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훈 한국외국어대 졸업,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장지훈
한국외국어대 졸업,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6월 30일, 산케이신문에 의해 일본의 대(對)한국 무역제재 가능성이 처음 제기되고, 믿고 싶지 않았던 그 이야기들은 채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그 이후 우리 사회는 이번 사건과 관련한 몇 가지 쟁점들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는데, 무역제재의 대상 품목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레지스트 그리고 에칭가스를 일본 이외 국가에서 외부 조달이 가능한지, 현재는 며칠 정도의 재고가 남아 있는지, 그리고 해당 품목들의 국산화 가능성은 있는지 등에 대한 부분이다. 최근 일주일간 우리 사회의 역량이 오롯이 이런 문제들에 소비되고 있는 중이다. 물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이 필수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불필요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단 일주일 만에 이 복잡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에 결론을 내려는 시도와 그것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안일함, 마지막으로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번 사태와 관련한 과거의 역사를 정리해보면 그 발단에 작년 일본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역시 7월 7일 후지TV 보도 프로그램에 출연해 “(국가 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무역 관리 관련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밝히면서 이 같은 부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우선 대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이 있었다는 사실이나 그 이후로 이어졌던 정부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강제징용 판결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었음을 명확히 진단하지 못하는 해설들은, 단지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식으로 합리화되어서는 곤란하다. 잘못된 진단은 결국 잘못된 해결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에칭가스와 레지스트는 반도체를 만드는 핵심 원료다”와 “일본이 에칭가스와 레지스트를 만드는 데 원천기술이 있다”는 두 개의 문장을 “반도체의 원천기술은 실제로 모두 일본이 보유하고 있더라”는 문장으로 해석한 잘못된 논리가 등장하고, 우리의 반도체 생태계는 일본에 종속되었다는 기본 전제 속에 이번 사건을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속속 등장하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단계별로 분업화된 반도체 산업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한다.

재료, 장비에서 세트와 완제품으로 이어지는 반도체 공급 체인에는 실로 수없이 많은 개별 시장이 존재한다. 그 개별 시장 속에서 오랜 시간 하나씩 원천기술을 축적해온 업체들로 인해 해당 시장의 진입장벽은 신규 업체가 진입하기 불가능한 수준으로 높아지고, 단 1%의 품질 차이가 거대한 수율(투입 원자재 대비 완제품 비율)의 차이를 만든다. 또 더 나아가 이런 품질 차이로 기술적 우위를 증명해낸 소수의 기업만이 살아남아 과점구조가 형성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최고의 기술을 가진 업체와 그 업체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협력관계를 원하는 상위 시장의 구매자들이 시장을 만들어 나가며 반도체 시장의 ‘고도의 분업화’ 구조가 형성되는데, 이는 반도체 생태계를 이루는 요체이자 반도체 시장이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도의 분업화’ 구조 속에는 각 기업의 연구·개발(R&D) 규모, 전략적 판단, 심지어는 소속 국가의 정치·사회적 상황들을 비롯한 다방면의 역사가 모두 반영돼 있는 것이다.

이런 반도체 시장의 분업화에 대한 이해 없이 이번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하게 되면 90일(일본의 수출 규제로 반도체 소재에 대한 개별적인 수출 허가를 받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단기적이고 현실화된 문제 앞에 소재의 국산화, 1조원의 정부 지원금과 같은 잘못된 해결책들이 제시되게 되는데, 만약 3개 품목에 대한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가정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반도체 생태계의 고도의 분업구조에서 한국이 완벽히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일본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정 반도체 소재 분야를 국산화하면 적어도 국내 반도체 산업이 일본에 쥐락펴락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개별 시장의 기업들 각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결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단기적인 노력을 통해 남의 영역을 뺏어올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매우 순진한 접근이다. 국산화율을 높이는 것이 너무도 시급한 과제이고 특히 이번 사태 이후 더욱 가열하게 행해야 할 방향성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해결책’이라기보다 ‘지향점’이라는 단어와 더 가까운 이야기다.

분업과 종속의 몰이해를 부추긴 것은 무엇보다 반도체 산업 구조에 대한 판에 박힌 해석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경우 장비와 재료 산업에 영향력이 크고 반대로 우리의 경우 세트와 완성품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큰 것을 두고 한국의 반도체 전략은 틀렸고, 미국과 일본의 전략은 무조건 올바른 방향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각국의 현재 반도체 산업 구조는 단순히 어느 기업이나 국가의 전략이나 방향성만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닐뿐더러 어쩌면 통제하기 어려운 수많은 정치·사회적 변수들이 작용해 만들어낸 필연적인 부분도 있다.

또한 각각의 산업구조를 두고 서로 간의 좋고 나쁨의 보편적인 차등이 있다고 믿는 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원재료와 장비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은 현재와 같은 정치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는 그 윗단의 산업들을 잠시 마비시킬 수도 있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이 이번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가 얽힌 경우를 제외하고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오랜 시간 반도체 생태계를 만들어온 협력사들에 서로의 산업을 마비시키는 행위를 할 가능성은 극히 적다.

아울러 반대로 시장에서 누가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가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세트와 완성품을 수출하는 우리 기업들이 월등히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구조 간의 좋고 나쁨에 대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있다고 믿는 것은 명백한 오류고, 이번 사태의 원인을 산업구조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 역시 이러한 오류가 낳은 착시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9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정례 브리핑을 하고 있다. 스가 장관은 대(對)한국 수출 규제 강화 조치에 대해 협의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요구에 대해 “협의 대상이 아니고 (조치의) 철회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사진 AP연합뉴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9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정례 브리핑을 하고 있다. 스가 장관은 대(對)한국 수출 규제 강화 조치에 대해 협의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요구에 대해 “협의 대상이 아니고 (조치의) 철회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사진 AP연합뉴스

시장 언어 아닌 정치 언어로 답해야 할 때

이번 사태를 겪으며 국산화율을 높이자는 메시지가 다시 한번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 전달된 것은 불행 중 그나마 의미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국산화율을 높이자는 명제를 두고 일본이 제시한 세 가지 품목을 국산화하겠다는 정책을 도출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 분업 구조에서 일본이 내세울 카드는 앞으로 수도 없이 많을 것이고 이것을 우리가 모두 국산화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오만이다. 오히려 이미 일본이 점령한 영역을 뺏는 것보다 인공지능(AI)과 같은 보다 부가가치가 크고 더욱 유망한 새로운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 정부 재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자 정치적 리스크로부터 안전장치를 만드는 더욱 근원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과거사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그 심각하고 어려운 일들을 사회의 동의 속에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위기의 시기에 정부의 외교력이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번 수출 규제를 통해 일본이 보낸 메시지는 명확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 불거진 과거사 문제들에 불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당장에 풀기 쉽지 않은 문제일지라도 우리 역시 시장의 언어가 아닌 정치적 언어로 답해야 할 때다. 시장은 잘못이 없다.

장지훈 가젯서울 미디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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