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를 판매하는 사업을 상상해 보자. 이보다 차별화가 어려운 비즈니스가 또 있을까. 경쟁사 제품과 성분이 사실상 같고, 수십 년간 거대한 유통망을 깔아 둔 기업이 이미 마트 매대를 장악해 놓은 상태다. 후발 주자가 시장을 뚫으려면 가격을 낮춰야 하는데,이익이 남지 않는다. 미네랄 함량이나 수질을 강조한들 소비자는 그 차이를 분간하기 어렵다. 새 브랜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 이 시장에서 창업 6년 만에 기업 가치 14억달러(약 1조8800억원)의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에 등극한 스타트업이 있다. 미국 생수 브랜드 ‘리퀴드데스(Liquid Death)’다.
생수 아닌, 정체성을 판다
넷플릭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출신 마이크 세사리오는 2017년 리퀴드데스를 창업했다. 록 페스티벌에 참가한 록밴드의 한 멤버와 열광적인 팬이 에너지 음료인 ‘몬스터에너지’ 캔에 물을 넣어 마시는 것을 본 데서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들의 행동은 몬스터에너지의 후원 때문이기도 했지만, 물보다 에너지 음료를 마실 때 더 반항적이고 멋져 보인다고 느낀 결과이기도 했다. 세사리오는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물은 꼭 순수하고 착해야만 하는가? 물은 록스타처럼 멋질 수 없는가?”
기존 생수 브랜드는 모두 투명한 병에 제품을 담고 청정한 수원지를 강조했다. 맑음과 깨끗함이 광고 키워드였다.
리퀴드데스는 반대로 갔다. 500 알루미늄 캔에 해골을 그려 넣었고, 브랜드명인 ‘죽음의 액체(리퀴드데스)’를 헤비메탈 록밴드 글씨체로 새겨 넣었으며, ‘당신의 갈증을 죽여라(Murder your thirst)’ ‘플라스틱에 죽음을(Death to plastic)’이라는 슬로건도 내걸었다. 이를 두고 초기 벤처 투자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는 물을 대체 어느 마트에서 매대에 올려 주겠느냐”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브랜딩에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리퀴드데스가 단가가 비싼 알루미늄 캔에 물을 담은 것은 단순히 심미적 디자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백 년간 썩지 않는 플라스틱과 달리 알루미늄은 재활용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플라스틱에 죽음을’이라는 슬로건은 환경적 사명이었던 셈이다. 대중은 도덕책 같은 지루한 환경 캠페인에는 무심하지만, 기존 공식을 깬 캠페인에는 환호한다. 리퀴드데스는 아마존프라임의 인기 드라마와 협업해 다크 코미디 콘텐츠를 선보였고, 헤비메탈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그 결과 리퀴드데스는 틱톡과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많은 팔로어를 보유한 생수 브랜드가 됐다. 사람들은 파격적 디자인의 생수 캔을 들고 있는 자기 사진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생수 한 캔이 본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 것이다.
2024년 리퀴드데스의 매출은 3억3300만달러(약 4482억원)에 달했고, 미국 전역 13만 개 이상의 매장에서 판매 중이다. 성장 가능성을 본 글로벌 공연 기획사 ‘라이브네이션’ 등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투자사로 합류했다.
듀오링고, 게임과 경쟁하다
전 세계 1위 어학 학습 애플리케이션(앱) 듀오링고(Duolingo)의 창업자 루이스 폰 안은 어학 학습의 고질적인 실패 원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진단했다. 시장에는 이미 훌륭한 교재와 매력적인 강사의 세련된 강의가 넘치지만, 인간의 빈약한 의지력이 어학 학습의 실패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듀오링고는 스스로를 ‘교육 회사’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다. 안은 “우리는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모바일 게임이 사람의 시간을 빼앗기 위해 쓰는 심리 기법을 그대로 가져와 교육에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듀오링고는 다른 어학 교육 기업을 이기려 들지 않았고, 출퇴근길이나 잠들기 전 무심코 보내는 그 시간에 가장 집중해 보는 유튜브나 넷플릭스, 모바일 게임을 진짜 경쟁 상대로 여겼다.
