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 이야기를 다룬 영화 <청연>에서 박경원(장진영 분)은 1925년 비행사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첫 비행에 성공한 후 고국 방문 비행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녀는 숱한 어려움을 겪는다. 인상 깊은 대사는 박경원의 애인 한지혁(김주혁 분)이 왜 어려운 꿈을 포기하지 않느냐고 다그쳤을 때 그녀의 답변이다. “하늘에 올라가면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런 게 다 상관이 없잖아. 그래서 난 하늘이 좋아.” 영화의 엔딩은 악천후 속에서도 조선을 거쳐 러시아를 향한 비행을 감행한 박경원이 영원한 비행으로 세상을 등지는 장면이다. 어느 분야에서나 ‘최초’란 수식어는 의미 깊다. 더구나 그것이 여성이라면 그 의미는 더욱 배가된다. 사회 곳곳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눈부신 요즘, 첫 물꼬를 텄던 그녀들의 DNA가 궁금하다.

“만지면 뜨겁다는 것을 알면서도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도전의식 소유자들”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파워가 거세다. 여성들은 과거 사회적 성공 자체로 관심을 받았지만 이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사회 곳곳에서 왕성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때문에 ‘여성 리더’라는 말 자체를 거부한다. ‘여성’이란 수식어로 무대를 한정 짓는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 발상이 돼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최근 최진배 경성대 교수 연구팀은 흥미로운 조사를 했다. 1998년에서 2006년까지 기업의 재무자료를 바탕으로 남성CEO기업 1만1375개와 여성 CEO기업 613개사의 경영성과를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총자본경상이익률, 총자산순이익률, 총자본회전율, 총자본투자효율 등 4개 지표에서 모두 여성 CEO기업이 남성CEO기업보다 우수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들어 수익성을 나타내는 총자본경상이익률의 경우 여성CEO기업은 평균 8%였지만 남성CEO기업은 5.5%에 그쳤다. 총자산순이익률 역시 각각 75.%와 5.2%로 조사됐다. 최진배 교수는 “이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 여성 경영자의 위험 회피 성향 등으로 여성CEO기업이 남성CEO기업보다 경영성과가 떨어진다는 국내외 기존 연구결과와 대비되는 결과여서 주목된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990년대 기업 내 여성 인력 이슈가 성차별이었다면 21세기의 화두는 여성 인력의 저활용이라고 밝혔다. 여성 인력의 저활용은 기업 인적자원의 문제, 나아가 국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걸림돌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여성 인력의 사회 진출이 급속히 빨라진 건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경제상황이 소프트화되면서 여성 인력이 활약할 수 있게 됐고 또 비교우위를 갖는 경제 공간도 많아졌다. IT 업종과 서비스 업종의 확산이 대표적 예다.

 지난 해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조사에 따르면 서비스업 평균 여성 인력의 비율은 20.8%로 제조업 평균 17.3%보다 높게 나타났다. 유통은 42.5%, 전자는 33.2%가 여성 인력이며 업종 특성상 기계, 철강, 조선, 자동차 등은 여성 인력이 4% 미만인 것으로 집계됐다.

 여성 인력이 활용도를 높여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통계수치로도 증명된다. 이 조사결과에 따르면 매출 성과가 높은 기업일수록 여성 근로자의 급여 수준이 높고 근속연수가 길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전경련은 “한정된 대기업 일자리를 남녀가 나눠 갖는 형태의 고용 평등을 지향하기보다는 그에 앞서 양질의 일자리 자체를 더 늘리는 노력이 시급하다”는 의견을 냈다.

 여성 인력의 적극적인 활용을 기업 경영의 화두로 잡고 성공한 예는 해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IBM의 경우 여성 인력 활용으로 혁신 이미지의 맥을 계승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대규모 감원으로 충성도와 공공의 평가가 추락했다. 당시 벼랑 끝에 몰린 IBM의 선택은 흥미롭게도 ‘전통 되살리기’였다. 이중 하나가 여성 인력을 적극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1930년대 미국 최초로 대졸 여성 채용공고를 냈던 회사가 다름 아닌 IBM이었기 때문이다.

