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2026년 8월 26일(이하 현지시각) 네팔과 동남아시아 일대를 덮친 대규모 홍수는 아시아 전역의 농업 생산망을 마비시키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했다. 기후변화 심화로 자연재해보험과 구호 활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거시 경제적 충격이 가시화된 것이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2024년 ‘기후와 개발 보고서’를 통해 “기후 충격으로 인한 인프라 파괴와 긴급 재정 지출은 신흥국의 국가 부채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우려한 바 있다. 이처럼 기후 재해의 파급력이 커지자 세계 경제학계와 국제금융 기구는 재난 대응 체계의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동안은 재난이 발생한 후 각국 정부가 예산을 재배정하거나 긴급 외채를 늘리는 임기응변식 대응에 의존했지만 이는 재정 적자와 복구 지연이라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라는 경고가 이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3월 기후 리스크 보고서를 통해 “아시아 신흥국이 과거 금융 위기에 대비해 구축했던 역내 금융 안전망을 이제는 기후 재난에 따른 경제 충격을 사전에 차단하는 거시 경제적 방화벽으로 조속히 확장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필자는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공급 측 물가 충격과 재정 불확실성에 주목하면서 재난위험금융(Disaster Risk Financing Initiative)을 거시 경제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재정의한다. 자연재해의 물리적 충격이 금융 위기나 장기 침체로 전이되지 않도록 사전에 리스크를 측정하고 재원을 다층적으로 분산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만이 기후 위기 시대에 국가 경제의 생존을 담보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네팔에서 발생한 대규모 홍수는 기후변화가 인간의 삶과 경제에 얼마나 막대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구하고 피해 지역 주민을 지원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 참사는 물리적 재해가 얼마나 빠르게 거시 경제적 충격으로 번질 수 있는지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재난은 각각 원인이 다르며 특정 자연재해 하나를 섣불리 ① 엘니뇨나 기후변화의 결과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세계기상기구(WMO)는 강한 엘니뇨 현상이 8월부터 10월까지 더욱 심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상당 지역에서 평년보다 높은 기온이 나타나고 강수 패턴에도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엘니뇨는 가뭄과 산불, 연무의 위험을 높이지만 그 영향은 국가와 계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재해에서 거시 경제적 위기로
정책 입안자에게 중요한 것은 극한 기상 현상이 촉발하는 일련의 경제적 연쇄 반응에 대비하는 것이다. 가뭄과 홍수, 폭염은 농작물과 기반 시설을 훼손한다. 식량 비축량이 부족하고 물류 체계가 취약하며 수입처가 일부 국가에 집중돼 있는 경우 생산 감소는 곧 물자 부족과 가격 상승, 가계 구매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는 가격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긴급 수입을 지원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되고 중앙은행은 공급 측 요인에 따른 물가 상승과 수요 약화가 동시에 나타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다음에는 재정적 후폭풍이 찾아온다. 도로와 항만, 관개시설, 학교, 병원 등을 제때 복구하거나 재건하지 못하면 일시적인 차질이 경제의 생산능력을 장기적으로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굳어질 수 있다. 정부는 개발 사업에 투입할 예산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급하게 돈을 빌려야 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외부 지원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재난 이후 발생한 자금 조달의 공백은 너무나 쉽게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각국은 물리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경제활동 중단 기간을 줄이고, 필수적인 공공서비스를 유지하며, 금융 불안을 억제하고, 단기적인 손실이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훼손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 신속하고 탄탄한 회복을 위해서는 인도적 지원과 함께 거시 경제 여건을 안정시키는 조치가 필요하다.
재난위험금융과 아세안+3의 공조
그 과제의 규모는 실로 막대하다. 유엔재난위험경감사무국(UNDRR)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20년까지 재난으로 인한 직접 손실은 연평균 1800억달러(약 242조2800억원)~2000억달러(약 269조2000억원)에 달했다. 여기에 간접적 피해와 연쇄적 피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까지 포함하면 연간 총비용은 2조3000억달러(약 3095조8000억원)를 넘어선다. 아시아는 이에 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난 5월 아세안+3(ASE-AN+3) 국가(아세안 10개국과 한국·일본· 중국 3개국)의 재무 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는 ② 2026~2028년 재난위험금융 로드맵을 승인했다. 이 체계는 회원국이 국가 차원의 재난 위험과 관련한 금융 전략을 수립하고 보험, 재해 채권, 그 밖의 관련 금융 수단의 활용을 확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게 된다.
