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데뷔한 5인조 보이그룹 플레이브가 파죽지세다. 2025년 초, 미니 3집이 발매일주일 만에 100만 장 이상 나가며 밀리언셀러가 됐다. 그해 11월에는 메탈리카, U2도 섰던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지난 4월에는 미국 빌보드 차트 메인 차트 중 하나인 빌보드 200(종합 앨범 차트)과 아티스트 100에 들었다. 그리고 9월 12일과 13일 인천문학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이 스타디움 콘서트를 필두로 월드 투어에 나선다. 11월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 시빅 오디토리엄 공연도 잡혀 있다.
짚어둬야 할 것은 플레이브가 버추얼 그룹이란 사실이다. 위에 나열한 모든 기록은 국내 가상 가수 최초의 ‘위업’이자, 방탄소년단·세븐틴 등 최상급 인기의 몇 팀을 빼면 웬만한 인간 아이돌 가수도 밟지 못한 미답의 영역이다.
인간 가수와 가상 가수의 정면 대결은 현실화할 것인가. 필자는 각종 기사, 보도 자료, 비공식 통계를 종합해 2026년에 국내에서 공식 데뷔한 버추얼 가수를 전수 조사했다. 그 결과, 9월 현재까지 국내에서 데뷔한 버추얼 가수·그룹이 10개 팀이 넘었다(11개). 오는 4분기 데뷔를 준비 중인 팀도 여럿 감지된다. 그간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버추얼 가수에 대한 통계가 전무해 이것이 최초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2026년을 분수령 또는 ‘특이점’이라 할 만큼 주목할 수치임은 분명하다.
김정섭 성신여대 교수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96년부터 2025년까지 30년간 데뷔한 국내 아이돌 그룹은 1182개 팀으로 연평균 39.4팀이 세상에 나온다. 올해도 약 40팀의 인간 아이돌이 나온다고 하면, 2026년 데뷔 아이돌 다섯 중 하나는 인간이 아닌 가상의 존재라는 추산이 가능하다. 미라클·오위스·미완소년·비그릿츠 등은 4~5인조 편제로, 노래를 발표하고 라이브 방송을 하는 등 인간 K-팝 그룹과 대동소이한 활동을 펼친다. 대부분 투자를 유치한 중소 기획사 소속이지만, SM엔터테인먼트 산하의 SM재팬과 스튜디오 리얼라이브가 함께 만든 여성 듀오 키에피도 있다.
‘세상엔 없는 사랑’ 히트시킨 아담이 원조 K-버추얼 아이돌
이 기이한 물결은 플레이브가 이끌었다.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과 함께 릴 미켈라 등 버추얼 모델, 가상 가수가 주목받던 3~4년 전만 해도 이들을 소개하는 기사에는 ‘골짜기의 불쾌함(로봇 등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과 비슷해질수록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심리적 현상)’을 호소하는 악플이나 조롱이 달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플레이브가 온라인 화제를 넘어 오프라인 동원력까지 자랑하는 거대한 ‘리얼’ 팬덤을 모았다. 앞서 2023년 버추얼 걸그룹 메이브가 버추얼 아이돌 최초로 지상파 음악 방송 무대에 섰다. 2025년 5월엔 버추얼 걸그룹 이세계아이돌이 ‘이세계 페스티벌 2025’ 헤드라이너로서 고척스카이돔에 올랐다.
최근 만난 버추얼 아이돌 제작사 대표 A씨는 “인간에 비해 데뷔와 활동 비용이 적고 사생활 리스크가 없는 가상 가수는 아이돌 시장에서 제작자가 늘 꿈꾸는 성배 같은 존재다”며 “반신반의하며 간만 보던 이들이 2025년 플레이브, 이세계아이돌의 괄목할 매출을 보며 뛰어들고 투자 전문 회사도 돈을 내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가상 가수의 역사는 짧지 않다. 당장 세기말을 달군 사이버 가수 아담이 떠오르지 않나? ‘세상엔 없는 사랑’을 히트시켜 CD를 20만 장이나 팔았다. 2집 실패 이후 사라져 ‘트로이 목마 바이러스’ ‘밀레니엄 버그’ 사망설이 돌기도 했지만, 그가 가요사에 남긴 기억은 선명하다. 아담의 ‘짝지’처럼 여겨진 류시아가 남은 화제를 가져간 뒤 사이다·인츠·리밋 같은 가상 가수가 나왔지만 아담의 반의 반의 반도 관심을 못 받았다. 이후 오랫동안 가상 가수는 빙하기를 겪었다. 그렇게 거의 20여 년⋯. 팬데믹이 추동한 비대면 콘텐츠, 메타버스 열풍이 버추얼 휴먼의 재기를 예열하더니 실시간 렌더링 기술 발전과 함께 마침내 가상 가수 2.0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아담의 사인은 감염이 아니었다. 당시엔 아담이 움직이고 입술을 달싹대는 몇 초짜리 영상을 만드는 데 여러 명의 애니메이터와 수천만원의 제작비가 필요했으니까 채산성 문제라고 봐야 한다.
버추얼 가수 핵심은 ‘본체’와 렌더링 기술
그걸 기술이 극복했다. 최근 버추얼 가수의 핵심은 ‘본체’와 렌더링 기술이다. 미남미녀 만화 캐릭터처럼 보이는 멤버의 외모 뒤에는 인간이 있다. 실시간 모션 캡처, 페이스 캡처 기술을 사용하면 그들의 연기·재담·노래가 그림체 멤버의 표정·몸짓·손짓·가창으로 구현된다. 인간 아이돌이 하는 ‘라방(라이브 방송)’은 버추얼 아이돌에게도 팬덤을 모으는 핵심 콘텐츠. 기술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손가락이 잠시 여섯 개가 되고 A 멤버의 바짓단 사이로 투명하게 B 멤버의 발이 비치는 ‘실시간 에러’의 순간마저 셀프 디스와 유머로 만드는 ‘본체’의 입담이 되레 팬에겐 ‘귀여워’의 매력 콘텐츠가 된다.
‘도시 전설’처럼 남은 한국의 아담을 대신해 버추얼 가수의 세계적 선구자가 된 이는 일본의 하쓰네 미쿠다. 2007년 일본의 크립톤퓨처미디어가 내놓은 미쿠는 데뷔 5년 만에 1억2000만달러(약 1615억2000만원) 이상의 누적 수익을 기록했다. 도쿄돔 공연을 매진시키고 루이뷔통 의상을 입더니 레이디 가가 투어의 오프닝을 맡았다. 이걸 이미 10여 년 전에 해냈다. 영국의 전설적 록 밴드 블러의 리더 데이먼 앨반이 결성한 버추얼 밴드 고릴라즈는 2000년 결성돼 1600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팔아 치웠다. 앨반은 버추얼로 제2의 음악 인생을 화려하게 열었다.
버추얼이 이제 AI를 만났다. 7월 국내에서 데뷔한 버추얼 솔로 가수 슬릭트(SLIKT)는 AI 아티스트 프로젝트 리프트(ryft) 1호 가수다. 팬덤 플랫폼의 반응과 활동 정도를 분석해 콘텐츠와 세계관을 확장하고 AI 기반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휴먼과 버추얼의 생존 게임은 시작된 걸까. 일단 같은 플랫폼, 같은 차트, 같은 공연장에 병렬해 섰다. 자, 거울을 사이에 둔 우리와 저들의 넥스트 스테이지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