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원은 프로듀스 101 시즌2를 통해 데뷔한 아이돌 그룹이다. 사진 CJ ENM
워너원은 프로듀스 101 시즌2를 통해 데뷔한 아이돌 그룹이다. 사진 CJ ENM

“국민 프로듀서님, 시타오 미우 잘 부탁드립니다.”

8월 25일 서울지하철 2호선 신촌역. 1번 개찰구를 지나 연세대 방면 3번 출구로 나가는 길 정면에 이 같은 글귀가 적힌 광고판이 보였다. 국민 프로듀서란 시청자가 직접 아이돌 데뷔 멤버를 투표로 선정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인 프로듀스 시리즈에서 시청자를 일컫는 말이다. 분홍색 교복을 입은 소녀가 환하게 미소짓는 광고판이 아이보리색 벽면을 가득 채웠다. 소녀 사진 주위에 붙은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에는 온갖 응원 메시지가 적혀 있다. 눈을 돌려 신촌 현대백화점 쪽으로 몇 걸음 발을 떼자 같은 형식의 광고판이 또 나타났다. “국민 프로듀서님, 저의 빛이 돼 주세요.”

프로듀스 시리즈 이후 열성 팬들이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이 아이돌 문화의 새로운 양상으로 자리 잡았다. ‘프로듀스48(포티에이트)’ 최종화(8월 31일)를 앞두고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 홍대입구역, 3호선 고속버스터미널역, 교대역 등 주요 역에 분홍색 광고판이 걸렸다. 아이돌 연습생의 팬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멤버를 응원하고 홍보하기 위해 만든 광고다. 지하철역뿐만 아니라 백화점 옥외 전광판,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 진동벨, 시내버스에도 비슷한 형식의 광고가 실렸다. 지하철역 벽면 광고는 한 달 기준 적게는 200만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을 호가한다.


방송국이 I.O.I·워너원 등 아이돌그룹 배출

‘프로듀스101 시즌1’ ‘프로듀스101 시즌2’ ‘프로듀스48’로 이어지는 프로듀스 시리즈가 한국 아이돌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신(scene)체인저'가 되고 있다. 프로듀스101 시즌1이 배출한 걸그룹 아이오아이(I.O.I)와 시즌2가 배출한 보이그룹 워너원(Wanna one)의 인기가 대단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9월 7일 엠넷 음악프로그램인 ‘엠카운트다운'에 출연한 신인 아이돌 그룹 12팀 가운데 5팀이 ‘프로듀스 시즌1’ ‘시즌2’에 출연했던 중소기획사 출신이었다.

지난해 주요 음악 프로그램의 순위 차트를 대형 기획사 출신의 아이돌이 모두 휩쓴 것과는 확실히 다른 양상이다. 이기훈 하나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프로듀스 101’을 통해 데뷔한 아이돌은 대형기획사 소속 아이돌 그룹인 YG의 ‘아이콘’이나 JYP의 ‘트와이스’처럼 성공 확률이 높을뿐더러 데뷔 이후 수익을 내는 시점까지 걸리는 기간도 매우 짧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세 가지 측면에서 프로듀스 시리즈가 지금까지 한국의 아이돌 비즈니스 구도를 완전히 바꿔놨다고 평가한다.

첫째,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프로슈머’의 개념을 도입했다. 프로슈머란 상품 전략 단계부터 생산, 유통까지 직접 간여하고 권리를 행사하는 능동적 소비자를 뜻한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시청자들이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유통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었다. 생방송 공개 투표를 통해 시청자들이 능력있는 연습생을 매회 직접 선택하도록 했다. 이장우 이장우브랜드마케팅그룹 회장은 “지금까지 시청자들은 완성된 아이돌의 퍼포먼스를 수동적으로 소비해 왔다”며 “반대로 프로듀스 시리즈의 시청자들은 아이돌을 뽑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팬’이 됐다”고 분석했다.

