지시했다. 임지에서는 일일이 보고할 것 없이 편의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재량권도 주었다. 평소 질도의 명성을 들어왔던 흉노는 그가 두려워 국경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질도가 죽을 때까지 안문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흉노는 나무로 질도의 형상을 만들어 과녁으로 삼고 기병에게 말을 달리며 쏘게 했으나, 질도의 위세가 마음에 걸려 맞추는 사람이 없었다. 

굳세면 가혹, 약하면 어진 것 같다

경제가 질도에게 다시 벼슬을 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두태후는 그에게 또 죄를 뒤집어씌웠다. 경제가 질도는 충신이라고 풀어주려 했으나, 두태후는 임강왕은 충신이 아니었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써 질도는 마침내 참수형에 처해졌다. 

권덕여는 이상의 인품과 행적만으로도 질도는 한나라의 명신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고 소신을 밝혔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중임을 맡고 지방으로 가서는 여러 지역을 훌륭하게 다스리면서 “강인함과 충성스러움과 순수함이 시종 한결같았다(堅剛忠純, 終始若一)”는 분석이다. 

그러한 충신이 단지 태후의 사사로운 노여움 때문에 처형됐다는 사실은 한나라 조정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았고, 황실이 너그럽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비판했다. 그런데도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지 않았음을 아쉬워했다. 또한 이렇게 보기 드문 유능한 충신을 살인한 뒤 시체를 몰래 파묻고 법으로 온갖 농간을 부린 자들과 동격으로 취급함으로써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대의가 여기서 결여됐다(善善惡惡之義, 於此缺矣)”고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냈다. 

이어서 일반 혹리와는 전혀 다른 충신을 함부로 다룬 뒤 총평에서는 “시비를 따져서 천하대세를 다투었다고 말해봐야 그 오류를 보완할 수 있겠는가(雖云引是非爭大體, 又何補焉)”라고 사마천을 원망했다. 

권덕여는 끝으로 질도는 “충신의 지조를 숨김으로써 죽음을 피하고, 정도를 굽혀서 관직에 나아가려는 짓을 하지 않았다(不隱忠以避死, 不枉道以蒞官)”고 찬사를 보냈다. 그런 까닭으로 겉만 꾸며 내실이 없고 굳세지만 사욕을 가진 자들과는 달라서, 굳세면서도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고 노여워해도 절도에 들어맞았다(怒而中節)고 칭송했다. 

그는 마지막에 덧붙여 사람들은 “굳세면 가혹한 것 같고, 약하면 어진 것 같다(剛似酷, 弱似仁)”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이와 같이 하여 실수하는 일이 많다(天下似是之爲失多矣)”고 지적했다. 

굳셈과 부드러움에 관해서 ‘서경(書經)’의 ‘홍범(洪範)’ 편은 삼덕(三德)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강하여 순종하지 않으면 굳셈으로 다스리고, 순종하면 부드러움으로 다스린다. 성질이 가라앉아 얌전한 자는 굳셈으로 이기도록 하고, 기상이 높고 밝은 자는 부드러움으로 이기도록 한다(彊弗友剛克, 燮友柔克. 沈潛剛克, 高明柔克).” 사물이나 사람의 상태와 성질에 따라 굳셈과 부드러움을 조화롭게 병용해야 함을 가리킨다. 이는 물론 정치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문공(文公) 5년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보인다. 진(晉)의 양처부(陽處父)가 위(衛)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영영(甯嬴)을 만난다. 양처부의 외모와 인품에 경도된 영영은 그를 따라나섰다가 도중에 돌아온다. 까닭을 묻는 아내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침잠강극, 고명유극’이라는 ‘서경’의 말도 있는데, 양처부는 굳셈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실패하지 않겠소?” 이어서 양처부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실이 없어(華而不實) 사람들의 원망이 그에게 모이게 돼 제 몸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양처부가 암살됐다.

전한 선제(宣帝) 때 앞뒤로 재상을 맡은위상(魏相)과 병길(丙吉)의 경우도 본보기가 될 만하다. 위상은 성품이 엄격하고 강인해 그와 유사한 정사를 펼친 반면, 병길은 관대하고 온화해 덕정을 베풀었다. 두 사람은 전한 초의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에 이어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명망이 높다. 

홍광훈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