 회계법인인 딜로이트 컨설팅의 경우 1990년대 초반 조사한 여성들의 퇴직 사유는 가사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조직 내에서 비전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조사를 토대로 딜로이트는 여성 인력의 유지와 승진의 단계별 계획과 목표치를 적용하는 인사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 딜로이트의 파트너 중 여성 비율이 5%에서 14%로 증가했다. 이는 조직문화의 변화로 이어졌고 미국 회계 컨설팅 업체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여성 사회 진출 장벽 ‘상위직 진급 단절’

 하지만 여성이 일정 수준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벽도 엄연히 존재한다. 여성 리더들은 빠른 변화 속에서도 아직까지 가야할 길은 멀다고 말한다.

 최근 한국여성개발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졸 이상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으로 소득 2만달러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 인력활용이 절실한 상황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 활동을 하는 여성이더라도 남녀간 직군, 직무 분리, 결혼, 육아,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등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여성의 상위직 이동은 큰 방해를 받고 있었다.

 주요 선진국들의 경우, 1인당 국민 소득이 1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가는 시기에 여성 경제활동 참여율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스웨덴의 경우,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시절에는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69.1%에 그쳤지만, 2만달러 때에는 80.1%로 올라섰다. 노르웨이는 56.7%에서 70.7%로, 미국은 53.7%에서 63.0%로, 캐나다는 52.5%에서 62.3%로 상승해 여성의 경제활동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의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2007년 현재 49.3%로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 무려 20%포인트의 격차를 드러내고 있으며 OECD 30개국 중 27위에 머물렀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졸 이상 고학력자의 경제 활동 참가율은 59.1%로 OECD 평균인 82.0%에 크게 미달하며 OECD 최하위를 기록했다.

 김영옥 한국여성개발원 인적자원 연구실장은 “우리나라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자녀의 출산과 양육기에 노동시장 이탈이 이뤄진다는 점”이라며 “선진국에서 이 같은 현상은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상승하면서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실제 20년간 은행에 근무해온 한 여성 지점장은 “여성 입사 동기 20명중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다”라면서 “승진시험을 포기하고 육아에 전념하겠다고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특히 대졸 이상 고학력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이탈한 후 노동시장 재진입을 포기하는 추세가 1990년 이후에도 여전했다. 30대 초반까지는 남성보다 긴 근속연수를 기록하던 여성이 30대 중반 이후 평균 근속연수가 5~6년 수준에서 제자리걸음을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임금에서도 2005년 급여 총액이 남성은 192만2000원(월기준)을 기록한 반면 여성은 131만 6000원에 머물러 남성 임금을 100으로 할 때, 여성 임금은 68.5에 머물렀다.

 김영옥 실장은 “여성들도 지속적으로 근무 역량을 강화해 소속 기업에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고 진입장벽이 높은 직무나 직군으로 이동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면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높이고 교육훈련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야별 최초 여성들은 누구인가?

 가야할 길이 멀지만 현재 이만큼 대한민국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해진 건 ‘보이지 않는 벽’을 무너뜨리고 ‘최초’를 찍은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근 들어 가장 눈길을 끄는 ‘1호’는 바로 우주인 이소연씨. 그는 한국 최초 우주인이자 세계 49번째 여성 우주인으로서 역사에 기록된다.

 각 분야별 최초의 여성을 보면 우선 정계에서는 지난 2006년 참여정부 때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가 탄생하기도 했다. 재야 여성 운동가 출신의 한명숙총리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여성부, 환경부 장관을 역임한 재선(16,17대) 의원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초 여성 국회의원은 임영신 중앙대 초대 총장을 들 수 있다. 임영신 총장은 1948년 제헌국회 첫 여성 국회의원이 됐고, 1948년부터 1년간 첫 여성 상공부 장관으로 일했다.

 사실 우리나라 여성의 활약은 국가고시 합격자 비율로 많이 대변된다. 국가고시 여성 합격자 비율은 2008년 현재 행정고시가 49%, 사법시험이 35%로 매년 높아지는 추세다.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 37기 여성 사법연수생은 312명으로 전체 수료자 973명의 32%를 기록, 지난해 242명(24.8%)보다 7.2% 포인트 증가하는 등 역대 가장 많았다.

