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지브 수리 노키아 CEO. <사진 : 정선=C영상미디어 이경호>

190㎝ 가까운 큰 키에 짧은 머리, 마른 체격의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외투 없이 검정 티셔츠에 짙은 색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벼운 걸음걸이와 달리 안경 너머 눈빛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갔다가 숙소(정선)로 돌아오니 새벽 3시였어요. 어마어마한 교통 체증이었습니다.”

강원도 정선 하이원 컨벤션호텔에서 만난 라지브 수리(Rajeev Suri·51) 노키아 최고경영자(CEO)는 올림픽 이야기로 첫마디를 뗐다. 인터뷰는 평창올림픽 개막식 다음 날인 2월 10일 오전 11시에 진행됐다. 수리 CEO가 국내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평창올림픽 공식 통신 파트너인 KT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눈빛이 또렷해졌다. 1시간 남짓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무려 열다섯 번이나 ‘롸잇(right·그렇죠)?’이라고 했다. 스타카토를 연주하듯 절도 있는 어조였다. 자신의 생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리 CEO를 인터뷰한 것은 노키아가 2016년 11억유로의 적자를 기록했다가 1년 만에 1600만유로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턴어라운드(흑자 전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매출액은 2014년 휴대전화 사업부를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하면서 118억유로까지 주저앉았다가 2016년 236억유로로 2년 만에 딱 2배가 됐다. 휴대전화 공룡으로 정점을 찍었던 2007년(511억유로)과 비교하면 아직은 절반 수준이긴 하지만, 좌우가 바뀐 ‘J’ 모양으로 다시 성장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노키아는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 피처폰 시장에서 확고한 글로벌 1위 업체였다. 2007년 4분기 시장 점유율은 무려 40%에 달했다. 2위였던 모토롤라 점유율의 3배였다. 그러나 이 시기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하며 노키아는 내리막길을 걷다가 2013년 MS에 휴대전화 사업부를 팔게 된다. ‘휴대전화 공룡의 몰락’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2014년부터 위기의 노키아를 이끈 수리 CEO는 굵직한 인수·합병(M&A)과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노키아를 ‘글로벌 네트워크장비업체’로 완전히 변신시킨 주역이다. 노키아는 2015년 프랑스 네트워크장비업체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합병하며 단숨에 글로벌 네트워크 장비업체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알카텔루슨트는 인터넷프로토콜(IP), 라우터 등 유선통신 장비 분야 강자였다. 이동통신 분야에 강점이 있던 노키아는 인수·합병을 통해 종합 포트폴리오를 확보할 수 있었다.

수리 CEO는 인도에서 태어나 현지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뒤 1995년 노키아 인도 지사에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이후 23년간 인도는 물론 핀란드 본사와 영국·싱가포르 지사에서 사업 개발, 마케팅, 영업, 전략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노키아맨’이다. 2010년 스마트폰 시장에서 고전하던 노키아의 구원투수로 영입된 MS 출신의 스티븐 엘롭 전 노키아 CEO가 휴대전화 사업부를 매각하고 MS로 돌아가면서 논란이 되자 내부 인사로 CEO에 전격 발탁됐다. 직전에는 노키아와 지멘스의 네트워크장비 부문 합작 자회사인 노키아지멘스네트워크(현재 노키아 네트워크 사업부로 편입) 대표를 역임했다. 이때 모토롤라의 네트워크 사업부를 인수해 노키아의 네트워크 사업 역량을 크게 확대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비용을 절감한 공을 인정받았다.



