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진짜 야근이 줄어들까. 사진은 서울 시내 한 회사에서 야근하는 직장인들 모습. 사진 연합뉴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진짜 야근이 줄어들까. 사진은 서울 시내 한 회사에서 야근하는 직장인들 모습. 사진 연합뉴스

국내 4대 그룹의 한 주력 계열사에서 생산관리를 맡고 있는 A씨는 평소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먹듯이 해 주 52시간 근무는 엄두도 못 낸다. 회사가 시범적으로 유연근무제를 도입해 주간 근무시간 총량이 52시간을 넘지 않도록 시범 운영하고 있지만 달라진 건 없다. A씨는 “회사에 있는 동안 근무하지 않은 시간을 재량껏 입력해 전체 근로시간에서 뺄 수 있는데, 점심시간(1시간)만 비우고 12시간을 근무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전산 입력상으로는 총 4시간을 빼 하루 8시간 근무로 맞출 수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에 나서고 있지만, 근무로 치지 않는 시간, 즉 비(非)근로시간을 이용해 이전과 비슷한 수준의 근로 시간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이 잇따르고 있다. 비근로시간을 판단하는 기준이 업무와의 유관성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데다 직원이 개별적으로 알아서 입력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꼼수’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주 52시간을 시범 운영하고 있는 삼성전자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1시간 업무 관련 미팅을 해놓고도 2시간 동안 개인 사정으로 병원을 다녀왔다며 비근로시간을 자발적으로 입력하고 추가 근무 2시간을 더 하는 식이다.

근로시간인지에 대한 판단은 사용자의 지휘·통제하에 해당 활동을 했는지, 업무 연관성이 있는지가 관건이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 가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경우는 언제든 사용자 지시에 따라 일터로 복귀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근로시간이다. 워크숍이나 세미나의 경우 업무 필요에 따라 사업주가 실시할 경우 근로시간이지만, 친목 도모 목적일 경우 비근로시간으로 분류된다. 회식의 경우 일반적으로 친목 도모의 성격이 강하다고 판단해 근로시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꼼수는 출퇴근 기록을 실제와 다르게 올려 주 52시간을 강제로 맞추는 식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현대그룹의 한 계열사 직원 B씨는 “정시 퇴근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놓고 본격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라며 “퇴근 기록을 올리고 밤 10시까지 야근하라고 대놓고 지시하는 상사도 있다”고 전했다.

직장인 익명 게시판 ‘블라인드’의 설문조사 결과,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답한 직원 비율이 무려 80%가 넘었던 딜로이트안진·삼정KPMG 같은 회계법인도 근무방식을 자율적으로 조정하는 재량 근로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연간 사업보고서와 반기 보고서 회계 감사 기간에 일이 몰리는 회계사들의 업무 특성을 고려해 회계 감사 업무가 주어지지 않은 기간에는 재택근무 형식으로 간단한 고객사 요청에 대한 업무 대응 정도만 하면서 주 52시간을 맞추겠다는 셈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을지에 대해 내부 회계사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삼정KPMG에서 근무하는 C 회계사는 “사업보고서 감사 기간인 1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한 주에 평균 100시간 정도를 일할 정도로 업무 강도가 세다”며 “아무리 주 52시간을 몇 개월 단위로 정산한다고 하더라도 감사 기간이 포함되면 제한 시간 내 업무를 끝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기록에 올리지 않고 야근하는 분위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야근하는 직원들이 많아 본사 사옥이 밤새 환하게 켜져 있다는 것을 빗대 ‘구로 등대’라 불렸던 넷마블도 세간의 우려를 의식한 듯 이미 3월부터 일찌감치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해 직원들이 스스로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신규 게임 출시 등 불가피하게 집중 근무할 수밖에 없는 게임업종의 상황을 고려해 미리 근로 시간을 줄이거나 이후에 줄이는 방식으로 총 근로시간을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넥슨 직원 D씨는 “게임회사의 경우 업무 특성상 내년 제도 본격 시행 시 정부의 단속 타깃이 될 가능성이 큰 만큼 여러 시나리오별 근로시간 조정을 준비 중”이라며 “심지어 주말에 전화나 모바일메신저로 업무 관련 내용을 물어보거나 지시하는 경우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이를 녹취하거나 캡처해서 보관하는 안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들 “투잡 뛰어야 할 판”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의 최대 피해자는 작은 기본급에 초과 근무수당으로 월급을 보전하던 직장인들이다. 현행 법률이 허용하는 야간 근로 및 휴일 근로 시간은 28시간에 달하지만, 주 52시간 근로제가 도입되면 추가 근무 시간은 12시간밖에 인정되지 않는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처럼 수당 감소분을 보전하기 위해 사용자 측과 협상할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에 따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근로시간 단축을 철회해달라는 청원이 쏟아지고 있다. 한 청원인은 “단축 근무가 시행되면 생산직은 소득에 직격탄을 맞는다”며 “저녁이 있는 삶은커녕 투잡을 뛰어야 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실제 한국노동연구원이 내놓은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중소기업 지원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주당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되면 제조업 종사자들의 초과 근로 시간은 평균 21.4시간에서 9.4시간으로 12시간 줄어 들었다. 이에 따라 평균 월급은 296만원에서 257만원 수준으로 13%가량 줄어든다.

삼성 계열의 단체급식서비스 업체 삼성웰스토리의 한 직원은 국민청원 게시판에 “주 52시간 도입을 앞두고 조리사와 영양사를 대상으로 회사가 지금까지 받고 있던 기본급에 20시간의 추가근무 수당이 포함돼 있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넣어 이에 대한 합의를 반강제로 요구하고 있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회사로서는 조리사와 영양사가 추가 근무를 하더라도 20시간에 대해서 만큼은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주당 52시간 근로시간도 맞출 수 있다. 식자재 유통회사인 아워홈은 최근 영양사에게 주 52시간 근무 도입에 따라 추가 근무 상한선을 32시간에서 20시간으로 바꾼다고 공지했다.

아워홈에서 일하는 영양사 E씨는 그러나 “20시간 이상에 대해서는 연장 근로 수당을 요구하지 말라는 의미인데, 그래도 일이 많으면 ‘무료 봉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장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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