두번째,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시청자를 단순 추종자를 넘어 후원자이자 ‘열성팬’이 되도록 유도했다. 시즌2에서 선보인 '마보이 후원’ 이벤트가 대표적이다. 마보이는 ‘마이보이(My Boy·내 남자)’를 줄인 말로 ‘프로듀스101 시즌2’에서는 ‘내가 지지하는 연습생’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프로듀스는 생방송 순위 결정 투표와 별개로 홈페이지에 ‘마보이 후원' 페이지를 두고 시청자가 하루에 한 번 한 명의 연습생에게 점수를 줄 수 있도록 했다. 연습생에게 누적된 점수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제작사는 그 연습생에게 종합비타민제, 곰인형 등 선물을 제공하고, 선물을 받은 연습생은 후원해 준 팬에게 감사의 뜻으로 인증샷과 영상을 남긴다.

실시간 투표와 별도로 시청자가 연습생을 응원하고, 거기에 연습생이 반응하고, 나아가 연습생이 더 좋은 성과를 내면, 그에 고무된 시청자가 더욱 열렬히 연습생을 응원한다. 즉 프로듀스는 제작사가 따로 거액의 홍보비를 투입하지 않더라도 시청자가 알아서 프로그램을 알리고 후원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세번째, 본방송 외에 팬이 원하는 콘텐츠 수요를 정확히 파악해 추가로 제공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본방송이 끝나면 이날 방송에 나온 멤버들의 ‘직캠’을 인터넷에 업로드한다. ‘직캠’이란 직접 캠코더로 찍은 동영상을 뜻하는 말로 연습생 개인이 본인에게 제공된 캠코더로 자신을 찍은 동영상이다.

기존의 아이돌 관련 프로그램은 ‘그룹' 전체에 초점을 맞춰 영상을 제작 공급했고, 팬들은 그 영상에서 각자 선호하는 멤버가 나오는 장면만 따로 편집해 소장해 왔다. 장민지 한국콘텐츠진흥원 선임연구원은 “프로듀스 시리즈는 아이돌 팬이 필요로 하는 콘텐츠 수요를 영리하게 짚어냈다"며 “그동안 하위문화로만 치부됐던 팬 콘텐츠를 비즈니스 전략화하고 팬들의 공감대까지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프로듀스 시리즈를 본 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도 상당한 파급력을 보였다. ‘프로듀스101’의 대성공 이후 중국에서 방영한 비슷한 포맷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큰 인기를 끌었다. 시즌 2를 그대로 본 뜬 ‘우상연습생(偶像練習生)’은 지난 1월 첫 방송에서 공개 1시간 만에 1억뷰를 달성했다. 중국 최대 동영상 플랫폼인 텐센트가 ‘프로듀스 101’의 정식 판권을 구매해 제작한 ‘창조 101’은 방영 첫날 중국 최고인기 프로그램인 중국판 ‘런닝맨’을 제치고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똑같은 구도 반복하면 다시 무너질 것

하지만 한국에서 제작된 비슷한 포맷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미 데뷔했으나 큰 인기를 끌지 못한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KBS2 '더유닛'과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가 전국의 중소 기획사를 찾아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는 JTBC ‘믹스나인’이 대표적이다. JTBC '믹스나인’은 시청률 0.6%, KBS2 '더유닛’의 경우 2.5%를 기록했다. ‘더유닛’은 진행이 밋밋하고, ‘믹스나인’은 양 대표가 프로그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시청자에게 하여금 공정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장민지 선임연구원은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시청자들은 반복되는 시스템에 대한 익숙함을 넘어 지겨움을 느끼게 된다”며 “슈퍼스타K가 큰 인기를 얻었지만 회차를 거듭하면서 인기가 사그라든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프로듀스 시리즈도 앞으로 내부 시스템을 어떻게 비틀고 새롭게 만들어나가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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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인저(Scene Changer) 기존의 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가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뜻하는 용어인 ‘게임체인저(game changer)’와 장면을 뜻하는 ‘신(scene)’을 결합한 용어. 한 산업에 있어 특출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장면을 전환한 인물, 혹은 비즈니스를 뜻한다.

김명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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