2015년 4월 노키아는 알카텔루슨트를 156억유로에 인수·합병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인수·합병을 발표한 기자회견에서 라지브 수리(사진 왼쪽) 노키아 CEO와 미셸 콤버 당시 알카텔루슨트 CEO가 악수하는 모습. <사진 : 블룸버그>

‘통신장비’ ‘특허’로 사업 단순화

노키아가 휴대전화 사업부를 MS에 매각한 뒤 CEO를 맡았다. 가장 먼저 ‘노키아 10년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무엇인지 소개해달라.
“노키아는 네트워크 장비 회사가 되기로 했다. 5G(5세대 이동통신) 시대에 노키아가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엔드투엔드(end-to-end) 포트폴리오가 필요했다. 엔드투엔드 포트폴리오는 유무선 통신에 필요한 모든 솔루션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동통신 장비뿐 아니라 IP, 라우터 같은 유선통신 장비가 있어야 했다. 노키아는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하기로 했다. 알카텔루슨트는 원하는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었고, 노키아는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다. 성공적인 인수는 기업에 좋은 사업 포트폴리오뿐 아니라 미래 혁신을 위한 역량도 제공한다. 노키아는 이렇게 확보한 포트폴리오를 갖고 장기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알카텔루슨트 인수는 노키아의 규모를 키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업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네트워크 장비 업체로의 변신 과정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네 단계로 진행됐다. 첫번째는 (CEO로 부임하기 전) 노키아의 네트워크 장비 사업 부문 자회사였던 노키아지멘스네트워크를 턴어라운드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노키아는 지멘스 지분 50%를 모두 사들여 회사를 노키아의 네트워크 사업부로 편입시켰다. 두번째는 2013년 휴대전화 사업부를 MS에 판 것이다. 세번째는 (CEO로 부임한 이후) 노키아 10년 계획을 수립한 뒤, 2015년 156억유로에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합병했다. 네번째는 디지털 지도 사업을 하던 ‘히어(Here)’를 매각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노키아는 고객에게 필요한 모든 포트폴리오를 갖춘 종합 네트워크 장비 회사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휴대전화 부문 매각 후 노키아는 통신장비·특허·지도 등 3개 사업부가 있었는데, 통신장비(노키아네트워크)·특허(노키아테크놀로지) 2개 사업부로 크게 재편됐다.”

원래 노키아의 통신장비 사업은 전체 매출의 45%(2012년 기준)를 차지했었으나, 전체 절반가량을 차지하던 휴대전화 사업을 MS에 매각하면서 매출 비율이 90% 수준으로 크게 뛰어올랐다. 2016년 말 기준으로 통신장비 사업은 전체 매출의 92.3%를 차지하고 있다. 특허 사업은 4.4%다.

노키아가 매각한 히어는 자율주행차 핵심인 지도 데이터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히어 매각은 바른 결정이었나.
“노키아는 원래 약 130억유로 규모의 매출을 올리던 회사였다(2015년 말 기준). 알카텔루슨트 인수가 마무리되면서 240억유로 규모의 회사로 덩치가 커졌다. 노키아는 엔드투엔드 솔루션을 제공하는 네트워크 장비회사가 되기로 했다. 그런데 히어는 ‘뉴 노키아’의 전략과 맞지 않았다. 다른 사업부와 시너지를 내기도 힘들었다. 노키아는 2014~2015년 전혀 수익을 내지 못하던 히어를 두자릿수 수익성을 내는 사업부로 바꿔놨다. 이에 따라 자율주행차 업계의 핵심 기술을 보유한 회사로 부상할 수 있었다. BMW·벤츠·아우디 독일 자동차 3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히어 인수를 타진했다. 인수 금액은 히어가 올리고 있는 수익의 몇 배에 달하는 28억유로였다. 꽤 좋은 조건으로 히어를 매각할 수 있었다. 노키아와 자동차 3사 모두에 윈윈(win-win)이었다. 우리는 뉴 노키아에 맞지 않는 사업부를 떼냈고, 자동차 회사들은 자율주행차의 핵심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글로벌 네트워크 장비 업체가 노키아·화웨이·에릭슨 3강 체제로 재편되는 것으로 보인다. 노키아는 어떤 전략으로 맞설 것인가. 관련 업체를 추가 인수할 계획이 있나.
“2006년 네트워크 장비 시장에는 무려 10여곳의 회사들이 있었다. 노키아는 작은 업체들을 인수했고, 에릭슨·화웨이 등 큰 업체만 남게 됐다. 노키아는 IP, 라우터, 트랜스포트(주요 정보통신망과 이용자를 연결해주는 솔루션)를 보유하고 있다. 경쟁자인 에릭슨이 갖고 있지 않은 상품군이다. 우리는 유선 제품을 확보했기 때문에 모든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다. 현재로선 큰 규모의 인수 계획은 없다. 다만 필요하다면 작은 규모 회사는 언제든 인수할 수 있다. 노키아는 최근에도 작은 케이블 회사인 ‘게인스피드(Gainspeed)’를 인수했다. 헬스케어 기기 관련인 ‘위딩스(Withings)’, 인공지능으로 소프트웨어를 분석하는 ‘딥필드(Deepfield)’라는 회사도 인수했다. 이런 인수·합병을 통해 새로운 포트폴리오나 역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양한 회사를 M&A하는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노키아는 150년 넘는 역사 동안 여러 차례 변화했다. 노키아는 많은 회사를 인수했고, 이들과 빠르게 통합해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한 뒤 18~24개월에 통합을 완료해야 했다. ‘뉴 노키아’가 다음 계획을 추진해나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 다른 경쟁자들은 우리 같은 큰 내부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서둘러야 했다. 인수한 회사와 시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조직을 재조정하고 문화를 통합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3년 뒤 어떤 회사를 또 인수하고, 또다시 통합 과정을 거친 뒤, 3년 뒤 또 다른 회사를 인수한다고 생각해보라. CEO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은 직원들이 변화에 강해지도록 만든다. 더 민첩하게 대응해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기술이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서 변화에 강하고 유연하다는 것은 큰 무기다.”

