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플레이스먼트(전직 지원)’ 개념이 국내 고용 시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지 20여 년이 지났다. 구조조정이나 비자발적 퇴직을 앞둔 구성원에게 재취업이나 창업을 지원하는 제도다. 기업으로서는 노무·사회적 리스크를 완화하고, 구성원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돕는 나름의 역할을 해 왔다. 일정 규모 이상 기업의 장년층 퇴직 예정자에 대한 아웃플레이스먼트 의무화가 시행되면서 이제 낯선 개념도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웃플레이스먼트 한계는 명확해졌고, 많은 기업에서 아웃플레이스먼트는 여전히 ‘퇴직이 결정된 이후’ 시작하는 사후 수습책에 머물러 있다. 퇴직이 임박한 시점에 단기간 제공되는 이력서 컨설팅과 면접 교육 방식은 치열한 시장에서 질적 고도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시점 지연에 있다. 직원 커리어가 회사에서 충분히 확장되고 있는지, 현재 직무 역량이 미래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지는 퇴직 통보 이후가 아니라 재직 중에 고민해야 한다. 인공지능(AI)과 자동화가 직무 판도를 바꾸고 경력직 중심 채용이 대세가 된 지금, 평생 직장은 물론 ‘평생 직무’조차 장담하기 힘들다. 떠나는 사람만 뒤늦게 관리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하면 떠나는 직원을 탈 없이 보낼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하면 구성원이 재직하는 동안 자기 시장 가치를 지속적으로 높이도록 판을 깔아 줄 것인가’로 말이다. 선제적 ‘커리어 트랜지션(경력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커리어 트랜지션은 이직을 부추기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최근 이직 시장이 팽창하면서 연봉을 올리는 기술이나 면접 비법을 가르치는 서비스가 범람하고 있다. 개인이 커리어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맞지만,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커리어 성장을 ‘이직’이라는 단발성 이벤트와 동일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단기적 연봉 상승을 목표로 한 이직에서 장기적 역량을 쌓지 못한다면, 커리어 가치는 오히려 훼손된다. 따라서 기업이 제공해야 할 커리어 지원 역시 ‘이직 방지’냐 ‘이직 권유’냐의 이분법적 접근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핵심은 구성원이 자신의 다음 커리어 선택을 스스로 주도할 힘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선제적 커리어 트랜지션은 이별 준비가 아니다. 재직 중인 구성원이 자기 강점을 점검하고, 미래에 필요할 능력을 개발하며, 조직 안팎의 다양한 커리어 가능성에 대비하도록 돕는 종합 HR(인적자원) 전략이다. 역설적으로 회사가 직원의 미래 선택지를 넓혀 줄 때 직원은 현재 업무에 더 깊이 몰입한다. ‘이 회사는 나를 소모하는 곳이 아니라, 내 경쟁력을 높여 주는 성장 플랫폼’이라는 신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핵심은 '고용 가능성(employability)'
기업이 구성원의 퇴직 이후 삶까지 모두 책임질 수는 없으며, 그럴 의무도 없다. 다만 기업 역할은 구성원이 조직에 머무는 동안 자기 시장 가치를 지속적으로 높일 수 있도록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업이 원하는 ‘고성과 인재’와 개인이 원하는 ‘경쟁력 있는 인재’의 교집합, 그 접점이 바로 고용 가능성이다. 선제적 커리어 트랜지션은 다음의 핵심 프레임워크로 실행할 수 있다.
기업은 '좋은 사람을 붙잡는 것' 이상을 얻을 수 있어
‘직원의 시장 가치를 높여 주면 결국 딴마음을 품고 떠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목적을 단순히 ‘이직률 방어’에 둔다면 이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관점을 바꿔야 한다. 붙잡기 위해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기 때문에 조직에 남을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회사에서 전혀 미래를 그릴 수 없을 때 외부 기회가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는 없다. AI 영향력이 크거나 이직률이 높은 핵심 직군을 대상으로 파일럿(pilot) 프로그램을 먼저 운용해 볼 수 있다. 역량 진단, 커리어 대화, 스킬 트랜지션(스킬 전환) 교육, 사내 프로젝트 참여 기회를 연계한 뒤 구성원 몰입도, 내부 이동률, 이직률, 성과 지표 변화를 데이터로 검증하며 단계적으로 확대하면 된다.
사람을 붙잡는 회사에서, 사람을 성장시키는 회사로
기업은 이익을 창출하는 조직이며 구성원 삶 전체를 책임질 의무는 없다. 그러나 구성원이 재직하는 동안 더 경쟁력 있는 프로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직원 역량이 올라가고 미래 직무에 대해 준비가 될 때 기업 생산성 또한 극대화된다.
역설적으로 구성원 미래를 진정성 있게 지원하는 기업일수록 인재가 더 오래 머문다.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떻게 해야 좋은 인재가 떠나지 않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우리 회사에 있는 동안 그의 가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킬 수 있을까?’여야 한다. 아웃플레이스먼트가 퇴직에 대한 사후적 수습이라면, 선제적 커리어 트랜지션은 변화하는 노동시장에 대한 사전적 투자다.
기업이 사람을 영원히 고용할 수는 없지만, 머무는 동안 최고 경쟁력을 갖추도록 도울 수는 있다. 사람을 붙잡는 회사에서 사람을 성장시키는 회사로, 이제 한국 기업의 인재 관리 철학이 그다음 단계로 진화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