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도한 부채는 늘 금융 위기를 일으켰습니다. 1997년 외환 위기, 2002년 카드 사태,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모두 근본 원인은 감당 못 할 부채입니다. 지금도 가계 부채가 문제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고승범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청교협) 회장은 2월 17일 인터뷰에서 “금융 위기는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국가의 혼란을 초래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고 회장은 “국민 한 명 한 명이 올바른 금융 지식을 함양해야 부채로 인한 금융 위기를 막을 수 있다”며 청소년 시기 금융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 회장은 2016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2021년부터 2022년까지 제8대 금융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인생 절반 이상을 국내 금융정책 설계에 힘썼다. 1985년 재무부(기획재정부의 옛 명칭)에서 공직 생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금융감독위원회, 금융위원회(금융위), 한국은행을 거쳤다가 금융위원장에서 물러나기까지, 37년 동안금융 외길을 걸었다.
금융위 내에선 아직도 그를 ‘가계 부채 킬러’라고 기억하는 이가 많다. 고 회장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8월 금융위원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 감염병 대유행)과 제로 금리 환경 속 가계 부채는 폭증했다. 한 달 만에 가계 부채가 25조원 넘게 증가하던 때다. 고 회장은 부임 후 가계 대출 총량 관리,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도입을 진두지휘했다. 일각에선 “나라가 은행 대출을 막는다”며 고 회장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고 회장은 각종 외압을 견디고 뚝심 있게 정책을 펼쳤다. 시간이 흘러 고 회장의 결단은 가래로 막아야 할 일을 호미로 미리 막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청교협에 합류한 지금도 그는 항상 부채 위험성을 언급한다. 그는 온 국민이 슬기롭게 부채를 관리하려면 초등학생 때부터 금융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 회장은 “청소년 시기는 돈을 다루는 가치관과 습관이 형성되는 시기지만 대부분 청소년이 금융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며 “교육의 부재는 과도한 대출로 이어지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카드 사태 때 청소년 금융 교육의 필요성을 처음 절감했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카드 사태를 계기로 금융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카드 사태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비은행감독과장이었다. 카드사 감독 부서의 장이다. 사태를 수습하며 원인을 뜯어보니, 2000년대 초반 젊은이들이 카드 빚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더라. 결국 많은 청년이 신용 불량에 허덕이며 고생을 겪었다. 당시 금융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지금 우리 국민의 금융 이해력을 100점 만점으로 따지면 60점을 조금 밑돈다. 자격증 시험으로 따지면 과락이다.”
부채 관리가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청소년 시기 대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자리 잡게 하는 교육도 중요할 것 같다.
“코로나19 이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 ‘빚투(빚내서 투자)’ 현상이 퍼졌다. 대출을 자산 증식 수단으로만 보는 왜곡된 시각이 보편화됐다. 더 늦기 전 청소년에게 대출의 본질과 책임을 명확히 가르쳐야 한다. 대출은 ‘미래의 나에게 돈을 빌리는 행위’다. 책임을 수반하는 행위라는 점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물론, 대출은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대출을 무조건 금기시하지 않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머릿속에 같이 심어야 한다.”
청소년이 직접 대출을 받으며 부채 관리의 중요성을 몸으로 터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출 개념을 배우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대출의 무서움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보통 부모는 자녀에게 정기적으로 용돈을 준다. 이따금 자녀는 돈이 모자란다며 용돈을 더 달라고 할 때가 있다. 마냥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거나 자녀를 꾸지람하고 돌려보내는 게 능사는 아니다. 대신 돈을 빌려주면 어떨까. 자녀에게 ‘이 돈은 빌려주는 것이니 나중에 갚아야 한다’며 새끼손가락을 걸어보자. 빚을 갚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된다. 정말 필요할 때만 돈을 빌려야 한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심어줄 수 있다.”
대출만큼 투자도 금융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야다.
“올바른 투자는 ‘기본에 충실한 투자’다. 대부분 저축으로 투자의 종잣돈을 모은다. 투자 교육에 앞서 저축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투자 개념을 이해하고 금융 상품의 특성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교실에 앉아 개념을 익히는 것만큼 중요한 게 부모와 함께 쌓는 투자 경험이다. 부모의 가르침 아래 주식 투자로 수익 및 손실 경험을 해보는 것이다. 돈을 벌면 버는 대로, 잃으면 잃는 대로, 이유를 공부해야 한다. 이렇게 지도하면 자녀는 나만의 투자 방법과 원칙을 찾을 수 있다.”
'올바른 투자는 기본에 충실한 투자'라고 말했다.
“모든 투자의 기본 원칙은 자기 책임이다. 투자 상품에는 기본적으로 원금 손실 가능성이 포함돼 있다. 그 점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지금껏 수많은 대규모 투자 손실 및 불완전 판매 사태를 지켜봤다. 금융사가 투자자에게 상품 설명을 아예 안 했을까. 아니다. 다만 복잡하고 긴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초·중·고교에서 투자의 기본 원칙을 가르치고 학생이 투자 상품 해석 능력을 길렀다면 어땠을까. 투자자가 상품의 위험성을 더 쉽게 인지하지 않았을까.”
올해부터 고교 내 융합 선택과목으로 '금융과 경제생활'이 도입됐다. 금융만을 가르치는 과목이 학교 정식 교과로 채택된 건 처음이다.
“금융 교육 역사에 괄목할 만한 이정표라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금융 당국의 많은 이가 노고를 들였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의무 교과가 아닌 만큼 아직 많은 학교가 이 과목을 채택하지 않았다. 전국 고교 10개 중 8개는 이 과목을 개설하지 않거나 3학년 2학기에 편성했다. 3학년 2학기의 교실은 수능 공부 중심으로 돌아간다. 금융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금융과 경제생활 과목을 고교 2학년에 편성하도록 독려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교육 환경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의 교육 인프라 격차다. 금융 교육 환경은 어떤지 궁금하다.
“2023년 청교협 교육 신청 현황을 보면, 신청 학교 중 서울·인천·경기 학교가 73%다. 초·중·고교 수만 놓고 보면 수도권 학교는 학교 수의 45%를 차지한다. 학교 수는 지방에 더 많이 있는데 금융 교육 수요는 수도권이 더 크다. 우리나라는 경제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수도권의 높은 집값은 수도권 주민의 대출 이용을 늘린다. 이는 자연스레 금융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수도권과 지방 간 금융 교육 관심이 차이 나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청교협의 주요 사업과 남은 임기 목표는.
“수학으로 금융을 배우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다. 금융 원리를 가르치며 장황한 설명만 늘어놓으면 재미가 없다. 수학 교과와 연계해 직관적으로 학생의 이해를 높이자는 취지다. 내년에 임기가 끝나는데 내년에는 영어로 배우는 금융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싶다. 금융 교육 콘텐츠를 영어로 만들면 수능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학생과 학부모의 관심을 높일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