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장품 성분을 용기에 표기하는 이른바 ‘막대그래프 표기법’이 하나의 브랜드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놓고 토니모리(법무법인 바른 대리)와 LG생활건강(법무법인 광장 대리)이 벌였던 치열한 법적 분쟁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시장 점유율이 높은 토종 화장품 브랜드끼리 맞붙었기에 법조계뿐 아니라 유통 업계의 이목도 쏠린 사건이었다.
4여 년간 이어진 소송 끝에 승리를 거머쥔 쪽은 토니모리였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올해 2월 LG생활건강이 토니모리를 상대로 낸 부정경쟁 소송에서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막대그래프 표기법이) 원고(LG생활건강)의 상품임을 표시한 표지로서 인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토니모리의 손을 들어준 2심 판단을 인용했다. LG생활건강의 표장 중 효능과 유효 성분, 포함되지 않은 화학 성분 표시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영역’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이번 판결의 핵심으로 꼽힌다. 화장품 업체 간에 유사한 법적 분쟁이 발생한다면 이번 판결 내용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LG생활건강 “막대그래프 표기, 독자적 성과” 소송 제기
사건의 발단은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LG생활건강이 출시한 화장품 브랜드 ‘빌리프’는 유해 화학 성분 비율이 ‘0%’라는 점을 강조하며 용기에 막대그래프를 넣었다. 이 표기법이 타 중소 업체 사이에서도 유행하자 LG생활건강은 그중 한 곳과 소송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소송전에서 LG생활건강은 출시 이후 3년간 제품 외형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부정경쟁방지법에 따라 승소했다.
토니모리도 2019년 2월 ‘닥터 오킴스’ 라인을 출시하며 막대그래프 표기법을 적용했다. LG생활건강처럼 유해 화학 성분이 0%라는 점을 용기 전면에 강조했다. 빌리프 제품이 출시된 지 10년 가까이 됐으니 막대그래프도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표기법으로 자리 잡게 됐다는 게 토니모리 측 입장이었다. LG생활건강의 생각은 달랐다. 막대그래프 표기법이 빌리프만의 독자적인 표기 방법이며, 토니모리가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LG생활건강은 1억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냈고 1심에서 승소했다. 당시 재판부는 빌리프의 막대그래프 표기법이 브랜드 가치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화장품 외형이 단순 포장을 넘어서 브랜드 가치 등의 ‘성과’로 인정될 경우 부정경쟁방지법에 의해 보호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막대그래프만 보고 LG생활건강 제품 떠올리기 어려워” 입증
항소심 재판부터 합류한 법무법인 바른은 ‘저작권은 아이디어를 보호하는 권리가 아니라 표현을 보호하는 권리’라고 주장했다. 즉, LG생활건강이 처음 시작한 막대그래프 표기법이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표현을 보호하는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다는 법리를 내세운 것이다.
바른 변호인단은 또 막대그래프 표기법이 빌리프라는 상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소송의 쟁점이 된 지적재산은 막대그래프 표기법 그 자체일 뿐, 빌리프라는 문자 상표가 아니라는 취지였다. 이는 막대그래프 표기법이 유명한 상표이자 LG생활건강만의 것이라는 논리와 배치되는 주장이었다.
변호인단은 부정경쟁방지법 제2조 1호를 낱낱이 분석했다. 제2조 1호의 (가)목은 ‘유명한 상표와 동일·유사한 상표를 사용해 소비자로 하여금 오인·혼동하도록 하는 것’을 부정경쟁행위로 정의한다. (파)목은 ‘(가~타목에서 규정한 부정경쟁행위 외에) 타인의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 등을 공정한 상거래 관행이나 경쟁 질서에 반하는 방법으로 자사 영업을 위하여 무단으로 사용함으로써 타인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규제하고 있다. (가)목에 따라 막대그래프가 ‘유명한 상표’로 인정받기 위해선 고객 흡인력이 있어야 한다. 바른 변호인단은 소비자가 막대그래프만 보고도 빌리프를 떠올릴 수 있는지 미지수라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문 조사까지 했다. 지난해 6월 바른의 의뢰로 한국리서치 마켓인사이트 사업본부가 진행한 ‘화장품 브랜드 수요자 인식 조사’에 따르면, “제시한 이미지를 보신 후 떠오르는(생각나는) 화장품 브랜드는 무엇인가요? 떠오르는(생각나는) 브랜드를 모두 선택해 주세요”라는 설문에 빌리프를 선택한 답변자 비율은 18%에 불과했다. 피지오겔, 닥터지 등 14개 브랜드 중 5위로 나타났다. LG생활건강의 주장대로 막대그래프 표기법이 (가)목에 의해 보호받으려면 ‘유명한 상표’로서 기능해야 하지만, 소비자는 LG생활건강의 주장처럼 인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다. 바른은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파)목과 관련한 주장도 펼쳤다. 막대그래프 표기법이 (파)목에 의해 보호받기 위해선 고객 흡인력이 인정돼야 하는데, 소비자가 여러 브랜드를 떠올렸던 만큼 LG생활건강의 막대그래프 표기법의 경쟁력이 높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심 판단 전면 뒤집은 2심…대법원도 인용
결국 서울고법 민사 4부(부장판사 이광만)는 지난해 10월 토니모리의 손을 들어줬다. 2심 재판부는 특히 바른의 의뢰로 시작된 설문 조사를 판결문에 인용했다. 재판부는 “원고(LG생활건강) 표장만 제시됐을 때 빌리프가 아닌 다른 화장품 브랜드를 떠올린 소비자가 많다는 점에서, 특정 상품임을 연상시킬 정도로 개별화됐다거나 국내에 널리 인식됐다고 보기에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또 항소심 재판부는 LG생활건강의 제품 표장만을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효능이나 유효 성분을 막대그래프 등을 이용해 표시한 화장품이 다수 출시되고 있다”며 “제품의 광고, 매장 인테리어 등에 표장과 함께 ‘빌리프’ 브랜드가 비중 있게 사용되는 등 브랜드의 철학과 전체적인 디자인 등이 인기의 원인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광범위하게 이용돼 온 막대그래프 표기법 등으로 제품을 구성해 경쟁하는 것은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허용된다”며 “이에 따라 LG생활건강의 표장 자체가 별도로 독립해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라고 보기 어렵고, 토니모리가 해당 표장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도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LG생활건강 측이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하급심 판단이 옳다고 보고 올해 2월 원심을 확정했다. 결국 바른의 주장이 대부분 받아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