 참여정부 때 여성 최초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강금실 장관은 당시 일부 검사들의 반란을 잠재우고 당차게 사법 개혁을 이뤄내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는 법조계에서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가장 많이 붙는 인물이다. 형사단독 판사, 법무법인 대표, 민변간부(부회장), 법무부 장관까지 그가 거쳤던 모든 직책은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여성 최초 변호사는 훨씬 전에 탄생했다. 1946년 32세의 나이로 서울대 법학과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입학한 이태영 변호사는 1952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첫 여성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운 여성 운동가로 가족법 개정운동을 벌여 이혼 여성의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하게 하는 등 인습에 맞서 싸운 실천적 지식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또 이번 18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 비례대표 후보 1번이었던 이영애 최고위원도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럿 거머쥔 인물이다. 여성 최초 고법부장판사와 법원장(춘천지법) 등을 지냈으며 사법시험 사상 수석합격자가 여성이었던 건 그가 처음이었다.

 경제계 최초 여성들도 눈부시다. 여성최초 경제학 박사인 김애실 한나라당 의원은 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1번으로 선정돼 의정활동을 했다. 또 여성 금융통화위원회 1호인 이성남 의원은 이번 18대 국회의원 통합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선정됐다.

 재벌급 기업인으로는 애경그룹의 장영신 회장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1998년 세계 연감에 가장 먼저 오른 한국 여성 기업인이다. 비록 애경유지 창업자인 남편과의 사별로 경영일선에 나섰지만 그가 처음 회사를 맡았던 1970년 총매출액 24억원이었던 애경그룹은 2007년 2조원을 넘어서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여성 기업인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처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여성 기업인의 위상도 변하고 있다. 그 변화를 벤처기업이 주도했다. 여성 기업인의 전성시대를 연 여성 벤처기업인은 5%가량에 불과하지만 이미 국내 벤처업계의 주류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여성 벤처 역사는 1998년 전후 벤처붐과 궤도를 함께 한다. 2000년 이후 벤처 거품이 급속히 빠진 가운데서도 여성 벤처는 건재함을 과시했다. 여성 벤처기업인 1세대는 정희자 오토피스 엔지니어링 사장, 이영남 이지디지탈 사장 등이며, 서지현 버추얼텍 사장, 김혜정 삼경정보통신 사장, 이수영 아이콜스 사장, 박지영 컴투스 사장, 양윤선 메디포스트 사장 등은 그 다음 세대로 분류된다.

 여성 벤처기업인 1호인 정희자 사장은 39세 나이로 지하철 발매기를 생산하는 오토피스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를 창업해 성공을 거뒀다. 바이오벤처 코스닥 등록 1호 기업인 메디포스트의 양윤선 사장과 컴퓨터 3대로 시가총액 1200억원대 회사를 일군 서지현 버추얼텍 사장도 벤처업계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편 국내 여성 기업인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해외 언론도 한국 여성 CEO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4년 <월스트리트저널>과 경제주간지 <포춘>이 선정하는 ‘여성 기업인 50인’에 한국 여성 CEO가 포함됐다. 첫 테이프를 끊고 순위에 오른 인물은 단 두 명이었다. SK텔레콤의 윤송이 상무와 성주인터내셔널의 김성주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윤 상무는 기업 최연소 여성 1호로 유명한 인물이다.

 금융권의 경우에도 여성 인력들의 약진은 거듭되고 있다. 지난해 금융권 취업자 10명 중 6명이 여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연구원 산하 금융인력네트 워크센터가 금융권 6개 업종 167개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2007년 인력 채용 결과를 조사한 결과 전체 채용 인원 1만9051명 중 여성 취업자가 1만1343명으로 59.5%를 차지했다. 하지만 국내 금융권에서 고위직 여성 비중은 아직까지 다른 분야에 비해 극히 낮은 편이다. 은행의 부행장이나 증권사의 임원으로 여성이 발탁되면 한차례씩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정도다. 금융권의 여성 CEO는 전무하다.