노키아는 1865년 핀란드 제지회사로 출발했고, 1922년에는 케이블 생산업체를 인수해 전화전신사업에 집중했다. 1987년에는 ‘시티맨 900’을 선보이며 휴대전화 시장에 진출했다. 이 시장에서 노키아는 세계 시장 점유율 1위(1998년)에 오르며 크게 부상한다.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한 2007년 노키아는 점유율 40%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는다. 2013년 휴대전화 사업부를 MS에 매각하고, 네트워크 장비 업체로 변신했다.



수리 ceo는 “노키아의 실행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12대 문화 원칙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진 : 정선=c영상마디어 이경호>

휴대전화 사업 발목 잡은 노키아 문화

노키아가 휴대전화 사업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무엇이었나.
“노키아는 휴대전화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는 변화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당시 소프트웨어가 스마트폰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강력한 운영체제(OS)를 보유하는 것이 중요했다. 노키아 OS는 그렇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제대로 된 OS를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인기 좋은 OS와 손잡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노키아는 어느 쪽에도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왜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나.
“문화적인 요인 때문이다. 노키아 문화는 빠르지 않고, 경영진 역시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OS가 매우 중요하다. 노키아는 심비안이라는 자체 OS가 있었다. 그러나 심비안보다 더 빠르고 사용하기 쉬운 OS들이 이미 시장에 있었고, 이런 OS들이 스마트폰에 적용됐다. 사실 노키아도 스마트폰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문제는 비전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요소로 봐야 한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기술이 어떻게 빠르게 바뀌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다음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행해야 한다. 무엇이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행을 해야 한다. 뉴 노키아는 실행에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전략이 아무리 좋아도 이를 실행하지 않으면 어떤 차별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 노키아는 과거의 실패에서 배웠다. 과거 경험을 통해 지금 우리 문화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키아의 실행 문화는 어떻게 개선됐나.
“2009년 노키아지멘스네트워크 대표였을 때 얘기를 해보자. 당시에도 회사 내부에서는 매우 좋은 전략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실행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문화로 정착시키려 했다. 그래서 ‘12대 문화 원칙’을 만들었다. 이 원칙을 하나하나 직접 만들었다. 12대 원칙은 세 가지 주요 요소로 구성된다. 첫번째는 ‘drive(추진력)’다. 그다음은 ‘dare(용기)’다. 실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위험을 감수할 수 있고, 과감하게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도 있다. 그다음은 ‘care(배려)’다. 리더는 직원들을 배려해야 한다. 리더는 자신보다 팀을 우선순위로 둬야 한다. 이 세 가지 밑에 각각 네 가지의 원칙들이 있다. 직원들과 이야기해 보면, 상당수가 이런 원칙을 통해 전략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알카텔루슨트 인수를 생각해보자.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하며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진 직원 5만명이 노키아로 왔다. 노키아에는 노키아지멘스네트워크 직원들도 있다. 노키아에서는 모든 직원들이 섞인다. 모든 것을 합치고 함께 실행해나가야 한다. ‘절대 포기하지 말자’라는 정신도 작용했다. 핀란드에서 이것을 ‘시수(sisu)’라고 한다. 우리의 강력한 움직임은 여기서 비롯됐다.”

