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업 주식의 가치를 뜻하는 주가가 마치 ‘희망 소비자 가격’처럼 거래 장소,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면? 한국에서도 같은 시점에 특정 기업 주식을 서로 다른 주가에 살 수 있는 시대가 열린다.
금융투자협회와 증권업계는 한국거래소와 경쟁할 대체거래소 도입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다. 한국은 증권사가 투자자로부터 상장 주식 매매 주문을 받은 뒤 모든 주문을 한국거래소에 보내는 ‘거래소 독점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시점의 A기업 주가는 단 하나일 수밖에 없고, 투자자는 아무런 대안 없이 그 가격에 주식을 매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체거래소가 도입되면 증권사는 한국거래소와 대체거래소 중 현재 주가가 싼 곳에 주문을 제출해 거래를 체결할 수 있게 된다.
대체거래소는 과거 주식시장 구성원으로만 활동하던 금융사나 브로커, 딜러 등이 연합체를 만들어서 독자적으로 매매체결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IT 시스템이 발달한 덕분에 가능한 구조다. 일반 거래소의 경우 백화점·대형마트처럼 상장기업 주식과 함께 채권, 외환 등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는데 대체거래소는 이 중 특정 상품만 취급하기 때문에 수수료를 낮출 수 있다. 또 해당 상품에 대해서는 일반거래소에서 접하기 힘든 전문 상품을 단독으로 제공할 수도 있다.
최근 금투협 주도로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KB증권, 미래에셋대우, 키움증권 등 대형 증권사 실무진은 대체거래소 설립에 관한 회의를 수차례 진행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대체거래소 설립을 위한 증권사별 출자 규모, 거래종목, 일 거래량 수준, 사업성 등에 관한 개략적인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말했다. 현재 대체거래소 설립을 위한 금투협과 증권사 간 태스크포스(TF)는 미국 대형 거래소인 나스닥과 제휴를 맺고 미국식 대체거래소 모델 도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LG CNS가 매매 시스템 개발을 맡을 예정이다.
대체거래소가 설립되면 어떻게 더 싸게 주식을 살 수 있을까. A기업의 주가가 현재 10만원, 발행량은 100만주라고 가정해보자다. 주가는 해당 시점의 투자자 수요·공급에 따라 단 하나의 가격을 갖는다. 100만주 하나하나가 동질하기 때문이다. 이 동질한 주식이 한국거래소와 대체거래소 두 군데에 모두 상장해 있다면, 이론적으로 두 곳에서 주가는 같아야 한다. 그러나 주가는 매우 찰나의 순간 시장가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체거래소에서 기관투자자가 대량 매매를 하고, 이에 대한 매수가 즉시 체결되지 않을 경우 A 주식 가치는 한국거래소보다 낮아질 수 있다. 이 왜곡된 주가는 이론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빠르게 돌아가게 되는데, 이 찰나를 이용해서 경쟁력 있는 가격에 차익 거래를 할 수 있게 된다.
“증권사의 최선집행의무 정해야”
주식 매매 시 지불하는 수수료도 절반가량 줄어들 수 있다. 현재 거래소에서 주식 거래가 체결되면 투자자들은 주식 매매를 중개해주는 증권사와 거래소 양쪽에 수수료를 지불한다. 현재 기준으로 증권사 수수료는 최대 0.0005%(스마트폰 매매 기준) 수준까지 낮아져 있다. 거래소 수수료는 0.0027%다. 스마트폰으로 100만원 상당의 B 주식을 매매했다면 5원은 해당 증권사에, 27원은 거래소에 각각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거래소가 생기면 이 27원을 더 낮출 수 있다. 단 건으로 생각하면 큰 혜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단타 매매가 잦은 투자자에겐 큰 혜택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5000만원을 가지고 하루 약 30회, 연간 1만회의 매매를 한 경우, 수익률을 제로라고 가정해도 총거래금액은 무려 5000억원이다. 거래소에 지불하는 수수료(0.0027%)만 1350만원에 달한다. 이 수수료의 절반만 줄인다고 해도 675만원을 아끼는 셈이다.
대체거래소가 미국·유럽처럼 기존 거래소와 경쟁하는 수준으로 성장하고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증권사의 ‘최선집행의무’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종목이 두 개의 거래소에 상장돼 있을 경우 증권사는 어디에 주문을 제출하는 것이 투자자에게 가장 유리한 것인가를 판단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의 경우 주문 시점, 가장 가격 경쟁력이 있는 곳에서 거래를 체결하면 의무를 준수한 것으로 본다. 유럽과 일본은 증권사가 자체적인 기준에 따라 유연하게 판단하게 하고, 추후 이를 고객들에게 공지하도록 했다. 유럽의 증권사는 최선집행의무를 광범위하게 해석해 대체거래소에서 적극적으로 거래를 체결, 대체거래소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 증권사들은 거래 체결의 안정성을 중시해 기존 거래소인 도쿄증권거래소에 대부분 주문을 제출했다. 그 결과 일본의 대체거래소 시장 점유율은 한자릿수에 그치고 있다.
이윤재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일본처럼 오랜 기간 독점 거래 시장이 존속돼 온 국내 환경을 고려했을 때 유럽식 최선집행의무는 ‘경쟁 도입’이란 대체거래소 설립 취지를 훼손할 것”이라며 “주문시점의 가격 외에 주문 유형, 투자자 특성에 따른 매매체결 가능성, 체결 속도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구체적인 방향성을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유럽서 344개 대체거래소 운영 중
한국의 대체거래소 설립 움직임은 해외 선진국보다 30년 가까이 뒤처져있다. 2015년 한국거래소가 처음 도입을 논의하다 무산된 것을 따지더라도 미국·유럽 등지에서는 벌써 1980년대 중반부터 대체거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는 90개의 대체거래소가 있으며, 유럽은 254개, 캐나다 8개, 일본 2개 등이 운영 중이다.
시작이 빨랐던 만큼 뉴욕증권거래소(NYSE) 같은 전통 거래소와의 경쟁도 치열하다. 미국은 현재 전체 거래에서 대체거래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40%에 육박한다. 예를 들어 대체거래소는 지정가로 특정 주식을 빠르게 사고 싶은 투자자가 있을 때, 이를 팔아주는 투자자가 나오면 즉각적인 유동성 공급 대가로 수수료를 되돌려줬다. 그 덕에 거래소 대비 ‘신속한 매매 체결’을 내세워 빠르게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었다. 가장 성공적인 대체거래소로 자주 거론되는 ‘배츠(BATS·Better Alternative Trading System)’도 이 방식으로 미국 대체거래소 시장에서 성장했다. 배츠는 크고 작은 인수·합병(M&A)을 거쳐 2014년 NYSE와 나스닥의 과점체제를 무너뜨렸고, 2016년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와 합병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위기 의식을 느낀 전통 거래소들도 국경을 초월한 M&A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2013년 주식 거래 중심의 NYSE는 파생상품 거래 중심의 대륙간거래소(ICE)와 합병했다. 그 직전인 2012년 말 홍콩증권거래소(HKEx)가 런던금속거래소(LME)를 인수했고, 런던증권거래소(LSE)는 유럽 2위 대체 거래 시스템인 터퀴즈(Turquoise)를 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