‘최초’라 불리는 여성 리더들의 DNA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여성 1호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사회 곳곳에 여풍(女風)이 불고 있지만 롱런하는 여성 리더는 아직까지 많지 않다. 기업에서 여성 직원들의 수적 비중은 높아졌지만 자리가 올라갈수록 그 비중은 현격히 적어진다. 하지만 이런 벽을 허물고 도전에 성공한 여성도 적지 않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입을 모은다. 여성이기 이전에 조직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충실했을 뿐이라고. 물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일례로 기업의 임원회의 석상에서 홍일점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사실. 이런 현실에서 건재하게 자신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그들만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보험사 최초 여성 임원이며, 장수(長壽)를 누리고 있는 푸르덴셜생명의 손병옥 부사장, 증권업계 최연소 여성 임원으로 관심을 집중시켰던 위민선 미래에셋증권 상무, ‘금녀의 벽’을 뚫고 굴지의 포스코에서 최초 여성 공장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지은 포스코 광양제철 공장장, 지구상 가장 힘들다는 ‘지옥의 레이스 파리-다카르랠리’에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 출전한 김태옥 카레이서. ‘최초’를 찍은 이들 4명의 여성에게 비결을 물었다.

보험사 여성 최초 임원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부사장

 보험사 최초 여성 임원인 손병옥(55) 푸르덴셜생명 부사장은 ‘푸르덴셜의 어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부하 직원 들을 내 가족 대하듯 따뜻하게 이끌어 주는 손 부사장의 진심이 회사 곳곳에서 유명하기 때문이다.

 “난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몇 년 전 한 언론사에서 성공한 여성으로 나를 인터뷰하러 왔다가 그러더군요. 솔직히 실망했다고요. 부드럽고 포용력 있는 내 이미지가 기존 상상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는 겁니다. 아마도 강력 하고 칼 같은 이미지를 연상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난 생각이 다릅니다. 여성이라고 하는 내가 가진 장점을 살리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30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를 떠받쳐준 요소는 남다르다. 그는 1974년 체이스맨하탄은행에 처음 입사해 1993년까지 홍콩상하이은행을 거쳤고, 1996년 푸르덴셜생명 인사부장으로 입사해 12년 동안 건재하게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직위보다는 아이디어, 경쟁보다는 배려, 당장 나만의 이익보다는 모두를 위한 균형감각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는 말한다.

 “이런 일이 있었죠. 육아휴직을 하게 된 부하 직원 이 당연한 휴직인데 자신이 왜 눈치를 봐야하는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겁니다. 난 그 직원을 크게 혼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고귀한 일이지만 직원으로서 다른 동료 직원들을 생각해보라고 말입니다. 본인의 빈자리로, 동료들 업무가 아무래도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인데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자로 잰 듯 직장생활을 하기보다 배려심을 갖고 서로 화합하면 결국 그 이득은 본인에게 돌아오는 겁니다.”

 이어 그는 푸르덴셜생명에서는 육아휴직으로 장기휴가를 다녀와도 본래 업무로 복귀시키는 게 원칙이라고했다. 회사에서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고 복지를 철저하게 지켜주면 직원들은 그만큼 충성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손 부사장의 이런 생각은 회사 분위기에도 큰 영향을 줬다. 푸르덴셜생명은 업계에서는 이미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이라는 입소문이 파다하다.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해서 프로의식을 강조하지 않는 건 절대 아니다. 인사를 담당하는 손 부사장은 신입 직원 을 뽑을 때 성실성을 가장 먼저 본다고 했다. 성실한 사람만이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 자신도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의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다. 매일 아침 출근 전 CEO를 위한 조찬모임이나 강연에 꼭 참석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은 영어과외도 받는다.