시수는 ‘포기는 없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 외세의 지배와 혹독한 추위, 불경기 속에서도 지금의 핀란드를 있게 한 핀란드 고유의 문화다. 핀란드 경제를 이끌던 노키아가 휴대전화 시장에서 고전했을 때 노키아는 물론, 핀란드의 중소 벤처기업들을 중심으로 시수 정신이 다시 부각됐다.

노키아가 휴대전화 사업부를 MS에 팔고, MS가 이 사업부를 다시 HMD글로벌(핀란드 스마트폰 제조 스타트업)에 팔았다. HMD글로벌이 노키아 브랜드 스마트폰으로 성과를 내고 있다. 이 회사를 다시 인수해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 생각이 있나.
“전혀 없다. 2014년 CEO를 맡게 된 이후 노키아 브랜드로 스마트폰을 잘 만들 수 있는 회사를 찾았다. HMD글로벌이 우리에게 노키아 브랜드로 스마트폰을 판매할 수 있도록 라이선스(10년간 배타적 브랜드 이용 권리)를 요청해 왔다. HMD글로벌은 MS 사업부를 인수해 노키아 브랜드 스마트폰을 제조·유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HMD글로벌은 첫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지난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에서 ‘노키아3310(전 세계적으로 1억대 이상 팔린 인기 피처폰)’의 스마트폰 버전을 공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노키아8’ ‘노키아6’ 등을 내놨다. 모두 좋은 기기들이고 이 덕에 노키아 브랜드는 다시 강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노키아는 여전히 사랑받는 브랜드다. 영국의 글로벌 브랜드 평가 업체 ‘브랜드 파이낸스’가 올해 발표한 자료를 보면, 노키아가 글로벌 톱 200위 안에 포함됐다. 원래 335위였는데 150계단쯤 상승한 188위에 이름을 올렸다. 1년 만의 성과였다. 알카텔루슨트 인수와 함께 노키아 브랜드 스마트폰도 영향을 줬다. 노키아의 비즈니스 모델은 심플하다. 우리는 노키아 브랜드에 대한 라이선스와 관련 특허를 HMD글로벌이 쓸 수 있도록 제공하고 이들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이다. HMD글로벌 경영진들은 노키아 출신으로 MS에 갔다가 회사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우리 브랜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

노키아는 휴대전화 관련 특허를 여전히 다 갖고 있다. 특허료로 꾸준히 수익을 올리고 있다.
“우리는 MS에 휴대전화 사업부를 팔면서 10년간의 특허 사용권만 부여했다. 특허 소유권까지 넘긴 게 아니다. 노키아는 지속적으로 특허를 갱신하고 있다. 또 새로운 특허도 지속적으로 출원할 것이다. 노키아는 IP(지식재산권) 관련 3개의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하나는 이전 노키아 휴대전화 기기 관련 포트폴리오다. 두번째는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네트워크 관련 기술이다. 세번째는 벨 연구소(알카텔루슨트 자회사)를 인수하면서 확보한 것들이다. 특허는 지속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노키아의 특허 사업을 담당하는 노키아테크놀로지 부서의 실적은 매우 좋다. 2014년 이 사업부 매출은 6억유로였는데, 2017년에는 17억유로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특허청이 국제표준화기구(ISO)·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전 세계 주요 표준화기구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노키아의 표준특허는 6482건에 달한다(2015년 기준). 핀란드가 보유하고 있는 표준특허 수(6604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표준특허를 보유한 기업은 이 기술을 사용한 모든 기업으로부터 특허료를 받을 수 있다.



