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가 1838~39년 머물렀던 스페인 마요르카의 발데모사 전경.
쇼팽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가 1838~39년 머물렀던 스페인 마요르카의 발데모사 전경.

‘그는 마치 호수에 익사한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걸어왔다. 악절 마디마다 무겁고, 얼음과 같이 차가운 물방울이 그의 가슴 위로 떨어지는 듯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 조르주 상드가 1838년 그의 저서 ‘어느 겨울 마요르카에서’에 남긴 연인 프레데리크 쇼팽 연주에 관한 한 글귀다. 이 부분은 현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쇼팽 전주곡(프렐류드 작품번호 28번) 중 15번 ‘빗방울 전주곡’을 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망틴뤼실오로르 뒤팽(본명)이라는 이름의 한 자유분방한 여성은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찾고자 남편과 이혼 후 두 아이를 데리고 파리로 올라와 조르주 상드라는 예명과 남장 차림으로 문필 활동과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했다. 그런 그녀와 조용하고 내성적인 쇼팽과의 만남은 1830년대 후반 온 파리 사교계를 뒤흔들 만한 뉴스였다. 선천적으로 병약하고 결핵을 앓던 쇼팽을 위해 그리고 떠들썩한 파리의 사교계 가십거리를 피하기 위해 이들은 1838년 추운 겨울 따뜻한 곳에서 요양하고자 유럽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에 내려오게 됐다. 두 사람은 마요르카 섬 북부에 있는 발데모사 수도원에 약 세 달 넘게 거주하며 자연이 선사하는 전원적인 환경 속에서 창작열을 불태우게 된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도 바로 이곳에서 작곡된 곡이다. 자신의 자녀들과 외출한 상드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엄청난 폭우가 쉼 없이 쏟아진 탓에 홀로 발데모사 수도원에 남겨진 쇼팽은 그들이 죽었다 생각하며 끔찍한 불안함과 괴로움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날의 기억이 빗방울 전주곡에 남겨진 것인지, 그래서 위에 언급한 상드의 글귀처럼 그 빗방울 소리가 얼음과 같이 차갑고 무거웠다는 것인지 쇼팽 자신의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이 곡을 들어보면 일정하고 천천히 반복되는 피아노 음이 점점 거세지고 또 잠잠해지는 과정은 비오는 날의 한 장면과 쇼팽의 감정을 그려내는 듯하다.

발데모사 수도원에 있는 쇼팽 박물관에 쇼팽의 두상과 그가 사용했던 플레이엘 피아노가 놓여 있다. 사진 안종도
발데모사 수도원에 있는 쇼팽 박물관에 쇼팽의 두상과 그가 사용했던 플레이엘 피아노가 놓여 있다. 사진 안종도

지난달 연주 일정으로 잠시 스페인에 들렀다 발데모사를 찾았다. 올 하반기 독주회 프로그램 중 하나인 쇼팽 발라드 2번 바장조 및 프렐류드 작품번호 28번이 작곡된 발데모사가 근교에 있어 그의 발자취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태양과 열정의 나라라는 말처럼 마요르카 섬에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발데모사로 향하는 30분 동안 창밖 너머 펼쳐지던 평야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문득 하늘 높이 솟아오른 산과 끝없이 이어지는 깊은 산골짜기 사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곧 골짜기 한가운데 비밀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발데모사에 도착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급히 쇼팽과 상드가 머물렀던 발데모사 수도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평지와 달리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전원적인 풍경이 그가 이곳에서 완성한 발라드 2번 도입 부분을 떠올리게 했다. 수도원 한 어귀에는 쇼팽 박물관이 있었다. 두 사람이 사용했던 가구부터 파리에서 직접 공수해 온 플레이엘 피아노, 쇼팽이 이곳에서 작곡한 24개의 프렐류드 작품번호 28번의 팩시밀리 원본까지 볼거리가 가득했다.


그림 한 폭 보는 듯한 감각적인 순간 가득

쇼팽은 평소 ‘근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존경하고 그의 곡을 사보하며 공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바흐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건반악기를 위한 프렐류드와 푸가 평균율 곡집’의 영향을 받아 24개의 프렐류드 작품번호 28번을 이곳 발데모사에서 작곡하기에 이른다. 곡은 12개의 조성을 장·단으로 나눠 총 24개로 구성됐다. 다장조부터 나단조까지 순차적으로 나열한 바흐의 평균율 곡집과는 다르게 5도 구성으로 순서를 배열해 조성적으로도 24곡을 마치 커다란 한 곡처럼 연주할 수 있도록 통일성을 부여한 것이 특징이다.

바로크 시대 주로 본 곡 연주 전 작은 서곡 개념의 즉흥적인 요소가 곁들여 있는 프렐류드의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마치 스쳐 지나가는 그림 한 폭을 보는 듯한 짧고 감각적인 순간이 가득하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폭풍우가 몰아치는 순간, 절규, 사랑의 따뜻함 등이 찰나의 순간으로 울리는 것이 이 프렐류드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그의 걸작 중 하나로 자주 연주되고 있으며 당시 작곡 이후에도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 등 후배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plus point

발데모사에서 만든 쇼팽 명곡

프레데리크 쇼팽
발라드 제2번 바장조 작품번호 38번

발라드는 12세기 초반 유럽 중세시대에 널리 유행했던 기사 문학의 한 장르이고 그 운율은 시와 비슷하다고 전해진다. 19세기 들어 음악에서도 발라드라는 이름을 가지고 환상곡 형식의 음악이 유행하게 됐는데 이 중 선구자는 바로 쇼팽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네 곡의 발라드는 현재 낭만시대 피아노 레퍼토리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들로, 모든 피아니스트가 이 곡들을 학창시절에 공부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중 제2번은 바장조의 평온하고 온화한 분위기 부분과 곧 이어지는 다단조의 격렬한 부분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곡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유명 피아니스트인 알프레드 코르토의 연주로 소개해 본다.


프레데리크 쇼팽
24개의 프렐류드 작품번호 28번

피아노의 거장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강렬하고 열정적인 타건(打鍵)을 듣고 있으면 쇼팽의 연인인 조르주 상드의 성격이 그려지기도 한다. 불같이 타오르는 연주는 33분이 넘는 연주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도록 청자를 집중하게 만든다.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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