 “미국 대사였던 남편 때문에 3년간 미국에서 살았고 외국계 은행에도 오래 근무했던 내가 꼬박꼬박 아침 일찍 영어과외를 받으니 직원들이 의아해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일부러 그러는 겁니다. 영어공부라는 게 끝이 없기도 하지만 자기계발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녁때 일주일에 4번 이상은 꼭 집 근처 양재천을 걷고, 매일 아침마다 108배를 거르지 않을 만큼 건강관리도 철저하다. 걷기운동을 할 때 MP3P에 녹음된 영어책을 듣는데 최근에는 <힐러리 로담 자서전>에 푹 빠져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늘 치열하게 살았지만 이젠 습관이 돼버렸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급이 올라갈수록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인적 네트워크입니다. 후배 직원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정 안되면 가정에 안주하면 된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 장기적인 안목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일을 너무 사랑하면서도 더 고귀한 건 바로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손 부사장이기에 육아문제 등으로 고민을 안고 있는 후배들에게 늘 강조하는 건 균형감각이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생각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슈퍼우먼이 돼야 한단 얘기는 아닙니다. 프로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하다보면 당연히 일욕심이 생기죠. 이때 엄마나 아내로서의 역할이 필요한 일이 겹치면 갈등하게 되는 건 당연합니다. 난 이럴 때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일이 중요하더라도 만약 엄마나 아내로서의 신뢰를 잃게 된다면 일정 부분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균형감각이 장기적으로는 사회인으로서도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그는 말했다. 때문에 그는 직원교육을 위한 강의에서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시간을 잘 쪼개서 활용하는 원리는 항아리에 돌, 자갈, 모래, 물을 담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항아리에 가장 큰 돌을 먼저 넣고, 그 사이 자갈을 채운 후 모래와 물을 담으면 되지만 만약 물을 먼저 담으면 모두를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손 부사장이 몸담고 있는 푸르덴셜생명의 창업이념은 ‘인간사랑 가족사랑’이다. 사회공헌재단의 상근이사직도 겸하고 있는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전 직원의 노력으로 현재 기업문화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정착했다고 자부한다. 최근에는 직원교육에 집중하고 있는 손 부사장이 앞으로 기대하는 건 직원 개개인의 발전이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뛰어난 인재로 거듭나는 게 바로 회사의 발전이라고 믿고 있다.

여성 최초 공장장 오지은 포스코 광양제철소 도금부 1도금 공장장

 “입사 후 지금까지 ‘여성 1호’라는 타이틀을 부담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지 제가 맡은 분야에서 ‘Only 1’ 또는 ‘Number 1’이 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합니다.”

 2007년 포스코 광양제철소 도금부 1도금 공장장으로 임명된 오지은씨(42). 국내 최초 여공장장으로서 그동안 남성 전유물로만 여겨져 온 철강 업계에 여성 파워 시대를 열었다.

 오 공장장은 1990년 대학 졸업 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여사원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이후 품질관리부와 생산기술부를 거쳐 1999년부터 냉연강판의 품질 개선 업무를 담당해 왔다.

 여성 공채 1기로 입사했기 때문에 무조건 ‘여성 1호’가 된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맡은 임무를 완수하고자한 남다른 노력 끝에 얻은 성과라고 할 수있다. 청색 작업복을 입고 안전모를 쓴 여느 남성 직원들과 똑같이 일하고 또 함께 승진했다고 한다.

 2002년 품질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제철소장 표창을 받았고 2003년 기업경영혁신기법(6시그마)의 GB(Gre en B elt) 인증 을 시작으로 BB(Black Belt) 등 여성 최초로 MBB(Master Black Belt) 자격을 차례로 취득, 직원들의 혁신 마인드 전파에 탁월한 소질을 지녔다는 평과를 받았다.

 “공장장으로 부임한 뒤 현장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손을 마주잡으며 가능한 한 여성 상사라는 부담을 덜 느끼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오 공장장과 직원들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이메일로 상호의견을 전달하고, 사내 인트라넷를 이용한 온라인 대화. 경영환경 변화 및 공장비전·목표 및 안전의 중요성 공감대 형성을 위한 정례교육을 실시한다. 또한 현장 작업 관찰시 잘한 점은 적극 칭찬하고, 잘못된 점은 대화를 통해 본인이 인정하고 재차 실수하지 않도록 시정권고를 하는데, 조직 관리에 큰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여성 경영자가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저 역시 창의적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도록 부하 직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제 자신이 높은 성과를 보임으로써 모범이 될 수 있는 리더로서 부상해 나갈 것입니다.”

 광양제철소를 이끄는 남성 못지않은 강인함을 지닌 오 공장장은 총 81명의 남성 직원들을 이끈다. 그는 “남성 직원들을 여성과 대별해 정복 대상으로 생각한 적은 없다”며 “조화롭게 일하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했다. 여성의 부드러움, 꼼꼼함, 친화력, 한 가지 일에 몰두하기 등을 업무 시 적절히 활용해 보람과 성취, 그야말로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린다고 한다.

 오 공장장은 현장에서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직원들의 안전에 신경을 쓸 것이고 그동안 쌓은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직원들에게 섬세한 리더십으로 다가가겠다고 말했다.

 “직원 부인 생일 때 와인을 선물하고 결혼기념일에 케이크를 보내 가족을 챙겼더니 다들 좋아하더라고요.”