지난해 열린 전자통신 전시회 ‘세빗(CeBIT)’에 노키아 벨 연구소 팀이 5G 기술을 적용한 전기 장난감 자동차를 선보였다. <사진 : 블룸버그>

“5G 시대엔 韓·美·日·中이 전략적으로 중요”

올해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 암 조기 진단이 가능한 웨어러블 기기를 향후 1~2년 안에 내놓겠다는 발표도 했다. 디지털 헬스케어가 노키아의 새로운 미래인가.
“5G를 생각해보자. 5G는 다양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산업을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기반 기술이다. 5G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넘어 다양한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노키아는 5G로 할 수 있는 헬스케어에 관심이 있다. 이 역시 네트워크 장비와 마찬가지로 B2B(기업 간 거래) 시장이다. 우리는 건강상태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헬스케어 기기를 연구·실험하고 있다. 웨어러블 기기를 차고 있으면, 벨 연구소가 실시간으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요 수치를 측정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몇 개의 만성 질환을 치료·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이 상당하다고 한다. 헬스케어 사업 부문은 이런 비용을 덜어줄 것이다. 헬스케어는 사후적이 아니라 예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질병 관리도 병원 중심이 아니라 환자 중심으로 옮겨가야 한다. 건강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헬스케어가 노키아의 미래라고는 말할 수 없다. 노키아의 미래는 우리 고객인 사업자들이 산업자동화 등을 통해 다양하게 사업 기회를 확대하도록 돕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객들이 디지털화·자동화하는 것을 지원할 것이다.”

노키아는 한국에 R&D센터가 있고, 5G·국가 재난망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노키아는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서 기반을 마련했다. 수년간 공들인 끝에 한국의 통신 3사와 일하게 된 것이다. 한국은 기술적으로 매우 발전된 시장이다. 기술을 빨리 받아들이는 문화도 있다. 그래서 기술 품질 요건과 기준이 높은 한국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어떤 기술이 첫번째로 보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5G를 세계에서 처음 시연한 것처럼 말이다. 다른 국가들은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한국은 노키아에 매우 전략적인 시장이다.”

KT가 평창올림픽 아이스링크에서 선보인 5G 중계 서비스에는 노키아의 ‘타임슬라이스(time slice)’ 기술이 적용됐다. 타임슬라이스는 카메라를 수십대 설치해서 피사체가 움직이는 장면을 360도로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용량을 한 번에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빠른 처리 속도가 핵심이다.

지금 노키아가 기회를 보고 있는 지역은 어디인가.
“노키아는 글로벌 회사이기 때문에 모든 지역이 다 중요하다. 다만 한국·미국·일본·중국은 기술 선도 시장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4개국에서 많은 기술이 처음 도입되고 있다. 이런 선례를 연구함으로써 기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고, 더 잘 구현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네 곳에 모두 연구·개발(R&D)센터를 두고 있다. 노키아는 이외에도 강한 시장이 많이 있다. 매출로 봤을 때는 유럽에서 전체 3분의 1을 올리고 있다. 인도에서도 노키아가 네트워크 장비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노키아는 글로벌 기업인 만큼 다양한 국가의 임원진들이 있다. 노키아테크놀로지는 한국 출신(이종석 전 삼성전자 북미영업 총괄 부사장)이 이끌고 있다.”

인도 출신으로서 글로벌 회사를 이끄는 것은 어떠한가.
“노키아는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 노키아에는 어떤 편견도 없다. 노키아는 항상 다양성을 중시해 왔다. 운 좋게 적시에 이 자리에 왔다. 노키아 엔지니어로 젊었을 때부터 일을 시작해 20년 넘게 노키아에 근무 중이다. 시스템 마케팅 엔지니어로 있다가 CEO를 맡게 됐다. 노키아는 직원들이 순환 근무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도록 한다. 나는 인도와 싱가포르·영국·독일·핀란드 등에서 일했다. 나뿐 아니라 직원들이 다양한 곳에서 근무하고, 업무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라는 주문이다. 나도 전략, 영업, 기술개발 관련 업무를 두루해 봤다. 큰 업무도 맡아보고, 큰 지역도 맡아보고 큰 사업부도 맡아보는 식이다. 노키아는 직원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중시한다. 적절한 시점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 멘토링해주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리더들이 있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라지브 수리 노키아 CEO. <사진 : 정선=C영상미디어 이경호>

