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활과 관계가 밀접한 식물 중의 하나가 칡이다. 과거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시골에서는 너도나도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 보조 식량으로 사용했다. 구황(救荒)식물의 일종이었다. 필자도 소싯적에 고향에서 동네 친구들과 군것질로 자주 칡을 캐 먹은 경험이 있다.
칡은 또 한방의 약재로 각광받는다. 갈근탕(葛根湯)이 지금도 널리 애용된다. 칡이 약재로 쓰인 역사는 오래됐다. 후한(後漢) 때 지어진 ‘상한론(傷寒論)’에는 오늘날의 감기에 해당하는 ‘태양병(太陽病)’에 땀이 나든 안 나든 갈근탕을 복용케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비슷한 시기에 나온 ‘금궤요략(金匱要略)’은 부인의 산후병에 댓잎 한 줌과 도라지 1량 등 여러 약재와 함께 갈근 3량을 넣는다고 처방하고 있다.
칡뿌리는 또 음료로 가공돼 유통된다. 특히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애주가들이 즐겨 찾는다. 뿌리에만 주독 제거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꽃에도 그런 성분이 있는 모양이다. 당(唐) 초기에 술 잘 마시기로 소문났던 왕적(王績·585~644)의 ‘식후(食後)’란 시에는 “칡꽃으로 술의 독을 풀다(葛花消酒毒)”라는 구절이 보인다. 그 뒤의 한굉(韓翃·729~788)도 ‘송왕소부귀항주(送王少府歸杭州)’에서 “한 줌 가득한 칡꽃은 술의 독을 풀 수 있다(葛花滿把能消酒)”라고 이를 인정한다.
칡꽃은 여름 내내 덩굴 마디마디에서 이어가며 핀다. 넓고 무성한 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등나무 꽃처럼 자줏빛 작은 꽃송이가 다닥다닥 붙어서 피어 있다. 예쁘고 싱그러운 그 모습은 한여름의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며 보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그러다가 9월 초에 가을바람이 불면 시든다. 맹교(孟郊·751~814)는 ‘분수령을 지나며(過分水嶺)’라는 시에서 “나그네 옷깃이 스산한 가을바람에 나부낄 때, 칡꽃이 날려 떨어진다(客衣飄颻秋, 葛花零落風)”라고 초가을의 쓸쓸한 정경을 묘사했다.
약재와 옷으로 사용된 칡
고대에는 칡이 약재로 쓰일 뿐만 아니라 그 덩굴로 옷도 만들었다. 그래서 여인들이 누에를 기르기 위해 뽕잎을 따듯이 칡덩굴 채취도 일상 노동의 하나였다. ‘시경(詩經)’의 ‘왕풍(王風)’에 있는 ‘채갈(采葛)’ 편에 그러한 장면이 보인다. “저 칡 따는 여인이여. 하루만 못 봐도, 석 달이나 지난 듯하네(彼采葛兮. 一日不見, 如三月兮).” 물론 비단도 의류의 재료였으나 값이 비싸 대중화되기 어려웠다. 수(隋)나라 이후에는 삼베가 보급되었지만, 서민들은 여전히 값싼 칡덩굴로 옷을 지어 입었다. 이는 대나무 조각을 연결해서 만든 죽간(竹簡)이 종이가 발명된 이후에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오랫동안 사용된 경우와 같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칡이 의류의 중요 재료였으므로 고대에는 정부에서 이를 관리했다. 주(周)나라 때의 관직 제도를 기술한 ‘주례(周禮)’는 ‘지관(地官)’의 ‘사도(司徒)’ 항목에서 칡을 관장하는 ‘장갈(掌葛)’에 관해 적고 있다. 즉 20여 명의 관리를 인솔한 장갈이 산간의 농민으로부터 ‘치격(絺綌)’의 재료를 징수하는 업무를 관장했다는 것이다. 후한 초에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칡을 “치격의 풀이다(絺綌艸也)”라고 하면서, ‘치(絺)’는 가는 칡(細葛)이고 ‘격(綌)’은 굵은 칡(粗葛)이라고 풀이했다. 칡덩굴 섬유도 세공 정도에 따라서 등급이 있었다는 말이다.
‘시경’의 ‘주남(周南)’에 실린 ‘갈담(葛覃)’ 편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칡덩굴이 길고 길어, 온 골짜기에 퍼졌구나. 잎도 무성한 칡덩굴을 잘라 와서 삶는다네. 가는 베 만들고 굵은 베 만들어, 이를 입으니 싫증이 나지 않는다오(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莫莫, 是刈是濩. 爲絺爲綌, 服之無斁).”
가늘고 굵은 구분이 있던 치격이 나중에는 갈포(葛布)를 통칭하는 말로 쓰였다. ‘논어(論語)’의 ‘향당(鄕黨)’ 편에는 공자(孔子)가 “더운 날에는 치격 홑옷을 입었다(當暑袗絺綌)”는 구절이 보인다. 이는 갈포로 만든 갈의(葛衣)가 추위를 막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러므로 여유 있는 사람은 겨울에 털 달린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껴입었다. ‘논어’에서 공자는 “살진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다(乘肥馬, 衣輕裘)”는 말로 부귀한 사람을 묘사한 바 있다.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은 자기 죽음을 가정하여 지은 ‘자제문(自祭文)’에서 그 어려운 처지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태어난 뒤로 가난한 운명을 맞았다. 대 밥그릇과 표주박은 자주 비었고, 치격만 겨울에 펼쳐놓았다(自余爲人, 逢運之貧. 簞瓢屢罄, 絺綌冬陳).” 당 중기의 백거이(白居易)도 “날이 추워졌지만 몸에는 여전히 갈의를 걸쳤다(天寒身上猶衣葛)”거나 “갈의는 가을이 돼도 바뀌지 않았다(葛衣秋未換)”는 말로 가난한 삶을 표현한 적이 있다.
