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M. 치폴라. 사진 미지북스
카를로 M. 치폴라. 사진 미지북스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카를로 M. 치폴라|장문석 옮김|미지북스
127쪽|9000원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 인문학자로는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선뜻 꼽힌다. 에코는 상아탑에만 머물지 않고 일반 독자를 위한 글도 많이 썼다. 그의 산문은 대개 문명 비판을 지향했다. 특히 중세 유럽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의 맹점을 촌철살인의 풍자 정신으로 지적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사학자 카를로 M. 치폴라가 쓴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을 우연히 펼쳤더니, 움베르토 에코가 경제학을 공부했다면 아마 이런 글을 썼을 것이란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치폴라는 런던정경대학과 소르본대학 등에서도 경제사를 강의한 학자로 이름이 높고, 그의 저서 중 ‘대포, 범선, 제국’을 비롯해 세 권이나 이미 우리말로 번역된 바 있다. 그의 책들은 13세기 혹은 16세기 유럽 문명에 일어난 결정적 사건을 포착해 세계사의 전환기를 재기발랄한 입담으로 풀어나갔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은 앞서 번역된 책들에 비하면 소품(小品)에 불과하다. 장문석 영남대 교수의 역자 해제까지 포함해서 고작 127쪽에 그친 문고본이다. 더구나 두 편의 에세이로 꾸며졌을 뿐이다. 그런데 첫 번째 에세이는 제목이 만만치 않다. ‘중세 경제 발전에서 향료(특히 후추)의 역할’이라고 한다.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이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근대 이전엔 아랍 상인들과의 무역을 통해서만 후추를 맛볼 수 있었다. 후춧값은 금값이었다. 물론 후추와 같은 향신료를 즐기는 것은 왕족과 귀족 같은 소수 계층이었지만, 그들이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향신료를 과잉 소비했기 때문에 한 움큼의 후춧값은 노예 한 명 가격에 버금갔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 제국 몰락 이후 유럽이 무질서한 세상이 되자 동서무역도 침체돼 후추를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 책의 ‘후추 경제사’ 강의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후추는 강력한 최음제로 알려져 있다. 그런 후추가 없었으니, 유럽인들은 지방 귀족들과 스칸디나비아 전사들, 마자르 침략자들, 아랍 해적들로 인해 초래된 인명 손실을 거의 벌충할 수 없었다. 인구는 감소했고, 도시는 텅 비었으며, 숲과 늪지만이 점점 늘어났다.”

후추가 신비한 미약(媚藥)의 효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책은 유럽인들이 후추의 최음 효과를 누리지 못해 인구 감소를 겪었다고 과장하는데, 이것은 후추가 일으킨 향후 역사적 변화를 강조하려고 툭 던진 유머이기도 하다. 심지어 유럽인들이 십자군 원정에 나선 까닭은 궁극적으론 후추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다 알다시피 십자군은 전쟁터에 나갈 때 부인에게 정조대를 채웠다. 십자군이 승전보를 날리면서 후추도 고향에 많이 보냈다. 정력에 좋은 후추가 넘쳐나자 십자군으로 나간 남편 대신 부인의 정조대를 여는 열쇠 제조도 늘어났다. 대장장이를 뜻하는 성씨의 인구도 늘어났다. 동시에 후추를 거래한 상인들이 이런 풍기문란을 일으킨 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교회에 바치는 헌금도 늘어났다.

교회는 그 돈으로 대성당을 지었고, 그 덕분에 평민들의 일자리가 늘어났고, 삶이 풍족해지자 인구도 증가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후추의 경제 효과가 좋았고, 대외 무역도 활발해졌다는 것. 베네치아 상인들은 영국에서 양모를 수입해 명품 의복을 만들어 부자들에게 팔았다고 한다. 당시 영국의 양모 제작은 주로 수도원에서 이뤄졌다. 수도원은 양모 수출 덕분에 부유해졌고, 수도사들은 최음 효과가 있는 후추 대신 포도주 구입에 열을 올렸다. 왕도 포도주 열풍에 동참해 영국이 프랑스에서 수입하는 포도주 양이 급증했는데, 나중에 프랑스가 포도주 수출을 제한하자 영국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게 백년전쟁의 출발이었다고 한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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