올루·첸나이에 스마트팩토리 가동

장기 출장이 잦은 것으로 알고 있다. 압축적으로 시간을 관리하고 업무를 보는 노하우가 있나.
“노키아가 유럽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장기 출장은 불가피하다. 나는 일과 건강의 균형을 잡으려고 한다. 일주일에 4~5번은 운동을 한다. 종종 헬스장을 찾거나 달리기도 한다. 헬스트레이닝도 받는다. 사실 일하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기도 한다. 일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고객과 시간을 보내고 고객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노키아의 다음 전략을 구상하는 경우가 꽤 많다.”

최근 한 외신 인터뷰에서 ‘미래 물리학(Physics of the Future)’과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 ity is Near)’를 읽고 있다고 했다. 모두 미래 기술과 관련된 책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 영감을 준 책이 있나.
“리더십, 실행, 문화, 미래 기술 관련된 책을 주로 읽는다. ‘미래 물리학’은 정말 좋아하는 책 중 하나다. 이 책은 기술이 향후 10년 뒤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도 재밌게 읽었다. 인공지능(AI) 로봇들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나 헬스케어에 대한 책들도 좋아한다. 아무래도 미래 기술 관련된 책을 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AI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AI가 노키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미 노키아는 AI로 수많은 일을 하고 있다. 우리 사업을 최적화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우리 제품 자체에 AI를 적용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5G에도 AI를 적용할 수 있다. 노키아는 이동통신 네트워크를 서비스별로 분류해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네트워크 슬라이싱(networks slicing)’ 기술을 갖고 있다. 여기에 AI를 적용하면 인간이 개입하지 않고 모든 절차를 자동화할 수 있다. 이는 한 예에 불과하다. AI를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정말 많은데 앞으로 1년간은 벨 연구소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공장 자동화도 마찬가지다. 이미 로봇을 이용한 소규모 공장을 운영 중이다. 최근에 첸나이(인도), 올루(핀란드)에 있는 자동화 공장(스마트팩토리)에 다녀왔다.”

미국에 있는 노키아 벨 연구소 팀과 브레인스토밍을 즐겨 한다고 들었다.
“벨 연구소에는 내게 새로운 것을 꾸준히 알려주는 구루(guru·스승)들이 있다. 벨 연구소 연구원이나 외부 기술 전문가들이다. 연구소를 방문하면 하루 정도를 보내면서 기술을 체험하거나 정기적으로 구루 강의를 듣는다. 브레인스토밍하는 것도 매우 재밌다. 현재 기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1월에 벨 연구소를 방문해 하루 종일 구루들과 시간을 보냈다.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데, 미래 코딩에 관해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AI를 통한 기계 학습으로 소프트웨어 코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헬스케어에 대한 주제로도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큰 의료기기에 들어가는 칩을 1000분의 1 정도로 작게 만들려고 노력 중이다. 여기에 AI를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라지브 수리가 좋아하는 책.

1987년 휴대전화 시장에 진출한 노키아는 20년간 급격하게 성장했고, 2007년을 기점으로 5년 만에 급격히 곤두박질쳤다. 이를 두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불과 수십년 사이에 일어난 롤러코스터 같은 흥망성쇠’라고 표현했다.

