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현 미국 하버드대 석사, 중국 칭화대 국제커뮤니케이션 박사, 전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팬택펠로, 전 잘츠부르크 글로벌 펠로, 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이성현
미국 하버드대 석사, 중국 칭화대 국제커뮤니케이션 박사, 전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팬택펠로, 전 잘츠부르크 글로벌 펠로, 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1월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으로 미국의 트럼프 시대가 간다. 바이든 시대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을 안고 막을 여는 것이다. ‘트럼프 유산’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미국의 ‘민주주의 위기(democratic crisis)’다. 한국은 지금까지 미·중 갈등을 안보와 경제적인 측면에서 주로 조명했지만 가치 충돌 시각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접근하는 게 가치·이념 혼란을 겪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더 클 수 있다. 미국 민주주의 위상의 실추는 민주주의 ‘초기단계’이며 이념 양극화를 극복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 새로운 혼란 요소가 될 수 있다. 반면 중국에는 되레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권력 강화의 빌미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오랫동안 중국이 처한 현실을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규정해 왔다. 중국 공산당 당헌에 의하면, 이 초급단계는 장기적이고 100년 이상이나 지속된다. 한국 민주화 역사의 태동을 평화적인 시위로 군부정권을 쫓아내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으로 복귀한 1987년으로 삼는다면,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역시 ‘초급단계’에 있다. 외양은 민주주의지만 내실은 많이 부족하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244년 된 미국을 모델로 삼아 조금씩 발전해 왔다.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현 상황은 한참 더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할 한국 사회에 가치관과 정체성 표류를 유발시킬 수 있다. 갑자기 나침반이 고장 난 배처럼 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초급단계’ 위기는 일각에서 이미 보이고 있기도 하다. 미·중 갈등을 논하는 최근 세미나에서 “작동하는 사회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민주주의보다 더 낫다”라는 주장도 나왔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에 일찍 성공하고 경제 성장 반등을 이룩한 중국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지지 표시다. 이런 한국 사회 내부의 취약성에 유념해야 한다. 민주주의 초보단계 사회니까 벌어지는 일이다. 미·중 사이 ‘선택’의 문제는 경제·안보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렇게 가치관과 정체성 문제도 내포하고 있다.


트럼프가 자초한 민주주의 위기 시진핑 권력 되레 강화

현 상황은 코로나19 정국 속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국과 대조적으로 민주주의 위기를 자초한 미국이 빌미를 제공했다. 중국 관방 언론과 소셜미디어(SNS)는 미 대선 과정에서의 미국 사회의 혼란, 불거진 인종 갈등,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칼부림, 트럼프 대통령의 불복, 그런 트럼프를 설득하기보다는 오히려 거드는 공화당 정치인 등을 조명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조롱한다.

미국 의회 점거 사건은 그 절정이었다. 보수적인 월스트리트저널(WSJ)조차 “반란(insurrection)”이라고 할 만큼 민주주의 혼란의 모습이 전 세계 매스컴을 타고 그대로 보도됐다. 그 시위를 조장한 트럼프 대통령은 현 국가 최고권력자가 국가 반란을 주도했다는 오명을 받고 있다. CNN이 역사상 이런 사례가 있었는지 전문가들에게 물을 정도다.

작금 미국 사회가 보이는 민주주의의 취약함은 중국 공산당 정권에는 반사이익이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실각설’까지 나왔던 시진핑의 권력은 도시 전체를 봉쇄하는 강압책으로 방역에 성공하자 오히려 강화되었고, 중국 경제는 빠른 ‘V’ 자 회복세를 보이며 공산당에 대한 지지도는 높아져 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경쟁 대상인 미국 민주주의가 드러낸 극심한 혼란은 중국이 일당독재 체제의 정당성을 더 이상 설파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에게 사회주의 정치 ‘제도에 대한 자신감(制度自信)’을 가지라고 마지막으로 당부한 날은 2020년 8월로 검색된다. 관방 언론에서 거의 매일 들리던 말이다. 중국 당국이 하루가 멀다하고 국민에게 정치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라고 강조한 것은 역설적으로 국민이 공산당 정치 체제에 대한 믿음에서 이탈하는 것을 염려한 탓이다.

