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일본 손해보험사 솜포홀딩스가 일본에서 보험업을 시작한 해다. 1922년 한국 최초로 설립된 조선화재보다 34년 빠르다. 솜포홀딩스는 지진·태풍이 일상이라는 일본에 화재보험을 처음으로 들여오며 보험산업을 선도했다. 솜포홀딩스는 설립 128년 뒤인 2016년 요양 산업에 뛰어들며 연 매출 1조원을 가볍게 기록했다.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 할 보험 업계에 또다시 이정표를 보여준 것이다. 2023년 12월 15일 솜포홀딩스가 운영하는 요양 시설을 방문해 성공 비결을 취재했다. 솜포홀딩스에 따르면, 솜포홀딩스가 요양 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설립한 자회사 솜포케어의 매출액은 2016년 1107억엔(약 1조73억원)에서 2023년 1498억엔(약 1조3681억원)으로 증가했다. 솜포홀딩스는 2015년 요양 업계에서 대기업으로 꼽히는 와타미와 메시지를 인수한 뒤 2018년 7월 솜포케어로 합병했다.
2023년 7월 기준 솜포케어가 일본 전국에서 운영 중인 요양 시설은 약 2만8600실에 달한다. 개호홈 302개, 노인용 주택 147동, 그룹홈 21개, 재택 개호는 561개, 통소 개호는 57개다. 개호(介護)는 장기 요양의 일본어 표현이다. 솜포홀딩스가 요양 산업에 뛰어든 이유는 저출산·고령화로 보험 가입 수요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보험사가 걱정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일본의 75세 이상 고령 인구는 2015년 1650만 명에서 3년 만에 1764만 명으로 증가, 같은 기간 65~74세 인구(1766만 명)와 비슷해졌다. 솜포케어 유스케 야스다 경영기획부장은 “일본 인구가 감소하고 있고 고령자도 많아져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며 “손해보험사 입장에서는 고령층과 접점이 없어 고객과 만날 기회를 만들고 싶었던 것도 사업 시작의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요양보호사 69만 명 모자라”…IT로 효율성 극대화
그렇다면 솜포케어는 어떻게 요양 산업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2023년 12월 15일 도쿄 세타가야구 미나미에 있는 요양 시설 솜포의집(Sompoのいえ)에서 만난 하루타 아이 시설장은 “가장 큰 장점은 정보기술(IT)”이라고 답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울트라파인버블’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눕혀 기계 안으로 집어넣기만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거품이 몸에 달라붙어 때를 벗겨내는 역할을 한다.
요양보호사가 40분 넘게 직접 목욕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누워있는 사람의 자세를 자동으로 바꿔주는 침대도 요양 시설의 자랑거리다. 이 침대는 일정 시간이 되면 위치별로 압력을 조절해 자동으로 사람의 자세를 바꿔 침대 사이에 공기가 통하도록 해 욕창을 방지한다. 요양보호사들이 2시간마다 누워있는 노인의 자세를 바꿔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IT 활용 덕분에 솜포의집은 요양보호사 1명이 노인 3명을 24시간 돌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미나미에 있는 솜포의집은 92명이 거주 중인데, 요양보호사는 이보다 적은 30여 명에 불과하다.
특히 솜포홀딩스는 별도의 연구실을 설립해 요양 시설에서 활용 가능한 각종 기술을 개발한 뒤 이를 전국 솜포의집에 적용하고 있다. 하루타 시설장은 “IT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며 “오전 9~11시 노인 6명을 목욕탕에 보내는 걸 집단 원조라고 하는데, 현재는 IT 활용 덕분에 집단 원조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솜포케어가 IT에 집착하는 이유는 요양보호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저출산·고령화로 노인복지 수요는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는데, 노인을 돌봐줄 요양보호사 수는 제자리걸음이다. 솜포케어에 따르면, 올해 요양보호사 수요는 233만 명인 반면 종사자 수는 211만 명뿐이다. 솜포케어는 2040년 수요가 280만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 IT 없이는 노인을 24시간 돌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24시간 데이터 수집해 맞춤형 돌봄 제공
솜포의집의 또 다른 특징은 이곳에 거주하는 노인 정보가 24시간 수집된다는 것이다. 수집된 정보는 노인의 병력과 복용 중인 약 등 기본 정보는 물론 식사 횟수와 식사량, 화장실 이용 횟수, 배설량, 호흡·심장박동수, 수면 패턴, 인지기능, 활동량, 요양보호사 도움 요청 횟수 등 다양하다. 솜포케어는 이렇게 수집한 모든 데이터를 자체 구축한 ‘리얼데이터 플랫폼(RDP)’에 입력한 뒤 이를 토대로 개별 맞춤형 돌봄 계획을 만든다. 계획에 따라 돌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추가되는 데이터를 다시 RDP에 입력하는 방식이다.
RDP에 탑재된 인공지능(AI)은 입력된 데이터를 자체적으로 분석, 노인의 건강 상태를 점수로 표시해 준다. 특히 노인의 급격한 변화를 자동으로 인지해 요양보호사에게 통보하고, 3개월 뒤 건강 상태를 예측해 준다. 솜포케어는 이런 플랫폼을 외부 업체에 제공하는 에가쿠 사업까지 진행하고 있다. 솜포의집 월 이용료는 31만5000엔(약 286만6500원)이다. 솜포의집보다 더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솜포나비레 등의 월 이용료는 37만~56만엔(약 336만7000~509만6000원)에 달할 정도로 적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입거율 90%를 넘길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부 지역은 시설 입소를 기다리는 대기자가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유스케 경영기획부장은 “일본에는 개호 등급이 있는데, 등급이 높을수록 가족이 돌봐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에 시설에 있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편해 인기가 많은 것 같다”며 “솜포케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사고도 없고 병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규제에 가로막힌 한국…정부는 “다른 대안 있다”
한국 보험사들도 솜포케어를 벤치마킹해 요양 산업에 진출하고 있다. KB라이프생명의 자회사 KB골든라이프케어는 생명보험 업계에서 최초로 서울 송파구와 서초구 등에 요양 시설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시골에 있는 기존 요양 시설과 달리 주요 도심에 위치해 접근성을 높여 차별화를 뒀다. 두 요양 시설 대기자만 5000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를 끌자 생명보험 업계 1위인 삼성생명을 비롯해 신한라이프, NH농협생명도 요양 산업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 요양 시설을 갖춘 솜포케어만큼 외연 확장은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법적인 규제 때문이다. 노인복지법상 10인 이상 노인 요양 시설을 설립하려면 사업자가 토지와 건물을 소유해야 한다. 보험사가 직접 부지를 구입하고 건물을 세워야 하는데, 수백억원의 초기 비용은 물론 3년 이상의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것이다.
요양 시설 임차 허용 등 다양한 대안이 떠오르고 있지만, 구체적인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도 법률 개정 등을 검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방문 요양·간호·목욕 서비스를 한곳에서 다 받아볼 수 있는 시범 사업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보완책이 있다”고 했다. 보험 업계는 금융 당국을 포함한 정부가 규제 혁신에 나서지 않으면, 요양 산업 확장은 늦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솜포홀딩스 관계자도 “처음 요양 산업에 참여하려 했을 때 감독 당국인 금융청의 개입이 매우 많았다”며 “금융청이 더 편하게 해줬더라면 요양 산업을 더 일찍 시작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