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홍주읍성의 성벽. /사진 최갑수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홍주읍성의 성벽. /사진 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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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시인 -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최갑수 시인 -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여행에서 걷는다는 것은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이기도 하다. 길은 역사를 담고 있다.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충남 홍성에 홍주읍성이라는 세월과 역사가 고스란히 깃든 길이 있다. 충남 홍성에 홍주읍성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궁리항과 남당항이 홍성에 속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홍성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처음 가보는 여행지를 향해 설레는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목적지는 ‘홍주읍성’.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

홍주읍성은 예상했던 것보다 웅장했고, 그 모습이 대단했다. 원래는 길이 약 1772m의 성벽이었는데, 지금은 이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 일부분이 남아 있다고 한다. 1425년(세종 7년)에 본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홍주읍성은 왜구의 침입을 예상하고 지금 자리에 지었다. 실전용 성이어서 그런지 다듬어진 돌이 줄지어 서 있는 성벽은 묵묵하지만 위엄이 있다. 축조 당시 성의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네 개가 있었고, 여장과 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됐으며 성에는 우물 두 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북쪽과 동쪽, 남쪽 일부 성벽이 복원돼 있으며, 세 개의 성문과 아문·동헌·정자 등도 보수됐다. 동문인 조양문은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성 내에 들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이다.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용된 감옥을 복원한 것이다. 단순한 감옥이 아니라 천주교 박해 시기 수많은 순교자가 고문과 처형을 당한 장소이기도 한데, 현재는 ‘홍주 순교 성지’로 지정돼 해마다 수많은 순례객이 방문한다.

읍성 내부에는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인 홍주아문, 동헌인 안회당, 관아 연못과 정자였던 여하정이 있다. 홍주아문은 읍성의 정문 역할을 하며, 나지막한 기단 위에 2층의 누각을 얹은 구조다. 관리가 백성을 만났던 곳, 때로는 죄인을 신문하던 곳, 잔치와 재판이 교차하던 장소다. 안회당은 지방 수령이 머물며 업무를 보던 동헌으로, 넓은 대청과 정면의 기둥이 단아한 인상을 준다. 

홍주읍성의 역사에는 아픔도 깊게 새겨져 있다. 1906년, 민종식 의병장은 홍주읍성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홍성군청 자료에 따르면, 그는 민병 300여 명을 이끌고 이곳을 점령한 뒤 관아를 회복하고 일본 세력을 일시 몰아냈다. 하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성을 다시 빼앗겼다. 

남문 격인 ‘홍화문’에 오르면 홍성 읍내가 내려다보인다. 한 가족이 성벽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김밥과 과일을 먹고 있다. 바람이 천천히 불고, 성벽 너머 하늘에는 분홍빛 구름이 떠 있다. 천년의 시간이 날아와 하나의 풍경처럼 펼쳐지는 시간이다. 

성문 밖 마을과 이어지는 골목길

홍주읍성의 또 다른 매력은 주변 마을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어느새 마을 골목과 연결되고, 아이들이 뛰노는 운동장이 보이며, 담장 너머로 누군가의 삶이 펼쳐진다. 

성 건너편은 ‘명동’이다. 서울의 명동처럼 번화한 상권을 지칭하는 비공식 명칭. 이곳은 1970년대부터 홍성의 중심 상권이었는데, 지금도 토박이 가게가 남아 있다. 생선 가게, 분식집, 잡화점 그리고 오래된 의상실까지 간판과 벽화 등이 겹치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궁리항의 등대. /사진 최갑수
궁리항의 등대. /사진 최갑수

홍주읍성을 나와 명동을 지나면 발걸음은홍성전통시장에 닿는다. 1943년에 개설된 유서 깊은 시장으로, 매월 1일과 6일, 장이 선다. 시골의 전통 시장은 ‘장날’이 되면 마을이 하나의 축제처럼 변한다. 트럭 짐칸에 진열된 참기름과 들기름, 대야에 담긴 미나리와 고사리, 수레에 쌓인 산나물 꾸러미들. 상인의 목청 높은 외침, 한 손에 국밥을 들고 어슬렁거리는 손님, 시장 골목 어귀에서 족발을 써는 칼 소리가 뒤섞이며 장날 특유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시장을 걷다 보면 유독 소머리국밥집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홍성은 충남에서 소 사육두수가 제일 많고, 현대화된 도축장과 축산물도매시장이 가까이 있어 소머리 등 소 부속물 등을 구하기가 쉬워 소머리국밥집이 많이 생겼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포구 두 곳

소머리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궁리항으로 간다. 홍성에는 궁리항과 남당항이라는 예쁜 포구 두 곳이 있다. 

서부면에 있는 궁리항은 천수만을 끼고 있는 작은 항구다. 화려한 항구도, 북적이는 관광지도 아니다. 대신 조용하고, 넉넉하고, 말없이 너그럽다. 갈매기는 낮게 날았고 갯벌에서는 짠 소금 냄새와 진흙 냄새가 올라왔다. 궁리항은 특히 일몰이 유명한데, 해가 질 무렵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바다가 붉게 타오르고, 하늘과 물이 하나로 섞인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그 빛의 결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궁리항은 서해랑길 63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 길은 천북굴단지에서 시작해 홍성방조제, 남당항, 속동전망대를 거쳐 궁리항에 닿는다. 총거리 11㎞. 걷는 것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천수만을 품은 이 길이 가장 완벽한 코스일 것이다.

궁리항을 나와 남당항으로 간다. 바람이 쓱 등을 밀어주는 것 같다. 남당항은 홍성의 서쪽 끝, 천수만을 끼고 자리한다. 궁리항과 마찬가지로 크지 않지만 조용하고 고즈넉한 항구다. 미식가는 남당항을 ‘미식의 포구’라고 부른다. 가을이면 대하, 겨울이면 새조개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남당항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곳에 ‘페퍼상사’라는 이색적인 카페가 있어 주저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마도, 아니 분명하게 비틀스의 1967년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 따와 이름을 지었으리라. 들어서는 순간, ‘Here Comes the Sun’이 흘러나왔다. 이런 공교로움이라니! 카페에 들어서자 한편에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 재킷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 눈에 띄었다.

카페 주인은 ‘비틀스 마니아’인 모양이다. 음반과 포스터, 픽처 디스크, 한정판 피규어, 존과 폴의 사인이 담긴 복제판까지. 리버풀의 카페를 이식해 놓은 것 같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커다란 통유리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잔잔하다. 어느새 곡은 ‘The Long and Winding Road’로 바뀌었다. 길고 구불구불한 인생길, 아직도 내겐 이런 길이 많이 남아 있겠지. 그리고 그 길 위에 이런 카페 같은 곳을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다. 

여행수첩

봉래각의 볶음밥. /사진 최갑수
봉래각의 볶음밥. /사진 최갑수
홍주읍성 앞에 공영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홍성전통시장에 있는 홍흥집은 소머리국밥과 돼지내장탕으로 유명하다. 시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주차는 다소 어려울 수 있다. 돼지내장탕은 냄새가 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70년소머리국밥은 이름 그대로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소머리국밥 전문점이다. 한우 소머리와 양지를 푹 고아 낸 국물은 진하면서도 깊은 맛을 자랑한다. 매콤한 국물과 맑은 국물 두 가지 맛 중에서 고를 수 있다. 광천읍에 있는 봉래각은 현지인이 좋아하는 중국집이다. 볶음밥과 짬뽕을 잘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70년 역사가 깃든 집이다. 페퍼상사에서는 드립커피와 에그타르트를 꼭 맛보길.

최갑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