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晩)에 좌절하지 말라
조홍제는 이 회고록 곳곳에서 스스로를 만진자(晩進子)라고 부른다. 남들보다 빨리 이룬 건 아니지만 “이 만진(晩進)에서 오히려 인생의 깊은 묘리(妙理)를 깨달은 바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을 읽고 있으면 파란만장한 역정 속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루어내는 이병철, 정주영 같은 면모보다는 먼 길을 향해 가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이 강하게 다가온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다. 큰 그릇은 오히려 늦게 채워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조홍제는 당시 창업자와 비교할 때 누구보다 강한 군자유(君子儒)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만큼 오랫동안 한학 공부를 한 덕분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는 ‘논어’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마음속 깊이 각인하고 있었을 것이다.
“빨리하려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려고 하지 말라. 빨리하려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려고 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누구보다 나라를 위하는 사업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해방 후 혼란기를 관망하며 사업을 개시하지 않았고, 이병철 회장과 불쾌한 결별을 하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56세에 차분하게 창업에 도전해 큰 성공을 이루었다. 스스로 만우(晩愚)라고 호를 지은 것에도 이 같은 대기만성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부의 가르침
조홍제는 경남 함안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10세가 넘도록 신식 학교 입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조부의 강경한 원칙에 따라 서당 공부에 머물러야 했다. 이 시절 서당 공부와 조부의 가르침을 조홍제는 이렇게 회고했다.
“후일 내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이 교훈이 치산(治産)과 인재 활용에 있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지금에 와서도 그 말씀에 고마움이 앞설 뿐이다.”
여러 창업자가 공통적으로 회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동양 고전 공부의 가장 실용적인 효험은 성숙, 일찍 철이 들게 한다는 점에 있다. 15세에 하씨(河氏) 규수와 혼인했다. 손위 처남 하영진(河永珍)은 조홍제에게 새로운 세상을 비춰준 인물이다. 이미 신문물을 접한 그와의 친교를 통해 조홍제는 새로운 세상, 즉 대처(大處)에 대한 꿈을 품었다. 잠깐이지만 서울 구경도 하고 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서당을 맴돌던 조홍제는 이미 가슴속에 신문물을 향한 동경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17세가 되던 어느 날함안 장터에 나간 그는 홀로 단발의 결단을 내렸다. 이른바 ‘하이칼라’ 머리가 된 것이다. 다행히 조부는 잘려 나간 머리를 보고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어 곧장 서울로 가서 공부할 계획을 말하자 조부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고 허락해 주었다.
“첫째 신학문을 하더라도 한학 공부는 계속할 것, 둘째 잡기를 가까이하지 말 것, 셋째 여색은 여하한 이유로도 근접해서는 아니 되며, 넷째 졸업 후에는 필히 귀향하여 치산(治産)에 힘쓸 것.”
"'부지런히 치산에 힘쓰다 보면 어느 날엔가 내가 무슨 큰일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일을 해내는 데 있어 큰 도움을 주리라'는 생각에서 '학자가 될 생각은 깨끗이 버리고 실업계로 나가자'고 내가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정했다."
중앙고보 시절 조홍제
서울로 올라온 조홍제는 협성실업학교에서 오늘날의 초등학교 4·5·6학년 과정을 1년에 마치고 어렵사리 인촌 김성수가 운영하던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에 들어갔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그는 성적도 좋고 나이도 많아 급장이 되었다. 리더십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대한 회고다.
“학교의 수업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사거나 빌리거나 하여 밤이 으슥하도록 탐독하였다.”
당시는 춘원 이광수의 인기가 청년 사이에 극에 달할 때였다. 그런데 고전 공부로 조숙한 탓이었는지 그는 이광수의 작품에 대해서는 “나도 한 권 사서 읽어보니 도무지 싱거워서 아무런 재미도 느낄 수가 없다”고 했다. 문학책보다 과학이나 경제 그리고 수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고등수학을 잘했는데 조홍제는 이 점이 경영자의 본질이라고 훗날 회고했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모든 사상(事象), 즉 그 문제에 어떤 연관을 가진 모든 인소(因素)를 일단 계수(計數)로 환치하거나, 적어도 계수 중심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오고 있다.”
그러나 조홍제는 중앙고보를 다 마치지 못했다. 1926년 6·10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해 동맹휴학의 주모자로 몰려 퇴학을 당한 것이다. 다만 조홍제는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군자유의 면모가 새삼 확인되는 대목이다.
“세상에는 의외로 낙제생 또는 중퇴생이라도 큰 업적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도 그 충격을 계기로 삼아 더 분발했기 때문이 아닐까. 얻는 가운데 잃음이 있고 잃는 가운데 얻음이 있다는 것, 이것을 깨달아 행동하는 것이 현자의 도리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탈출구, 일본 유학
조홍제는 중앙고보 퇴학을 ‘차라리 잘됐다’는 심정으로 받아들이고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두 곳의 전문대학을 거쳐 1929년 법정대학 경제학부 독일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어느 학제도 제대로 마친 적이 없는 조홍제는 이때 굳은 결심을 한다. 6년이 걸리더라도 정상적인 과정을 철저하게 마치리라. 고학년이 될수록 조홍제의 진로에 대한 고민은 깊어만 갔다. 식민지 출신 대학생이라 그 고민은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나오면 이러이러한 산업 분야를 택해 보겠다든가 하는 결심이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 상공 분야에 종사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조선조 시대의 풍조가 남아 있었고 대학을 마치고 나오면 판사, 검사, 변호사, 관리 아니면 교직자가 되는 것이 예사여서 공업이나 상업 계통의 분야에 나아가려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일본인 교수 중에 조홍제에게 대학원에 남아 학자의 길을 권하는 교수가 있었다. 집이 당장 돈을 벌어야 할 만큼 어렵지도 않았고 경제 분야 서적을 탐독하는 일이 재미있었기에 마음이 살짝 움직이기는 했다. 그러나 곧 학자의 길을 접었다. 이유는 딱 하나, 그냥 이름이나 걸고 학생 앞에서 강의하고 월급이나 받아먹는 교수는 안중에 없었다.
“세계적인 학자가 되려면 여러 석학의 논문을 읽고 ‘누구누구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하고서 당당히 자기 이론 체계를 전개시켜 나가야 하는데 ‘나는 무엇무엇을 주장하노라’에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여기에는 어느 분야를 선택하든지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당찬 포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1935년 대학을 졸업했을 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남보다 늦은 30세에 입지(立志)하다
조홍제는 다른 대기업 창업주에 비해 사업에서는 매우 뒤처진 편이었다. 그러나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은 굳혀 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경제학을 배운 내가 나갈 길은 실업계밖에 없을 것 같았다. 실업계라 해서 학계보다 수월할까마는 문득 내 증조부 서천 선생의 말씀이 떠올라 ‘부지런히 치산에 힘쓰다 보면 어느 날엔가 내가 무슨 큰일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일을 해내는 데 있어 큰 도움을 주리라’는 생각에서 ‘학자가 될 생각은 깨끗이 버리고 실업계로 나가자’ 고 내가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정했다.”
하지만 그가 정작 효성이라는 이름을 걸고서 대기업을 창업하는 일은 아직도 20년 이상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