물론 사전에 마련된 재원만으로 대규모 재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 없다. 보험 역시 모든 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제도의 진정한 가치는 위기 초기에 신뢰할 수 있는 자금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이 시기에는 대응이 늦어질수록 피해가 커지고 정부가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여지도 가장 작기 때문이다. 가령 9월 1일 아세안+3 산하 지역 플랫폼인 ③ 동남아시아 재난위험보험기구(SEADRIF)는 공식 통계를 통해 폭우와 광범위한 홍수로 26만 명이 넘는 사람이 피해를 입은 사실을 확인했고, 이후 영업일 기준 5일 이내에 라오스에 100만달러(약 13억4600만원)를 지급했다. 올바른 접근법은 재원의 유형을 위험 수준에 맞춰 배분하는 것이다. 예산상 준비금이나 재난 기금은 비교적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피해 규모가 작은 재난에 사용할 수 있다. 중간 규모의 충격에는 조건부 신용을 활용할 수 있으며, 보험과 자본시장 기반 금융 수단은 발생 빈도는 낮지만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주는 재난에 주로 사용해야 한다.
또 자금이 피해 지역 주민에게 신속하게 전달되도록 하려면 정부가 효과적인 사회 보호 체계와 비상 대응 계획을 갖춰야 한다. 이런 과정은 재난 이후 발생할 불확실한 재정 부담을 미리 측정하고 가격을 매겨 분산함으로써, 이를 사전에 관리할 수 있는 위험으로 바꾼다.
복구 비용 일부가 미리 마련돼 있다면 정부가 갑작스럽게 세금을 인상하거나 공공투자를 대폭 삭감하고, 긴급 차입에 의존하거나 지원을 지연할 가능성이 작아진다. 정부가 부담해야 할 재정적 위험을 더 예측 가능하게 할 수 있고, 이에 따라 공공 부채와 물가, 경제성장 전망을 둘러싼 불확실성도 줄어든다. 혜택은 정부 재정의 건전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런 접근은 기업과 금융시장에도 재난 이후의 세금 인상 가능성, 공공투자 삭감, 대금 지급 지연, 신용 여건 등에 대해 보다 명확한 전망을 제공한다. 또한 항만과 도로, 전력망, 통신망을 더 빠르게 복구할 수 있게 해 지역 공급망의 차질을 최소화한다.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아세안+3 지역에서는 한 국가의 빠른 회복이 주변 국가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거시 경제적 방화벽과 기후 회복 탄력성
기후변화의 경제학은 재난위험금융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했다. 과거에는 극한 기상 현상이 발생한 뒤 보험금을 지급하는 주변적 수단 정도로 여겨졌지만, 이제 재난위험금융은 위기가 발생하기 전부터 정부의 재정 여력을 보호하고 중기적인 경제 전망을 개선하는 정책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재난위험금융은 재정 정책, 금융 안정, 식량 안보, 사회보장, 기반 시설 계획을 지키는 거시경제적 방화벽 역할을 하며, 경제적 변동성과 향후 복구 과정에 대한 불확실성을 동시에 낮춰준다. 아세안+3는 지난 수십 년간 통화위기와 금융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역내 금융 안전망을 구축해 왔다. 점차 강해지는 엘니뇨가 이 지역을 위협하고 있는 지금, 다음 과제는 명확하다. 자연재해가 인도주의적 위기를 넘어 재정 위기와 금융 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는 일이다. 역내 재난위험금융 체계를 갖춘다면 각국 정부는 경제를 보더 신속하게 정상화하고, 재정 여력을 보존하며, 재난의 파급효과가 다른 국가와 글로벌 경제로 확산되는 것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기온이 상승하는 세계에서 진정한 회복 탄력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Tip
① 적도 부근 동태평양의 수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며 지구 전체의 대기 순환을 왜곡하는 기후 현상. 동남아시아에는 극심한 가뭄과 산불을, 남미 지역에는 대규모 폭우를 유발한다. 이는 쌀, 커피, 팜유 등 핵심 농산물의 수확량을 급감시켜 식량 가격 급등을 부르고 전 세계 물가를 자극한다. 글로벌 공급망을 마비시키며, 국가 경제에 상당한 거시 경제적 충격을 안긴다.
② 2024년 5월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열린 제27차 아세안+3 재무 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공식 승인돼 시작됐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직후 역내 금융 안정망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M)’를 만들었던 체계적 협력 경험을 기후 및 재난 분야까지 확장한 결과물이다. 회원국 간 기후 데이터 공유 시스템을 구축하고 자본시장을 활용한 공동 민간 재원 조달 모델을 제도화해 역내 기후 금융의 표준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③ 2018년 5월 아세안+3 재무 장관 회의의 합의를 거쳐 2019년 1월 싱가포르에 법인 및 민간 일반 보험사 형태로 정식 설립됐다. 2015년 라오스와 미얀마를 덮친 대형 풍수해 당시 국제 구호금 집행 지연으로 국가 재정이 마비되었던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회원국의 공동 출자금과 일본·영국 정부의 신탁 기금을 기반으로 운용되며, 세계은행이 전담 자문 기관으로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