라지브 수리가 이끄는 ‘휴대전화 없는 노키아’가 롤러코스터 같은 급격한 재반전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회사의 기반과 인력이 잘 살아있고 매출이 늘고 이익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부활했다’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무리 거대한 기업이라도 그 기업의 이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급변하는 환경까지 막을 수는 없다. 노키아의 핵심가치는 휴대전화나 어떤 통신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에 맞춰 기업 콘셉트를 바꾸고 적응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150년 전통의 이 핀란드 대표기업을 이끄는 인도인 CEO 스스로가 그런 핵심가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 라지브 수리(Rajeev Suri)
인도 마니팔공대 전자통신공학과, 노키아지멘스네트워크 아시아·태평양 담당, 노키아지멘스네트워크 CEO

plus point

노키아와 핀란드 경제
‘노키아랜드’에서 게임·바이오 새 강자로 부상

장우정 기자


살로 시민들이 폐업 안내를 붙인 상점을 지나가고 있는 모습. <사진 : 블룸버그>

“2013년 9월 3일은 핀란드의 국장(國葬)일로 기록될 것 같다.”

한 핀란드 언론은 노키아가 휴대전화 사업부를 마이크로소프트(MS)에 판다고 공식 발표한 날을 이렇게 묘사했다. 핀란드 경제 부흥을 이끌었던 노키아가 핵심 사업을 넘기게 된 것에 대한 한탄이었다.

노키아가 휴대전화 시장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을 당시 핀란드는 ‘단일 기업 경제(one-firm economy)’ ‘노키아랜드(Nokia land·노키아의 나라)’로 불렸다.

노키아는 1998년 처음 글로벌 휴대전화 시장점유율 1위에 오른 후 2010년까지 누구에게도 선두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2000년 핀란드 수출의 20.7%를 노키아가 책임졌다. 법인세 비율도 14.2%에 달했다. 이 시기 노키아의 영업이익은 핀란드 경제 전체가 한 해 동안 생산한 부가가치(GDP)의 4%가량을 차지했다.

스마트폰 시장에 대응하지 못해 본격적으로 구조조정에 돌입한 2010년 노키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대로 곤두박질쳤다. ‘노키아 도시’로 불렸던 핀란드 남서 지역 살로(Salo)도 직격탄을 맞았다. 살로에는 핀란드에서 유일하게 노키아의 휴대전화 제조공장이 있었다. 살로에 사는 인구 5만5000여명 중 약 10%에 달하는 5000명가량이 노키아 관련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노키아가 내는 법인세가 시(市) 세수의 약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휴대전화 사업부 위기가 계속되면서 노키아는 감원을 이어가다 2012년 살로 공장 폐쇄를 결정했다. 하청업체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생산직 노동자 5000명이 실업자 신세가 됐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노키아에서 해고된 인력은 본사 연구·개발(R&D) 인력을 포함해 무려 1만여명이었다.

노키아가 몰락을 가속화하기 시작한 2010년 전후는 유럽 경제위기로 핀란드 경제가 휘청거리던 와중이었다. 2009년 핀란드 GDP가 -8%까지 떨어졌을 때 노키아가 성장률 하락에 3분의 1 정도를 기여했다는 평가도 핀란드 안팎에서 나왔다.


노키아, 해고자에 전직·창업 지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 전자산업을 붕괴시키면서 전자산업의 GDP 비율을 6%(2007년)에서 1%(2012년)로 감소시켰다고 지적했다. 이런 전자산업의 붕괴는 수출 감소로 연결돼 핀란드 무역수지에도 타격을 줬다.

OECD는 그러나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의 경제 위기로까지 전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핀란드에서 게임 산업, 바이오 기술 같은 유망 업종이 부상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실제 노키아는 1만명을 해고하면서 직원들의 전직과 재취업을 지원했다. 해고되지 않았더라도 타 업종으로 전직을 희망하는 직원에게도 직업훈련을 제공했다. 창업을 희망하는 경우 은행 대출을 돕거나 보조금을 지원했다.

노키아가 2004년 이후 글로벌 부품 공급망을 구축하면서 핀란드 내 고용 인력이 주로 R&D 전문가들로 구성됐던 점도 대량 실업을 막을 수 있었다. 노키아 연간 보고서를 보면, 핀란드 내 고용 인력은 1997년 2만여명에서 2012년 1만여명으로 줄어든 반면 해외 인력은 1만7000여명에서 8만6000여명으로 5배 정도 늘었다.

 

장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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