칡덩굴로 신도 만들었다. ‘시경’의 ‘위풍(魏風)’에 보이는 ‘갈구(葛屨)’ 편의 다음 대목이 눈길을 끈다. “얼기설기 엮어 만든 칡덩굴 신으로 서리를 밟을 수 있겠소(糾糾葛屨, 可以履霜)?” ‘소아(小雅)’의 ‘대동(大東)’ 편에도 똑같은 구절이 사용됐다. 이 역시 겨울에 신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옷과 신을 만드는 칡덩굴로 당연히 두건도 만들었다. 이 갈건(葛巾)은 초야의 은사(隱士)가 흔히 사용했다. 성당(盛唐)의 왕유(王維)는 하씨(賀氏) 성의 벗이 보낸 갈건을 특별히 좋아했다. ‘수하사증갈건지작(酬賀四贈葛巾之作)’이란 시에서 그는 갈건을 쓰고 은사라도 된 듯이 홀가분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초야 선비의 두건 보내주신 은혜, 이 값 금보다도 귀합니다. 이 그윽한 정취 담은 선물 좋아하나니, 은둔할 벼슬아치 마음과 함께할 수 있다오. 아침 조회 때는 잠시 걸어두었다가, 저녁에 머리 감고 와서 다시 비녀로 꽂는답니다. 앉아서 시끄러운 속세 멀어짐 느끼니, 그대와 같이 산림으로 들어갈 생각이랍니다(野巾傳惠好, 玆貺重兼金. 嘉此幽棲物, 能齊隱吏心. 早朝方暫掛, 晚沐復來簪. 坐覺囂塵遠, 思君共入林).”
두보(杜甫)도 난을 피해 초야에 있을 때 늘 갈건을 썼다. ‘빈지(賓至·손님이 오다)’라는 시에 “손님이 띠로 엮은 내 집에 들르니, 아이 불러 갈건을 바로잡는다(有客過茅宇, 呼兒正葛巾)”는 구절이 보인다.
황보염(皇甫冉·717~770)도 초야 은사의 정취를 즐겨보려고 “늦게 일어나 비녀로 갈건 꽂고, 한가로이 읊조리며 명아주 지팡이 짚고 간다(晏起簪葛巾, 閑吟倚藜杖)”라고 읊었다. ‘제고운객사(題高雲客舍)’에서다.
이 갈건은 또 애주가에게 아주 특별한 용도가 있다. 도연명의 연작시 ‘음주(飮酒)’ 20수에서 “거듭 통쾌히 마시지 않으면, 머리 위의 두건을 헛되게 하리니(若復不快飲, 空負頭上巾)”라는 구절이 읽는 이의 관심을 자아낸다. ‘문선(文選)’의 편찬자인 남북조시대 양(梁)의 소통(蕭統)은 ‘도연명전’에서 그가 “머리 위의 갈건을 벗어 술을 걸렀다(取頭上葛巾漉酒)”는 일화를 소개했다. 이를 두고 이백은 “도현령이 날마다 취해, 마당 앞 다섯 버드나무의 봄기운을 몰랐도다. 맨 거문고에는 본래 현이 없었고, 술 거를 때는 갈건으로 했다네(陶令日日醉, 不知五柳春. 素琴本無弦, 漉酒用葛巾)”라고 노래했다. ‘희증정율양(戲贈鄭溧陽)’이란 작품의 전반부다.
이러한 갈의나 갈건의 정취와 상징성은 초야 은사의 경지를 넘어서 신선 세계에까지 확대된다. 동진의 갈홍(葛洪)이 지은 ‘신선전(神仙傳)’에 왕요(王遙)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어느 비 오는 날 밤에 50여 년 동안이나 쓰지 않았던 갈의와 갈건을 꺼내서 그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날 버리고 떠날 수 있느냐고 울며 말리는 아내를 뒤로한 채 잠시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산으로 들어간 그는 마침내 신선이 됐다.
칡덩굴과 같은 인간 적지 않아
그러나 이러한 여러 면의 생활 용도와 문화적 의미를 가진 칡도 인간에게 귀찮고 괴로운 존재가 될 때가 있다. 갈등(葛藤)이란 단어가 그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역경(易經)의 ‘곤괘(困卦)’에는 “곤우갈류(困于葛藟)”라는 말이 있다. 칡덩굴에 얽힌 듯 곤란한 상태에 처한 경우를 나타낸다.
필자의 우거 주위에도 봄이면 칡덩굴이 여기저기서 생겨나와 순식간에 나무들을 뒤덮는다. 이를 방치하면 햇볕을 못 받은 나무가 고사하기 일쑤다. 귀찮아서 그대로 두었다가 나중에 제거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다. 다행히 집에서 키우는 거위들이 칡잎을 잘 먹는다.
세상에는 칡덩굴과 같은 인간도 적지 않다. 이들과 얽히면 자칫 고사하는 나무 신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잘살아 보자”고 입에 발린 말을 하며 접근하는 사람과는 가까이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