그 ‘키워드’가 지난 몇 달 동안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의 반영이다. 코로나19 정국 속 중국은 한발 더 나아가 사회주의 체제가 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효율적이라며 정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했다. 시진핑은 최근 베이징 공산당 중앙당교에서 열린 주요 지방 간부 회의에서 “지금 세계는 지난 100년간 본 적 없는 큰 변국을 겪고 있으나, 시간과 형세는 우리 편에 있다”고 했다. 앞부분은 이전에도 나온 말이고, 뒷부분은 처음 나온 말로, 공개적인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민주주의 전당인 미국을 이끌 바이든은 ‘민주주의를 수호하자’라는 구호에 답해야 한다. 중국이 사회주의 정치 체제에 대한 호기를 부리고 있는 반면, 미국은 민주주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돌이켜보면 ‘트럼프 4년’은 중국에 기회였다. 중국 정부는 말을 아끼지만, ‘바이든 4년’도 중국이 더 강하게 부상할 기회의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미국 사회는 힘든 치유의 과정을 겪을 것이다. 그만큼 미국 민주주의는 많이 망가져 있다. 트럼프가 미국 민주주의에 끼친 피해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바이든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단시일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심지어 의회 점거 난동 이후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공화당원의 거의 절반이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을 지지한다고 한 것은 미국 사회의 골이 깊음을 시사한다.


시진핑(習近平·왼쪽) 당시 중국 국가 부주석이 2012년 2월 1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의 루스벨트 룸에서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부통령과 손을 맞잡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시진핑(習近平·왼쪽) 당시 중국 국가 부주석이 2012년 2월 1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의 루스벨트 룸에서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부통령과 손을 맞잡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미·중 갈등 심화로 시험대 오른 한국의 가치·이념

미·중 갈등이 깊어지면서 가치와 이념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각국이 미·중 갈등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의 문제는 국가 이익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국가의 정체성과 추구하는 가치를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미·중 모두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는 한국에 이는 난처한 일이다.

일례로 중국이 홍콩보안법 통과를 강행하자 미국은 이를 기존 ‘일국양제’ 체제하의 ‘민주’ ‘인권’ ‘언론 자유’의 기준에서 크게 퇴보한 것으로 보았고, 27개국이 공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데 한국이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홍콩보안법의 찬반 표명에 기권표를 던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홍콩 문제에 있어 ‘침묵’을 취한 것은 국익적 관점에서였겠지만,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한 기본적 가치에 침묵한 ‘처세’에 대해서는 논란의 공간이 존재한다. 이 같은 현안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가치’를 치열한 국제 정치 현실에서 얼마만큼, 어떤 식으로 드러내야 하는지의 고민을 준다.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게 최선의 상황이겠지만, 현실에서 화웨이 제재,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 ‘확대 G7’ 참가, 반중 성격의 ‘쿼드 플러스(Quad Plus)’ 참여 등은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선택을 종용(慫慂)하고 있다. 바이든 시대가 왔다고 트럼프 시대 불거졌던 이 같은 압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는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시험이 지속될 것임을 예고한다.

작금의 상황이 구한말(舊韓末)과 다르다는 주장은 기만적이다. 이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이 혼란의 시기에 한국 정치는 그에 걸맞은 외교력과 사회 역량의 통합력과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초기단계’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구한말에도 한국의 위정자는 서로 다른 생각을 내놓으며 혼란의 구심점이 되었다. 당시 한국은 잘못된 선택을 했고, 망국의 상처를 역사에 남겼다. 21세기이니 역사가 똑같이 반복될 수는 없겠지만, 역사가 주는 교훈은 되풀이될 수 있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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