앱을 설계할 때 듀오링고는 철저하게 게임의 문법을 따랐다. 학습하면 경험치가 쌓이고, 전 세계 사용자와 리그를 나눠 순위를 다툰다. 듀오링고의 마스코트인 부엉이 ‘듀오(Duo)’는 하루라도 앱에 접속하지 않으면 집요하고 익살스럽게 알림을 보내며 연속 학습 기록을 이어 가게 한다.
마케팅도 남달랐다. 교육 산업의 진지함이나 엄숙함은 버렸고, 부엉이 탈을 앞세운 엉뚱한 B급 숏폼 콘텐츠를 쏟아냈다. 알림을 무시한 사용자를 찾아가 납치하겠다고 협박하는 영상은 수천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강의를 판 것이 아니라 부엉이가 주인공인 오락을 판 셈이다.
듀오링고의 학습은 기본적으로 무료다. 광고 없이 쓰고 싶다면 돈을 내면 된다. 사용자가 앱에 접속하는 습관이 굳어지고, 앱에 오래 머물수록 유료 전환 가능성은 커진다. 재미가 곧 체류 시간이고, 체류 시간이 곧 매출이 된다. 재미로 사람을 붙잡자, 듀오링고는 5억 명의 가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2025년 영업이익률은 30%에 육박했다. 한때 무료 앱으로 어떻게 돈을 벌겠느냐고 의심받던 듀오링고는 이제 나스닥 상장사가 돼 있다.
무엇을 팔 것인가
두 회사는 ‘우리가 무엇을 파는 회사인지’ 를 근본에서 다시 물었다. 리퀴드데스는 물이 아닌 정체성을, 듀오링고는 지식이 아닌 재미를 팔았다. 경쟁사도 다시 정했다. 리퀴드데스는 에너지 음료 회사인 몬스터에너지를, 듀오링고는 넷플릭스를 경쟁자로 삼았다. 경쟁의 무대를 바꾸니, 수십 년 유통망을 갖춘 거대 생수 기업도, 오래된 어학 교재 회사도 리퀴드데스와 듀오링고를 넘볼 수 없게 됐다.
사업의 카테고리를 다시 정의하는 건 단순히 남과 다르게 보이려는 괴짜 마케팅이 아니라, 우리 사업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객이 진짜로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 가는지를 밑바닥부터 다시 묻는 일이다. 리퀴드데스의 소비자는 본인을 표현할 정체성을 산 것이고, 듀오링고 사용자는 지식이 아니라 매일 이어 가는 성취감을 얻은 것이다. 제품은 그 본질을 실어 나르는 그릇일 뿐이다. 그릇만 들여다보면 경쟁사와 똑같은 물, 똑같은 강의가 보일 테지만 소비자가 진짜 원하는 것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사업의 가능성이 열린다.
사업 카테고리를 다시 정의한다고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다. 재정의한 본질이 시장이 진짜로 원하는 것과 맞아떨어질 때만 판이 바뀐다. 리퀴드데스와 듀오링고가 던진 정체성이나 재미라는 답이 통한 것은 그것이 억지로 지어낸 콘셉트가 아니라 소비자의 진짜 욕구를 정확히 겨냥했기 때문이다. 껍데기만 흉내 낸 것이라면 잠깐 눈길은 끌어도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리퀴드데스는 환경에 대한 진정성을 담았고, 듀오링고는 실제 학습 성취와 연결했다. 겉모습만 요란하게 바꾸는 얄팍한 상술과 사업의 본질을 다시 정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많은 기업이 같은 카테고리에서 경쟁사보다 조금 더 좋은 제품을 만들려고 애쓴다. 그 싸움은 결국 서로를 조금씩 닮아 가게 할 뿐이다. 반면 판을 바꾸는 기업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를 무엇을 파는 회사로 부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정의를 다시 쓰는 순간, 눈앞에 어떤 새로운 판이 열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