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문재인(가운데) 대통령이 입장하고 있다. 왼쪽은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오른쪽은 임종석 비서실장. 사진 연합뉴스
지난 5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문재인(가운데) 대통령이 입장하고 있다. 왼쪽은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오른쪽은 임종석 비서실장. 사진 연합뉴스

한국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꼽히는 바이오 산업의 관계자들은 최근 금융관료들을 성토하기에 여념이 없다. 대표적인 국내 바이오 업체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여부에 대한 판단을 1년 넘게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분식회계 의혹을 풀지 못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주가는 60만원대에서 28만원대까지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대표 바이오주로 꼽히던 삼성바이오로직스 주가가 부진한 흐름을 이어가면서 다른 바이오주도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 바이오로직스 주주는 “경제관료들이 바이오산업을 밀어주는 것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여부에 대한 결론이라도 빨리 내줘야 시장 혼란이 줄어들 것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2017년 2월 심상정 정의당 의원과 참여연대는 금융감독원에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분식회계를 했다며 특별 감리를 요청했다. 1년간의 검토 끝에 금감원은 지난 5월 분식회계로 최종 결론을 내리고, 기업의 분식회계 여부를 최종 판단하는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로 공을 넘겼다. 하지만 7월 증선위는 분식회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논리가 충분하지 않다며 금감원에 재조사를 명령했다. 금감원은 최근에서야 재조사를 시작, 올해 안에 결론을 내겠다는 방침이지만 증선위가 이를 다시 심의해 최종 결론을 내는 데는 해가 넘어갈 전망이다.

한때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관료들이 성장의 발목을 잡는 원흉이 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를 비롯해 금융당국이 청산가치가 더 높은 것으로 나온 부실 조선사 STX조선해양에 혈세 4조5000억원을 투입한 것이나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규제 마련을 질질 끌면서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지도록 방치한 것 모두 금융관료들을 관류(貫流)한 결정 지연과 보신주의가 작용한 것이다. 한 금융당국 고위 관료는 “공무원은 정부 기조에 맞춰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신주의’라는 게 기본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특히 이번 정부는 관료를 아예 배제하고 청와대가 직접 나서는 경우가 많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라고 토로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관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정확히는 부처간 컨트롤타워인 ‘기획재정부’와 일명 서별관회의(청와대에서 진행한 비공개 경제·금융 점검 회의)로 불리던 ‘청와대와 정부 관료간 조율 기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청와대와 정부 부처가 한팀으로 움직였다. 청와대 비서실장하에 있는 경제비서관, 교육비서관, 환경비서관 등 각 비서관들은 정부 부처 한 곳과 매칭됐다. 비서관의 스태프는 5~10명 정도다. 이 규모로 움직이는 청와대와 500~1000명가량 되는 정부부처 간 팀워크에서 청와대의 큰그림을 구체화하는 것은 정책 전문성을 갖춘 정부 몫이었다. 비서관이 대통령의 국정과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해당 부처가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거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해 정책 조정에 나서는 식이다.


지난 7월 김용범 증권선물위원장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에 관한 주요 사안을 금융감독원에 재조사할 것을 명령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 7월 김용범 증권선물위원장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에 관한 주요 사안을 금융감독원에 재조사할 것을 명령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기재부 배제하는 청와대 비서실

기초노령연금을 모든 노인층에 월 20만원씩 지급하겠다던 박근혜 정부 공약 사항이 노인 가운데 소득 하위 70%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최종 조정된 것 또한 재정 여력이 없다는 정부 부처의 의견이 반영된 팀워크의 산물이었다. 청와대와 정부간 의견 차이가 있을 때는 전문성을 가진 각 부처 장들이 총집결해 서별관회의를 열었다.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을 지낸 유민봉 자유한국당 의원은 “이 자리에서 국민 여론, 정책 대상집단에 미칠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했고 이 결과를 대통령이 최종 승인해, 경제부총리를 겸직하는 기재부 장관이 발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문 정부 들어서는 주요 정책을 만들거나 발표할 때 경제부총리 대신 청와대가 직접 전면에 나서면서, 이런 상식이 깨지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은 기재부를 배제하고 곧바로 해당 부처에 의견을 구하거나 대통령 메시지와 방침을 전하고 있다. 청와대 사정을 잘 아는 한 공무원은 “청와대가 이념, 이상에 따라 ‘공중전’을 펼친다 하더라도 실제 해당 지역을 접수하는 ‘육탄전’에 공무원들이 적극 뛰어들어야 한다”며 “공무원들이 청와대 입김에 손을 놓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정책목표 달성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plus point

‘영혼 갖고’ 일했더니 적폐라고?
이중구속의 딜레마에 빠진 관료들

“공직자는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혼 없는 공직자가 돼선 안 된다.”

2017년 8월 부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공무원은 소신을 갖고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취지로 한 말이다. 문 대통령의 주문이 나온 지 일 년이 지났지만 공무원들은 여전히 ‘영혼 없이’ 일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에서 활동한 영국 태생의 문화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은 ‘이중구속(double bind)’이라는 심리학 이론을 제시했다. 무언가를 하도록 말하고,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듯한 몸짓을 했을 때 이 두 가지에 모두 구속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뜻하는 용어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이에게 “놀아~ 대신 성적 떨어지면 용돈은 없어”라고 말했을 때 아이는 놀지도, 그렇다고 (놀라고 했으니) 공부하지도 못하는 이중구속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문 대통령이 공무원의 영혼 장착을 주문하기 직전이었던 지난해 7월 청와대는 법무부를 제외한 19개 정부 기관에 ‘적폐청산을 위해 부처별로 태스크포스팀(TFT)을 꾸리고 이에 대한 운용계획을 회신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명의로 발송된 이 공문은 곧 ‘문 대통령의 뜻’이었다. 각 부처는 부랴부랴 적폐청산위를 신설했다. 적폐청산 과정에서 전 정부에서 열심히 일했던 공무원들은 검찰에 기소되거나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을 지켜본 동료 공무원들은 “내가 검찰에 간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 두렵고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유민봉 자유한국당 의원은 “소신껏 일했다가 문 정부에 찍힐 수 있고, 운 좋게 넘어갔더라도 다음 정부 때 다른 동료들처럼 적폐로 몰려 검찰 수사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며 “공무원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구속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우정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