 그는 회사에서도 알아주는 노력파다. 직장에 다니면서 포항공대에서는 화학을, 순천대에서는 금속재료공학을 전공해 석사학위가 두 개나 된다. 포스코 버전인 ‘새로운 성공신화 창조’의 주역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기 위해 애쓴다.

 “제 인생의 목표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 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우선 심신이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으며 매일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로 인한 성취와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더불어 저로 인해 저와 함께 하는 분들이 함께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증권사 여성 최연소 임원 위민선 미래에셋증권 SOC본부 이사

 미래에셋증권의 위민선(40) SOC(사회간접자본)본부 이사는 여성 임원을 찾아보기 힘든 증권 업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다. 2년 전 그는 30대 나이에 증권업계 최연소 여성 임원으로 전격 발탁돼 한동안 신문 한쪽을 장식했다. 게다가 최근 증권사들이 주력하고 있는 게 IB(투자은행) 부문임을 감안하면 미래에셋증권이 SOC본부의 수장으로 30대 여성 임원을 선택한 건 확실히 눈에 띄는 일이다. 인터뷰를 위한 자리에서 사진과는 달리 유한 인상이라고 첫인사로 칭찬을 건네자 바로 화답이 돌아왔다.

 “다들 첫인사로 인상이 좋다고 하네요. 신문에 소개된 기사나 사진을 보고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게 느꼈나 봅니다. 사실 증권 업계에서 여성 임원은 손에 꼽을 정도이니 선입견이 생길 만도 할 겁니다.”

 위 이사는 임원이라는 직책에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부담스럽다고 운을 뗐다. 글로벌 경쟁력을 논하는 시대에 성별을 구분하는 건 너무 구태의연하다는 것이다. 본부장회의, 컨소시엄회의, 정책논의 등 모든 회의석상에서 홍일점인 그녀지만 막상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어렴풋이 감지하는 건 남들보다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주변 환경에 좌지우지되지 말고 자신이 진정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내라고 충고한다. 직장 초년병 시절 그에게도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여사원들은 결혼과 동시에 퇴직을 하는 게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위 이사 자신의 경우 그런 압박을 받지 않았던 게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방해요소를 극복하는 건 본인 스스로의 의지에 달렸다고 했다.

 사실 2005년 그가 미래에셋증권 부동산금융본부 SOC팀에 부장으로 입사할 때만 해도 차장급 이상의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과장급도 5~6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회사 초년병 시절에는 사회 분위기 자체가 여성들의 경우 전문성을 요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는 게 흔치 않았습니다. 때문에 혹시 실수를 하더라도 애널 리스트로서의 자격이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 오해를 받게 될까봐 조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19년 동안 직장생활을 돌아봤을 때 여성이라는 점을 인식해 선을 그었다면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처음 금융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 1990년 대우투자자문의 애널리스트로 입사하면서부터다. 시스템이 전산화 돼있지 않았던 때였는데 애널리스트라고 찍힌 명함 자체가 생경했다고 한다. 1992년에는 에셋코리아 투자자문에 입사했고, 1998년 리젠코리아라는 일반 사무수탁사를 창립했다.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쪽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대우투자자문도 갓 설립된 회사였고 현재 맡고 있는 분야도 그렇습니다. 만지면 뜨겁다는 것을 당연히 알면서도 꼭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웃음)”

 현재 그가 맡고 있는 미래에셋증권의 SOC본부는 최근 국내 증권사 IB로서는 굵직한 프로젝트를 맡아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SOC는 국가가 진행하는 사회기간산업에 민간투자를 유치하는 일로 업무에 있어 정해진 규칙이 없다. 그에게는 이런 점이 매력이다.

 “실제 IB 업무는 고도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분야입니다. 어떤 프로젝트를 어떤 상품에 담고 어떻게 펀딩을 진행해야 하는지 등등….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그가 부하 직원 들에게 늘 강조하는 게 바로 독서다. 일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되,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게 그의 방식이다. 최선의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그를 포함해 모든 팀원들이 주말 출근도 불사한다. 아이를 둔 엄마로서 힘든 점이 많을 듯 했다.

 “이제 애들은 엄마가 바쁘다는 데 너무 익숙합니다. 결혼 초기 애들이 어렸을 땐 어떻게 지냈나 싶어요. 실제 우리 아이들은 동네 아주머니와 학교 선생님이 키운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이런 위 이사가 일이나 가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화합이다.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직장 내에서도 독불장군식 태도는 경계하려 한다. 특히 IB 분야에서는 유능한 인재가 많고 네트워크가 훌륭한 직원이 많아 자칫 자만에 빠질 수 있는 부하 직원들에게도 이를 강조한다. 조직 내에서 필요한 게 뭔지를 알고 그 원칙 내에서 가야할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일에 있어 전문성은 학위나 경력으로 측정될 수 없는 부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나는 전문성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원칙으로 해야 하는가를 찾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최초 카레이서 김태옥씨

 “네 아이의 엄마였지만 과감하게 도전했어요.”

 스피드에 못 이겨 자동차 엔진에서 불이 나기도 하고, 차가 뒤집혀 피가 역류할 것 같은 아찔함을 느껴야 하는 카레이스. 남자들도 간이 크지 않으면 하기 힘든 카레이서에 도전해 여성으로서 당당히 서킷에 선 강심장이 있다.

 1996년 파리에서 세네갈의 다카르까지 사막 코스에서 벌어진 파리-다카르 랠리. 완주율이 20~30% 정도에 그쳐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지구상 최악의 랠리에 한국 최초의 여성 레이서 김태옥씨(53)가 출전했다.

 1남3녀의 어머니인 김씨는 이 대회에 참가하기에 앞서 유서를 남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릴과 도전을 즐기는 드라이버라면 한번쯤 꿈꾸는 ‘꿈의 랠리’이기도 하다.

 ‘인생은 도전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외치는 그녀의 말을 실감케 한다.

 “저도 사실 겁이 났죠. 카레이서에 입문한 뒤 처음 참가했던 영종도대회에서 출전 바로 직전에 대형사고가 있었어요. 너무 놀라서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죠. 그런데 사고 현장을 열심히 사진 찍고 있던 한 여인이 제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나는 사고 난 선수의 부인인데, 자동차 경주를 오래 하다보면 저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냈죠.”

 결혼 후 전자 관련 사업을 하며 여느 주부와 다름없이 평범한 생활을 하던 김씨는 30대 후반에 반란을 일으켰다.

 “스피드의 쾌감과 불꽃 튀는 레이스에 성별이 따로 없죠.”

 AEKN의 모터스포츠 중계를 보고 속도에 대한 외경심에서 카레이스를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다가갔어요. 운전만큼은 자신 있다는 생각에 마음만 앞섰죠. 카레이서가 뭔지 어떻게 하는 건지에 대한 사전지식 하나 없이 덜컥 발을 내딛었는데 차츰 경력이 쌓일수록 모터스포츠의 마력에 깊이 빠져들게 되더라고요.”

 30대 후반 새로운 세계에 뛰어든 김씨는 힘겨운 과정을 통해 남자들도 힘들다는 카레이스에서 걸출한 실력을 과시하며 여성 카레이서 붐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20여 대회에 출전했던 김씨는 1991년 올림픽 심카나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15여 차례의 수상을 기록했다.

 “1989년 입단을 위해 찾은 볼케이노팀의 첫 반응은 한마디로 아줌마가 주책이야 하는 투였어요. 하지만 그런 걸로 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죠.”

 여성이라는 고급 자원을 차별이라는 바보짓으로 낭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카레이서가 여자들에게 힘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남자들 틈에서 밤을 새우며 자동차를 정비하고, 드라이빙 테크닉을 익혀 가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경기장 밖에서 제 아무리 베스트 드라이버라 해도 카레이서로서 익히는 테크닉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제 운전 실력에 실망도 많이 했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테크닉을 익히는 게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성 최초의 레이싱팀 단장으로서 17년간 자리를 유지해오고 있는 김씨는 그의 남편 박정용씨와 함께 아시아 크로스컨트리 랠리(2008 ASIA CROSS COUNTRY RALLY)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실제로 카레이서들 중에는 차분하고 섬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칠고 공격적인 사람은 절대 레이싱을 할 수 없어요."

 카레이서로 대성하기 위해서는 침착한, 섬세함 등 인간의 기본적 자질이 기량보다는 중요하다는 것이 김씨의 지론이다.

태은경 기자 , 김보람 인턴기자 / 사진 : 사진 봉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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